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일(나를 따라오너라) - 마르코 1,14-20

2009. 1. 25. 오전 7: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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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5일 연중 제3주일 - 마르코 1,14-20

요나의 예언을 듣고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하였다. 임금까지도 왕좌에서 일어나 잿더미 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신하들에게 참회의 표시로 단식과 절제를 명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보시고 재앙을 거두신다(제1독서). 종말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니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가족 관계에 너무 매이지 말고, 감정과 기분대로 처신해서도 안 된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신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당신의 첫 제자로 어부 네 사람을 선택하신다. 주님께서 부르시자 그들은 즉시 따른다(복음).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5.10
1 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시편 25(24),4-5ㄴ.6과 7ㄴㄷ.8-9(◎ 4ㄱ)
◎주님, 주님의 길을 제게 알려 주소서.
○주님, 주님의 길을 제게 알려 주시고, 주님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 주님의 진리 위를 걷게 하시고, 저를 가르치소서. 주님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
○기억하소서, 주님, 먼 옛날부터 베풀어 오신 주님의 자비와 자애를. 주님, 주님의 자애에 따라, 주님의 선하심을 생각하시어 저를 기억하여 주소서. ◎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시도다. 가련한 이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고, 가련한 이들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시도다. ◎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7,29-31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어부 네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 따라갑니다. 주님께서 먼저 다가가신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부 생활을 청산합니다. 무심코 읽지만 생각하면 놀라운 일입니다. 인간적 갈등 없이 가능한 일일는지요?
많은 것이 생략되었습니다. 그들이라 해서 미련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끄심’에 마음을 비웠습니다. 미래의 두려움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살기보다는 예수님의 힘으로 살 것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이끄심을 고백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분의 다스림을 인정해야 남 앞에 나설 수 있습니다. 자신은 긴가민가하면서 타인의 확신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맡겨야 ‘힘과 여유’가 생깁니다. 그런 신앙생활일 때 기쁨 또한 주어집니다.
세상은 점점 ‘기쁨의 이유’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배려하신다는 믿음이 약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총이 함께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방향 전환은 순간에 일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긴 아픔’을 거친 결단입니다.



 

연중 제 3주일-행복 대장정에 나서자!

누가 뭐래도 꿈쩍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뜻에서 그러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웃겨도 웃지를 않습니다. 감동적인 말을 해도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感動이란 말 그대로 느낌이 움직이는 것인데 느낌이 꿈쩍 않는 것, 즉 無感動이며
마음이 꿈쩍 않는 것, 즉 無心함입니다. 마음 아픈 일이 벌어져도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상처를 줘도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용무가 있으면 그 일만 최대한 간단히 처리하고 좋은 경우건 나쁜 경우건 인간관계와 관련이 있는 것에는 일체 반응하지 않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마음과 감정을 싣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 오직 즐거움이고 귀찮게 하는 사람만 없으면 하루 종일 혼자 T.V를 보며 지내도 됩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불행이 사실은 불행을 방어하려다 생긴 불행입니다. 슬픔을 느끼지 않으려고 느낌을 닫아버린 것이고 마음 아픈 일로 괴로워하지 않기 위해 無心作戰을 쓴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슬픔을 느끼지 않지만 기쁨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고 괴로움에 무감각하지만 아무런 즐거움도 없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제 2독서인 고린토 전서 7장의 말씀은 또 다른 차원에서 무감각한 사람에 대해 얘기합니다.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살고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나쁜 뜻에서 무감동한 사람과 같아보이지만 속뜻은 이 세상 것들로 一喜一悲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것들 때문에 기뻐하고 슬퍼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고 이 세상 것들은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이 세상 것들에 대해 무감각하지만 천상 것들에 대해서까지 그러한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천상 것들에 대해 감각을 버리고 천상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니니베의 사람들과 복음의 제자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오늘 니니베 사람들은 요나의 외침에 즉시 마음을 움직입니다.
회개란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회개를 외쳐도 꿈쩍 않는 것이 아니라
즉시 마음을 움직여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니니베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도 마음을 돌리시어 재앙을 거두십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도 즉시 움직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따라 나섭니다.
지난 주 요한복음과 달리 제자들은 구도자들이 아니라 원래 고기잡이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먹고살기 위해 이 세상살이에 충실하던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부모와 처자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부르시자 즉시 따라 나섭니다. 하던 일을 버리고 부모와 처자식을 버리고 따라나섭니다.
주님께서 뭐라 하시던 들은 척 않고 자기 일 계속 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아무리 외쳐도 꿈쩍 않는 것이 아니라 외침에 응답하고 부르심에 즉시 따라 나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사는 삶을 시작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다 합니다. 행복을 완성한 것은 아니지만
행복을 위한 대장정을 나선 사람들로서 행복하다 합니다.
누가 뭐래도 아무리 외쳐도 꿈쩍 않던 사람이 마음과 몸을 움직여 주님을 따라 나서는 것이고 주님과 함께 천국을 사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

연중 제3 주일 -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설악산 울산바위 밑에서 며칠 묵은 적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아침에 보는 울산바위의 전경은 빠져들듯 아름답고 장엄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또 조금은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나의 산이 바위로 되어있어서 보기엔 장엄하지만 그만큼 풍화에 끄떡없어 마치 그 산이 사람이라면 참 고집스런 사람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첫 번째 제자들을 뽑으십니다. 네 명 모두 어부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니 그들은 가족도 배도 그물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첫 번째 제자들의 가장 큰 특징인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극단적으로 순명할 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이미 당신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줄 아는 순박한 사람들이었지만 당신은 그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히십니다.

 만약 그들이 평생 고기만 잡고 살았다고 생각해봅시다. 마지막 날 주님께 나아가 하느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었을까요? 세상 모든 물고기들이 다 하느님 것인데 그것들이 하느님께 가치가 있을까요? 신발공장 사장에게 신발을 선물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도 갖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마치 내가 아무리 어떤 사람을 사랑하더라도 그 상대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엔 영원히 짝사랑의 슬픔으로 남아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사람만은 당신 것으로 하실 수 없으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선물은 바로 ‘사람’입니다. 물론 그 사람엔 자기 자신도 포함됩니다. 만약 어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잘 물려주어 그들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그 자녀들 때문에라도 하느님께서는 부모에게 큰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 낚는 어부!’란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 삶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만큼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에 온전히 훈련받지 못한 어부는 또 그만큼 많은 물고기를 잃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물코가 하나만 끊어져있어도 그걸 통해서 많은 물고기가 빠져나가듯이 영혼을 낚는 어부들은 조금도 불완전이 없어야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울산바위와 같이 너무도 강한 돌덩이 같은 자아를 지니고 있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훌륭한 어부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마치 옹기장이와 같습니다. 옹기장이가 고운 흙으로 질그릇을 만들어야하는데 그 흙이 자갈들이라 깨어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질그릇은커녕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 중에도 이런 제자가 한 명 있었는데 바로 ‘가리옷 유다’였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자신들을 부수어 고운 흙이 되어가는 반면 유다는 예수님의 망치질에 오히려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제들은 ‘중재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인간을 중재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대사제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바쳐 당신을 믿는 이들과 한 몸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한 몸을 이룬 사람들을 다시 아버지께 바칩니다.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는 순교를 당합니다. 요한도 끓는 기름 속에 던져졌었는데 기적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순교를 하지 못한 것이지 사실 순교하기를 제일 소원하던 제자였습니다. 제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듯이 예수님은 이렇게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목자들을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번 용산 재개발 강제 철거를 막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을 보며 과연 나는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걸 수 있는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목숨을 바치는 것이 사랑이라면 ‘자신’만 생각하는 것은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잊는 것입니다. 자신을 잊고 비우는 것을 ‘겸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지 못하면 남을 죽이게 됩니다. 그러나 나를 죽이면 남을 살리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 2,6-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자신을 비우고 순종키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먼저 대사제로서 당신이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을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삼 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 죽기보다는 도망치는 편을 택합니다. 아직도 사랑을 위해 온전히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하, 요한 21장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을 크게 배반한 것을 후회하면서도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며 호수로 나갑니다. 다른 제자들도 함께 잡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밤새 그물을 치지만 고기는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실은 교회의 수장으로서 다른 제자들과 영혼을 구하는 일을 상징적으로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삼 년 전에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베드로는 사람을 낚을 능력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새벽이 밝아옵니다. 예수님은 호숫가에 스셔서 “무얼 좀 잡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그 분이 예수님인 것을 모르고 그저 “아무 것도 못 잡았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평생 어부로 살아온 이들에겐 사실 모욕과 같은 말입니다. 배를 타보지도 않았을 법한 사람이 호숫가에서 약 올리며 농담으로 하는 소리처럼 들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제 어린이의 말에까지 순명할 정도로 겸손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군지 모르는 한 사람의 말에 순종합니다. 자신들을 온전히 버렸다는 증거입니다. 정말 오른 쪽에 그물을 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 때 요한이 “저분은 주님이십니다.”라고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온전히 순종할 정도로, 아니 어린아이에게까지도 순종할 수 있을 정도로 겸손할 줄 알아야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구할 수 있음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십니다. ‘자신’은 자아, 자존심, 자애심 등,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죽이라는 뜻이고, ‘매일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한 매일 매일의 꾸준한 ‘노력’입니다. 영성에서 꾸준함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자기포기’와 ‘꾸준한 노력’ 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절대적 요소입니다. ‘자신을 버리는 사랑’과 ‘꾸준함’만 지니십시오. 주님께 많은 영혼을 바쳐드릴 수 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에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출장뷔페가 차려진 식당에서>


   어떤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결혼식 끝나고 의례 출장뷔페가 차려진 홀로 안내가 되지요. 그리로 가시면 제일 먼저 어떤 음식에 손이 가십니까? 갈비를 수북이 담아 와서는 환한 얼굴로 신나게 먹어대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조금은 서글퍼지더군요.


   저 같은 경우 요즘 ‘뜯는 작업’이 필요한 갈비나 고기류에는 전혀 손이 가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제 눈에 들어오는 음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쌍하게도 호박죽입니다. 집에서도 늘 먹는 밥이나 김치 정도입니다.


   한때 그렇게 정신없이 좋아하던 양념갈비였는데, 한때 그렇게 먹고 싶던 삼겹살이었는데, 이제 별 관심도 없습니다. 이거다 하는 맛도 느끼지 못합니다. 절차가 복잡한 음식은 싫습니다. 그저 간단히 한 그릇 먹는 게 최고입니다.


   제가 요즘 영적생활만 너무 강조하다보니 그런가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제 입이 고급으로 변했나, 생각해보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그저 맛있는 것, 특별한 것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시시해졌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결혼식 뷔페석상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 것들의 특징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말입니다. 우리의 촉각을 곤두서게 하는 세상 것들이 대부분 지닌 한 가지 특징은 유한성입니다.


   돌이켜보십시오. 한때 우리가 그토록 혈안이 되어 찾아다녔던 세상의 재미들이 세월과 더불어 이제는 우리들의 관심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한때 목숨조차 걸 정도로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던 대상들이 이제 별것 아닌 것들로 전락되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인 저이기에 어쩔 수 없는가봅니다. 요즘 제게 가장 큰 관심사는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런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어찌 그리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이 정말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한 아이가 아픈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고 활짝 웃으며 일어서는 것을 볼 때면 보*탕 몇 그릇 먹는 것보다 훨씬 기쁩니다. 한 아이가 악습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혼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제 갈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3만 원 짜리 뷔페 10번 가는 것 보다 훨씬 더 기분 좋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추구해야 될 보다 항구한 대상, 보다 차원 높은 대상,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 대상은 바로 예수님이시며, 그분께서 남겨주신 복음이며, 복음의 핵심정신인 사랑입니다. 그분께서 즐겨하실 영적생활입니다. 영혼에 우위성을 두는 삶입니다.


   예수님, 그분은 만날 때 마다 새롭습니다. 그분께로 돌아갈 때 마다 뭔가 색다릅니다. 그분의 복음 역시 단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펼칠 때 마다 복음의 모든 페이지는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선택할 대상, 마지막으로 돌아갈 대상은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기쁨입니다. 희망입니다. 구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무질서한 향락의 세계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우리만큼은 늘 단정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선택하는 나날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따라 첫 사도 단에 가입한 제자들의 성소 여정을 묵상해봅니다. 제자들은 어제까지 지녀왔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을 떨쳐버려야만 했는데, 그것은 꽤 큰 부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총체적인 삶의 전환을 당부하셨습니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길, 검증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인생을 새로이 시작해야만 했던 제자들은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큰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모험을 꺼려합니다. 반면에 기존의 생활양식을 고수하는 안정된 생활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안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떠나기를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또 예수님께서는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여행길을 떠날 것을 요청하십니다. 매일 매 순간 변화될 것을 당부하십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기존의 틀을 벗어난다는 것, 과거의 생활방식을 탈피한다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변화되고 성장하기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 옛날 사도들처럼 지난 과거를 주님 자비에 모두 맡기고 다시 한 번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따라나서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나를 따르라 김정식 (로제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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