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기념일-마르코 4장 1-20절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11-18
11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3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15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증언해 주시니,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6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그들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그들의 마음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생각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17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의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2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3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12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3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14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15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16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17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18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19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것’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노력 없이 주어지는 은총은 없습니다. 어떤 이가 무심코 축복을 받는 것 같아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누군가 그를 위해 기도했거나 본인이 남모르는 선행을 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좋은 땅이 되어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마다 좋은 땅이 되는 길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참는 것이고, 어떤 이는 베푸는 것일 수 있습니다. 믿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주님께서 알려 주십니다.
야생의 풀은 바람이 불면 바람보다 먼저 눕습니다. 길을 비켜 줄 줄 아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자연이 주는 건강함이 있습니다. 신앙인도 하늘만 믿고 살아야 진정 건강한 신앙인이 됩니다. 자연스러운 인간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지금까지 수도원에 살면서 많은 사람이 수도원을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아있는 숫자보다 떠난 숫자가 훨씬 많으니 수백 명이 떠나는 것을 본 셈입니다.
그런데 떠나기로 마음 먹은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많은 경우 한 번 먹은 마음 돌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말을 통한 설득력을 총동원해도 꿈쩍 하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어도 마음은 꿈쩍 않습니다.
머리와 마음 사이가 그렇게 먼가 봅니다.
다시 말해서 말이 머리까지는 가는데 마음에까지 도달하지는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마음에까지 도달해야 마음을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설득이 마음에까지 도달할까요?
제 생각에 사랑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그렇습니다.
사랑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사랑이 다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사랑받고 있다고 상대방이 느낄 때 움직이는 것인데 나는 정말로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불순물이 있거나 그 정도가 못 미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는 말은 그러므로 순수한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순전히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식이든 자기 욕심이 들어가 있으면 상대는 그것 때문에 사랑을 疑心합니다.
‘疑心’을 풀어 얘기하면 믿지 않는 마음이기에 자기 욕심이 들어가면 나는 사랑으로 했어도 상대는 사랑을 사랑으로 믿지 않습니다.
비록 자기 욕심이 없는 순수한 사랑일지라도 그 정도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가 못되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말로’란 말은 상대가 인정할 정도인 것입니다.
至極한 정도를 넘어서 極盡해야 하고 어느 정도가 아니라 대단해야 하며
시늉 정도가 아니라 끈질겨야 합니다.
이렇게 순수하고 극진하고 대단하고 끈질기게 사랑해야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저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만도 이런 사랑이 필요한데 그 사람에게서 죄를 빼내어 없애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순수하고 극진하고 대단하고 끈질긴 사랑이 필요할까요? 어떤 사랑이 이런 사랑일까요?
오늘 히브리서가 얘기하는 대사제의 사랑이 이런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당신 자신을 목숨까지 제물로 내어주는 그런 사랑이라야 마음을 움직이고
죄를 없애는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
연중 3주간 수요일 - 비옥한 땅, 마리아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먹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그 사람이 뱀과 같은 사람이면 그 좋은 말씀이 독이 되어 남을 해치는데 쓰일 수 있습니다. 다른 열한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신들을 변화시켜갔지만 유독 가리옷 유다만 더욱더 안 좋아져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선 씨뿌리는 이의 비유를 듣습니다. 씨가 땅에 떨어진다고 다 같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길에 떨어져 바로 새(사탄)에게 그 씨를 빼앗기기도 하고, 자아가 너무 강해 그 씨가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 말라버리기도 하며, 세상 걱정으로 그 씨가 자라지 못하고 숨 막혀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수십 배, 수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이 곧 씨인데 말씀의 열매는 그 분과의 일치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떨어져 그 말씀이 예수님이 되고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고 사랑이 되는 것이고 기쁨이고 행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풍성한 열매를 맺을 비옥한 땅을 가질 수 있을까요?
창세기엔 두 가지 창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2장 4절부터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사실 그 앞에 나오는 칠일 간 세상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보다 훨씬 이전에 쓰여진 것입니다. 늦게 쓰여진 것이 제일 앞에 나오고 가장 먼저 쓰여진 것을 뒤에 놓았을 뿐이지 시간상으로는 두 번째 창조 이야기가 먼저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땅에는 아직 아무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시지 않고 그 땅을 갈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땅 안에 이미 물이 있었습니다. 그 물이 땅을 진흙으로 만드니 하느님께서 그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첫 번째 세상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나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는 내용과는 사뭇 다릅니다.
앞에 나오는 세상의 창조와는 다르게 땅엔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오직 그 안에 습기만 차 있습니다. 물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상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물도 마찬가지고 예수님께서 직접, “‘목마른 사람은 나에게 오라. 내가 생명의 물을 주겠다’... 그 물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라고 요한이 말한 대로입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땅에 벌써 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죄로 인해 저주받게 된 땅에 비가 내리는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쏟으실 때입니다. 그 이후로 땅은 다시 생명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총의 비가 내리기도 전에 물이 땅에 충만했다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물을 주시러 오시기 이 전에 이미 생명의 물인 성령님으로 충만했던 땅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라고 인사할 때, 이미 성모님에게 성령님의 은총이 가득했음을 말해줍니다. 비가 내리지 않고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성모님이 동정이심을 의미합니다. 즉, 남자가 없었는데도 그 땅에서 아들을 태어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선 처녀는 아들을 잉태할 수 없지만 영적으로는 처녀만이 아들을 잉태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씀의 씨는 오직 처녀지에서만 그 열매를 맺습니다. 처녀라는 의미는 순결함, 즉 죄가 없음을 의미하고 성모님은 진정 원죄까지도 없는 완전한 처녀이고 그래서 아들을 잉태하기에 적합한 비옥한 땅이었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그 분과 한 몸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분이 죄의 그림자도 없는 순결한 처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맘도 그런 비옥한 땅이 되어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위해서는 성모님과 같은 비옥한 처녀지가 되어야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신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당신의 말씀으로, 당신의 성령님으로 우리가 좋은 땅을 일구도록 도와주십니다. 단지 남는 것은 그 은총을 받아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갈아엎고, 돌을 캐내고, 나쁜 풀들을 뽑아내는 우리들의 의지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거름은 주님께서 은총으로 내려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소출을 내는지 농사를 지어보신 분은 알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그대로 하면 많은 열매를 맺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전삼용 (요셉) 신부 +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끝까지 희망하기>
일천한 경험이지만 작게나마 농사를 지어보니 오늘 복음-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 더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농사짓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풍성한 결실, 그거 그냥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마치 어린 자식 키우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매일 신경 써줘야 하고, 매일 들여다봐주고, 매일 뭔가 해줘야 합니다.
풍성한 결실을 위해서는 반드시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더군요. 품질 좋은 씨앗이나 튼튼한 모종, 정말 중요합니다. 적절한 수분도 빼놓을 수 없지요. 일조량 역시 성공적인 농사의 관건입니다.
더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처럼 ‘좋은 땅’입니다.
좋은 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이나 생각만으로 절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절대로 만들 수 없습니다.
농부들이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 투자하는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이른 봄이 되면 농부들은 밭으로 나가 겨우내 굳은 땅을 완전히 한번 뒤집습니다. 돌이나 잡동사니들을 골라냅니다. 정성껏 마련한 퇴비를 골고루 뿌려줍니다. 다시 한 번 흙을 갈아주면서 부드럽게 만듭니다. 각이나 간격을 잘 맞춰 이랑을 만듭니다. 요즘은 왕성한 잡초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 비닐을 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농부는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을 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제대로 된 땅에서 자라난 농작물, 농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 속에 자라난 농작물의 결과는 100이면 100 정확합니다. 깜짝 놀랄 정도로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물기가 하나도 없어 쩍쩍 갈라진 논에서 탐스런 벼이삭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메마른 자갈밭에서 대견스런 고추나 오이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잡초가 허리까지 와 닿는 밭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 얌체같은 생각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각자는 밭입니다. 매일 적당한 수분을 제공해야 합니다. 매일 달려드는 잡초를 뽑아줘야 합니다. 병충해는 없는지, 열매의 색깔이 제대로 나오고 있는지 매일 들여다봐줘야 합니다.
매일 가꿔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 각자인 것입니다.
이미 우리 각자의 밭에 하느님의 씨앗들이 뿌려졌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내면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씨앗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의 태도입니다. 농사란 것 하루나 이틀 만에 결정되는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멀리 내다봐야 합니다. 그래서 꾸준함이 필요합니다. 오늘 힘들어도 언젠가 반드시 풍성한 결실을 맺으리라는 희망이 중요합니다.
이토록 큰 좌절과 실망의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로마 8장 24절 참조)
애초부터 좋은 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아무리 좋은 옥토라도 지속적인 관리가 없으면 즉시 불모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나 자신에 대한 매일의 관리, 나 자신에 대한 매 순간의 쇄신작업, 끊임없는 보살핌, 기꺼이 땀 흘리기, 끝까지 희망하기, 이런 노력들이 ‘좋은 땅’으로 남기 위한 최선의 방법입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국악성가 55-2 / 기도의 날개를 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