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자라는 씨에 비유 * - 마르코 4,26-34

2009. 1. 30. 오전 6:38:53

글자
 

1월 30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 마르코 4,26-34

 
 
<많은 싸움을 견디어 냈으니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32-39
형제 여러분, 32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33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34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5 그러니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 36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37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39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시편 37(36),3-4.5-6.23-24.39-40(◎ 39ㄱ)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도다.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고, 이 땅에 살며 신의를 지켜라.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떠오르게 하시며,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 ◎
○주님께서는 사람의 발걸음을 굳건히 하시며, 그의 길을 마음에 들어 하시리라. 그는 비틀거려도 쓰러지지 않으리니, 주님께서 그의 손을 잡아 주시기 때문이로다. ◎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주님께서는 곤경의 때에 그들의 피신처가 되어주시도다. 주님께서 그들을 도와 구하시고, 악인들에게서 빼내어 구원하시니, 주님께 몸을 피한 까닭이로다. ◎
 
<씨를 뿌려 놓으면,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그때에 2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나무는 저절로 자라는 듯이 보입니다. 때가 되면 잎이 나고, 시간이 흐르면 큰 나무가 되는 듯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저절로 자라는 듯이 보일 뿐입니다. 보이는 나무 뒤에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습니다. 나무의 성장은 뿌리가 좌우합니다.
뿌리는 땅속에 있습니다. 지하에 흐르는 물과 영양을 빨아들여 줄기로 보냅니다. 그러니 뿌리의 활동이 멈추면 나무는 절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면 이미 뿌리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나무에도 뿌리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시간’입니다. 그 부분이 튼튼하면 줄기는 자동적으로 건강해지고 꽃은 당당하게 피어납니다. 보이지 않는 기도 생활입니다. 드러나지 않게 성사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남모르게 베푸는 선행이 ‘신앙이란 나무’의 살아 있는 뿌리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작은 믿음도 정성으로 다가가면 큰 믿음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정성 역시 보이지 않는 부분을 잘할 때 빛을 발합니다. 강한 겨자 나무도 뿌리가 시원찮으면 자라날 수 없습니다. 언제라도 ‘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이는 부분’을 좌우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연중 3주간 금요일 - 인간의 ‘영’이란? 

신학생 때 본당의 한 자매님이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시면서 저희 신학생들에게 식사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대화 도중에 그 자매님은 이런 어려움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저는 특별히 걱정할 것도 없고 돈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있고 남편 자녀들도 신앙에 열심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눈물이 나요. 자다가 일어나서 혼자 앉아서 그냥 눈물을 흘릴 때가 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저는 나름대로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그 영혼의 빈 공간을 하느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세상 어떤 것도 영혼의 그리움을 만족시켜 줄 수 없어요. 남편도 자녀도 돈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존재적인 외로움을 채워줄 수는 없어요. 오직 주님으로 채우지 않는 이상 그런 공허감은 계속 느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렇게 잘 알면서도 저도 그런 공허감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유학 나와서, 아니 그 전부터도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조여오고 답답하고 불안해졌습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가슴의 초조함은 점점 커져만 갔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머리로 아무리 주님과 함께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가슴을 달래도 가슴은 들은 척 만 척 했습니다. 성체조배를 아무리 해도 한 두 시간 마음이 편안해 질뿐이지 조금 지나면 다시 마음의 초조함이 급습해왔습니다.

저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모릅니다. 다만 위의 자매님에게 말한 대로 내 마음을 주님으로 채우기 위해서 성체조배하고 성경 읽고 영성서적을 읽고 묵상하며 닥치는 대로 마음을 성령으로 채우려 했습니다. 처음엔 깨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그 마음의 공허함이 다시 급습해 왔지만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게 그 초조함이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한 삼,사 년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저의 믿음을 한 단계 높여주시기 위해 그런 마음의 초조함을 주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밭에 뿌려놓은 씨앗과 같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그것이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지만 밤낮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저절로 싹을 틔우고 자라나 어느새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우리 영 안에서 마치 씨앗과 같이 서서히 자라납니다. 마치 콩나물을 키울 때 매일 물을 주어도 물이 밑으로 다 빠져나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매일 매일의 수분으로 조금씩 자라나는 것처럼 하느님나라도 우리 마음 안에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조금씩 자라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누가 저와 같은 증세를 호소하면, 즉 원인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고 초조하다고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당신 안에 있는 영이 당신 자신에게 대화를 거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여러분의 전부인, 영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까지 흠 없이 지켜주시기를 빕니다.’하신 것처럼 인간은 영과 영혼과 육체로 되어있습니다. 영(마음)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고 하늘나라의 씨앗이 자라는 곳입니다. 영은 이성(영혼)을 뛰어넘기 때문에 이성으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성으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이성으로 아무리 컨트롤하려고 해도 그것보다 높고 깊이 위치해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우리 마음과 양심이 있는 곳입니다. 그 영은 주님의 성령으로 가득 차서 주님의 나라, 즉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육체와 이성이 협조해주지 않기 때문에 목마르다고 자신에게 외치는 소리입니다. 마치 연료 없는 자동차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움직일 수 없어 괴로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콩나물에 물 주듯이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언젠가는 그 목마름이 해소되고 꽃과 곡식이 피어나는 생명의 땅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마치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하지만 조금씩 커져서 당신 마음에 자리 잡으면 새들이 나무에 깃들이듯이 다른 사람들이 당신께 와서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얻어진 행복은 세상 어떤 어려움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줄어들지 않고 계속 자라기만 하는 그 영원한 행복, 그것을 위해서는 절대적 믿음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  *+ 전삼용 (요셉) 신부 +**

 
 
 
하느님 나라
 
지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아마 발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네 다리 수는 보통 15~20쌍이지만, 어떤 것은 170쌍까지 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발이 많은데도 서로 꼬이지 않고 절도 있게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하루는 개미가 그 모습을 보고서 지네에게 물었답니다.
“나는 발이 여섯 개밖에 되지 않지만 발이 교대로 척척 나가는 것이 신기할 때가 있네. 그런데 자네는 발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헷갈리지 않고 차례대로 내디딜 수 있나?”
개미의 질문에 지네가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발이 왜 꼬이지 않은지, 이제까지 어떻게 걸어 다녔는지가 의문이었지요. 그래서 걸을 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발이 나갈 때 다른 발은 어떻게 하더라? 또 다음 발은 어떻게 하지?’ 그러다보니 지네의 스텝이 꼬이면서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모르고 다닐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만, 알려고 하니까 더 이상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 사는 모습이 그렇지 않을까요? 모든 것을 다 알아야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 몰라도 불편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십니까? 내 머리로 어떤 명령을 내리면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고, 또 피는 어떻게 흐르는지 알아야 제대로 움직일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런 것 몰라도 내 몸은 잔 고장 별로 없이 24시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알 수 없는 게 너무나 많습니다. 미래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요.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안해서 걱정으로 가득할 대도 많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다고 해서, 미래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절망하고 도저히 못살겠다고 인생을 포기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미래를 모른다고 해서 시간이 멈추지 않습니다. 또 미래를 모른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스스로 자라는 씨에 비유해서 설명하십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농부는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씨에서 싹으로 움트게 하는 힘이 무엇이고,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농부는 모릅니다. 또 하루에 얼마큼씩 자라는지, 그 장면을 지켜볼 수도 없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밤낮으로 자고 깨다보면 어느새 자라있고 결국 추수할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도 천천히 다가온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 나라가 오지 않는 것 같고 그 때문에 답답하지만, 씨가 자라는 것을 알 수 없는 농부의 비유처럼,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습은 미래에 대한 걱정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대신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아주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를 이루듯, 커다란 하느님 나라를 나도 모르는 순간에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행복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일이다.(존 스튜어트 밀)
                                                                                              [Fr.조명연 마태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 바라볼수록 안타깝습니다. 한창 꽃피어나야 할 그들이건만, 엄청난 무게의 짐을 하나씩 등에 지고 지척지척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갈팡질팡하는 교육정책, 교육철학의 상실, 설설 기는 공교육, 하늘높이 치솟는 사교육, 교육의 총체적 위기 상황, 그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우리 청소년들입니다.

 

   그러나 한숨만 쉬고 있어서는 안 될 이유가 있습니다. 이토록 열악한 교육풍토 속에서도 우리 청소년들을 위해 묵묵히 자신을 불사르고 있는 ‘참스승’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인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시작하는 ‘참스승’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선생님을 뵙고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아이들을 끔찍이도 생각하는 스승입니다.

 

   아이들보다 1시간 먼저 학교에 도착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다리는 스승입니다. 마음이 쓸쓸하고 허전한 아이들을 날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스승입니다. 울고 있는 아이들의 눈물을 매일 닦아주는 스승입니다.

 

   아이들의 담임교사이자 국어교사, 상담교사이면서도 부모로서의 다중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한 스승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방학이 오면 선생님은 아이들을 위한 보다 유익한 교육 자료 수집을 위해 길고도 긴 여행을 떠납니다. 다양하고 풍부한 볼거리로 가득 찬 수업에 아이들은 무척이나 행복해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참으로 감명 깊었습니다.

 

   “인간은 홀로 고립된 섬이 아님을 아이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날은 애인을 만나러가는 여인처럼 아침부터 마음이 달뜹니다. 아이들의 얼굴 한번 보는 것이 제겐 가장 좋은 보약입니다.”


   오늘 복음은 청소년들과 매일 삶을 나누는 부모나 교육자들에게 참으로 의미 있고 유익한 내용의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인간교육이 강제로, 억지로,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순리에 따라,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 적절한 분위기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아이는 전혀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 부모나 교사만 욕심에 가득차서, 이것 저 것, 수많은 잡다한 것을 주입할 때, 아이의 머리는 당연히 혼란 상태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차근차근, 아이의 상황을 살펴가면서, 섭취된 것에 대한 소화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안색을 봐가면서, 한 단계 한 단계 넘어가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오늘도 아이들 때문에 고생이 많으신 부모님들, 교육자들, 다른 무엇에 앞서 인내의 덕을 쌓아나가시길 바랍니다. 때로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영역도 마련해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오늘 우리 아이들이 모자라고 형편없어보일지라도 인내하고 또 인내한다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면,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풍성한 결실 맺을 날이 반드시 올 것임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214번 / 주께 드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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