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루카 12,35-40
오늘은 설 명절입니다. 예전부터 이날은 기쁨과 경건함으로 지냈습니다. 한 해의 첫날을 조상들과 앞서 가신 분들을 위한 제사로 시작하였습니다. 금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필요한 은총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찬미를 드리며, 앞서 가신 분들에게는 주님의 자비를 청하면서 설날 미사를 봉헌합시다.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시편 90(89),2와 4.5-6.12-13.14와 16(◎ 17ㄱ)
◎주님 저희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나기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주님은 하느님이시옵니다. 정녕 천 년도 주님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나이다. ◎
○주님께서 사람들을 쓸어 내시면, 사람들은 아침 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가나이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아침에 주님의 자애로 저희를 배불리소서. 저희의 모든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 주님 종들에게, 주님의 영광이 그 자손들 위에 드러나게 하소서. ◎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4,13-15
13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14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15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5-40
<또는 18,9-27 또는 마르 4,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인생은 긴 안목에서 보면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을 기다리고, 젊은 시절에는 사랑하는 이를 기다립니다. 나이 들면 누구나 자녀들을 보고 싶어 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기다림에는 늘 아쉬움이 함께합니다. 계산과 계획대로 사람들이 따라와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실망을 느끼고 운명을 생각하며 자식 사랑에 ‘모든 것’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느님을 향해 눈뜨라는 메시지입니다. 인생에 외로움이 없으면 쉽게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확실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다’는 것은 이러한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주님께서는 작은 선행도 기억하시며 갚아 주십니다. 부족한 기도라도 언젠가는 들어주십니다. 먼저 이 사실을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느낌을 감추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그렇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드러내며 기도해야 합니다. 가끔은 감실 앞에서 자신의 ‘일상사’를 보고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실천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말씀의 실천이 곧 행복입니다.
설 미사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찬미 예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차례 지내셨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정초부터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일까?’ 우리는 ‘죽음’이라하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조상들은 새해 첫날부터 죽은 조상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예절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사실 이 전통은 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어남에 기뻐하는 동시에 사실은 죽음의 시간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선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향하고 있지만 그 죽음이 너무 멀리 있는 것인 양 생각하며 살기에 막상 마지막 순간이 닥치면 ‘조금 더 살았으면~’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부제 때 이태리 어떤 시골 본당에 실습을 나갔을 때였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병자성사를 청하기에 주임신부님과 함께 병원으로 갔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분은 운명 직전에 눈을 뜨고 저에게 인사를 하고 웃어 주었습니다. 그 전 해에 저와 인사를 했었다고 사람들이 말해 주었지만 저는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이 “방금 인사한 자매님은 암 말기 환자에요.”라고 말했지만 워낙 발랄해 보여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분은 그날 저녁으로 운명을 하셨습니다. 아주 편안한 표정이셨습니다. 그분의 장례식은 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성당에 발 디딜 틈이 없어서 40도가 넘는 뙤약볕에도 사람들이 밖에 서서 장례미사에 참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태리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주일미사도 자리가 텅텅 비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시장을 비롯하여 높으신 분들도 서서 미사를 했고 많은 이들이 눈물을 훔쳤습니다. 홀로 남은 남편과 대학생인 두 아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다녔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이 분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 분은 성녀처럼 사셨다고 했습니다. 누구든 길에서 보면 멀리서도 달려와서 인사하고 성서 모임과 가정 모임 등을 조직하여 봉사활동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성당에서는 교리교사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하셨고 또 이웃의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분이 2년 전에 이미 암 말기판정을 받은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여 집에서 요양을 하라 했는데 해오던 활동을 지속했고 갑자기 쓰러지기 전 날까지는 어떠한 통증도 호소한 적이 없다고 남편이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세 달도 못 살 거라는 의사의 말과는 달리 2년을 더 살며 봉사를 했던 것입니다. 이분은 정말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았던 것이고 하느님께서 통증도 없애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새해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항상 준비하고 깨어있는 종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허리에 띠를 두르고 불을 켜놓고 깨어 있어야 하는데, 신랑은 그리스도이고 신부는 바로 교회이며 영적 혼인은 마지막 날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는 도둑처럼 예상치 못한 때에 오게 될 죽음을 잘 깨어 준비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제 2 독서에서도 내일 이렇게 저렇게 해서 돈을 벌어야지 하며 계획을 세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내일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공포이고 행복의 마지막인양 이야기합니다. 저도 한 때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만큼 우리와 가까운 친구도 없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없음을 느낍니다. 저의 첫 번째 기억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억입니다. 앞에서 기어 다니던 모습, 자라를 잡아오셨을 때 제가 손을 넣으려고 하는데 자라가 손가락을 자를 수 있다고 했던 기억,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장례 때 상여 나가던 모습들입니다. 그 때 저는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알고 보니 죽음을 알아서 운 것이 아니라 옆집 형이 때려서 울었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하튼 저는 자라오면서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공포를 갖게 되었습니다. 함께 계셨던 분들이 언젠가는 사라져가고 저도 언젠가는 죽어야한다는 생각에 죽기 전에 이 세상에서 해볼 것 다 해보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는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머리가 아프면 뇌종양인지 알았고 배가 아프면 위암으로 죽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안을 어른들은 웃음으로 넘겨버리셨습니다. 저는 이 공포를 혼자서 이겨내야 함을 알았고 이 공포를 이기는 힘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믿기만 하면 죽어도 지옥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는 성당을 빠지는 일이 없었고 죽음의 공포를 깨끗이 씻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 스스로 죽음으로 뛰어들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우리의 공포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께로 가는 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이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죽음은 이제 우리에게 아주 유익한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렇게도 소원하던 내일이었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는 하루가 그렇게 소중한 것이니 시간을 낭비하며 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는 10년, 누구는 50년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구는 오늘이 마지막 날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50년을 살아도 2년 동안 이 분이 사신 것만큼 가치 있게 살 수 있을까요?
성무일도 끝기도에서 우리는 시메온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여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만민 앞에 마련하신 주의 구원을 이미 내 눈으로 보았나이다. 이교 백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시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시는 구원을 보았나이다.” 시메온은 구원자 그리스도를 보고 감격하여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체험이 있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고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일이 있을 것이라 자신하지 말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끝기도의 마지막에 이렇게 마칩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이 기도는 하루를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은 바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 되게 해 달라는 간절한 소망은 하느님께 가고 싶은 열망을 표현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 수고의 값이 바로 평안한 잠자리와 죽음이라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새해 첫 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며 조상들에게 ‘감사’하고 또 첫 출발하는 날이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저 조상들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진정 ‘복’을 많이 받는 것은, 바로 하느님과 조상과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또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살겠다는 결심’, 이것이 아닐까요?
설 명절
날씨가 추워서 그랬기도 했겠지만 분위기가 쫙 가라앉은 것이
명절증후군 현상이 분명했습니다.
성체를 모시러 나오는 자매님들의 몸에서 음식 냄새가 났습니다.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고 나오셨을 텐데도 냄새가 나는 것을 보면
며칠 계속 음식을 하여 그 냄새가 몸에 배어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명절이 되었다고 좋아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연세 드신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모두 모여서 명절이 기쁠 것이고
아이들도 세뱃돈 받고 맛있는 음식 먹고 친척을 만나 기쁠 것입니다.
나머지에게 명절은
집안청소하고
음식준비하고
손님 접대 하는 것 때문에
피곤하고 번거로운 행사치례일 뿐이고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는 명절기분을 내기는커녕
돈이 없어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곱씹게 되는
속 쓰린 시간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명절에서 한 발짝 빗겨 서있는 사람으로서
요즘 명절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어렸을 때의 명절과 비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뭘 모르는 어렸을 때였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옛날 명절은 지금보다 더 살기 힘들고
지금보다 더 오랜 기간 명절을 치렀는데도
정말 모두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 지금 명절은 옛날보다 더 잘 사는데도 초라하고
더 짧은 데도 더 힘겨워만 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는 너무 배부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음식을 다른 때는 못 먹고 명절 때만 먹을 수 있다면
명절이 매우 기다려지고 기쁘고 풍요롭겠지요.
얼마 전
남미 원시부족의 축제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1년에 한 차례 축제일에만 돼지를 잡아먹는데
이 돼지 바비큐를 마을 사람 모두 모여 같이 먹으면서 축제를 즐깁니다.
그러고 보니 제 어렸을 때 명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명절이 되면 다른 때는 먹을 수 없는 소를 잡아 같이 나눠먹는데
며칠 전서부터 누구네 소인지, 얼마나 큰 소인지
집집마다 또는 모이기만 하면 그 얘기하면서 마음이 들뜹니다.
그 소고기를 1년에 한 번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명절은 충분히 기쁘고
그 기쁨 때문에 모든 힘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게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원하기만 하면 소고기를 아무 때나 먹을 수 있고
너무 많이 먹어서 걱정이던지 광우병 때문에 걱정하고 있습니다.
늘 배부르니 축제가 기다려지지 않고
기다리지 않으니 기쁨도 풍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명절을 기쁘게 하는 것이 명절 음식만이 아닙니다.
같이 명절을 준비하고 같이 먹고 같이 명절을 즐기는 것입니다.
준비도 누림도 같이 하는 것, 여기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大同이라고 합니다.
작년 우리는 달걀을 같이 만듦으로써
부활 축제가 더 기뻤던 경험이 있고
그제는 눈을 같이 치움으로써 눈치는 일이 즐거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대동을 하면 하는 일이 사랑과 보람, 심지어 즐거움이 되는데
혼자 하면 괴롭고 힘들고 지치게 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명절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만남입니다.
너무도 보고 싶지만 평소에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을
명절에는 만날 수 있기에 명절이 기쁩니다.
명절이 되어도
아무 만날 사람이 없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날 사람, 찾아와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은
명절이 기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픕니다.
그래서 어제는
제가 아는 탈북자들에게 전화로라도 새해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새 해의 복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이 받아야 할 새 해의 복은 북에 남은 가족을 데려오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이 명절은 사랑하는 가족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날이고
가족의 소중함을 더욱 깊이 새기는 날이며
다른 한 편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만족의 대상이 되어주기를 바람으로써
불만하고 미워했던 지난 한 해를 반성하며
새롭게 사랑하기로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한 줄기 연기일 따름>
또 다시 한해가 돌고 돌아 설날입니다. 다시금 한 살을 더 먹게 되는군요. 어린 시절, 어떻게 해서든 한 살이라도 더 나이 들어 보이고 싶은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정반대입니다. 올해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세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나이 먹는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혈기왕성할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 걸기도 하고, 큰 의미 없는 일에 핏대 세우기도 참 많이 했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은 포기가 되니 참 편안합니다.
아웅다웅, 바득바득 살다가도, 상주는 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하면서 즉시 태도를 바꿉니다. 앞장서는 것도 좋지만 뒤에 서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가끔씩 얼굴이 확 달아오를 정도로 열 받다가도 즉시 이렇게 생각을 바꿉니다. “그래봐야 나만 손해지. 인생 뭐있어? 적당히 즐기면서 사는 거지.”
공동묘지에 가보면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무덤들이 줄지어서있는지 모릅니다. 다들 한때 나름대로 한 가닥씩 하셨던 분들입니다. 다들 떵떵거리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분들에게도 보송보송 솜털 같던 시절, 꽃 같은 시절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덩그러니 흙무덤 하나, 그 속에는 퇴색된 유골만이 몇 평 남짓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인 야고보서의 말씀, 백번 생각해봐도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수명이 길다 하더라도 100세를 넘기기 힘듭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할지라도 백일 붉은 꽃이 없습니다. 오늘의 아름다움, 지금 이순간의 상승무드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이 꿈결 같은 행복, 이 순간의 축복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도 잘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순환의 법칙은 때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어느 순간, 꽃 같은 젊음도 가고, 인생의 절정기도 가고, 그 좋았던 시절도 가고, 결국 우리 앞에 남게 되는 것은 시들고 메마른 육체, 그리고 임박한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예외적으로 특별대우를 받게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깨어있는 종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바처럼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사람들과 달리 죽음에 대한 시각이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 죽음으로 인해 끝입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죽음은 공든 탑이 무너지는 순간, 그간 일궈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다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은 우리에게 죽음을 준비시킵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죽음은 결코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임을 일깨워줍니다. 죽음은 나약한 우리 인간과 사랑 지극한 하느님이 온전히 합일되는 감사의 순간입니다. 죽음은 부족한 우리 존재가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충만히 실현되고 완성되는 은혜로운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 신앙인들과는 달리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힘입어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이 절망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희망에 찬 또 다른 출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