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토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 마르코 4,35-41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1-2.8-19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8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10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2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13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4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그들에겐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빠지면 죽는다는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기적의 스승님을 모시고 있었건만 ‘인간적 계산’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스승님의 꾸중은 단순했습니다. 세속적 판단의 포기가 그렇게도 힘드냐는 질책입니다.
제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늘의 힘을 보았고 기적의 자리에 동참했던 이들입니다. 그런데도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자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해 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무실 수 있었지만 제자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제자들에겐 부족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힘입니다. ‘위급함을 느낄 때’ ‘불가능이 보일 때’ 우리를 잡아 줄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제자들에겐 이 힘이 약했습니다. 그러기에 죽는다고 소리쳤습니다. 스승님의 꾸중을 듣고서야 그들은 깨닫습니다. 믿음의 힘이 죽음의 힘을 ‘누를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연중 3주간 토요일 - 두려움을 넘어서
제가 어렸을 때 개울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수영을 못해서 친구 등에 엎여 있었는데 왠지 수영이 될 것 같아서 그냥 수영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꾸 몸이 물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물 밑으로 내려가니 발이 땅에 닿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차고 올라오면 간신히 물과 공기를 동시에 들이마실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장난치는 줄 알고 저를 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물은 계속 입으로 들어오고 이러다 죽는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살아 온 삶이 필름처럼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정말 한 순간에 모든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특별히 후회스러운 일들이 다 기억났습니다. 친구가 저를 구해주기는 했지만 그 때부터 저는 물을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물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광고에서 아기들이 물속에서 눈을 뜨고 헤엄쳐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냥 놓아두면 그 아이들은 익사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물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9개월 넘게 엄마 배의 양수에서 살았으니 오히려 물이 더 편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도 조금만 크면 그 물이 자신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이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이 언제일까요? 바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이후였습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두려워하며 숨게 되었습니다. 죄는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손을 댈 때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것 자체가 죄의 시작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하느님의 시선을 무시하고 죄를 짓게 되었을까요? 바로 눈이 밝아져 하느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교만은 자신만 생각하게 만들고 하느님을 잊게 합니다.
오늘 제자들도 심한 풍랑이 몰아치자 막 가라앉을 것 같은 배 위에서 심하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지라 아직도 주님이 함께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찾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그들이 찾아주고 불러주기 전까지는 그저 잠자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들이 잊어버렸으니 그들이 다시 기억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이 오자 그들은 교만을 버립니다. 평생 어부생활을 해 왔던 그들이지만 죽음의 공포가 눈앞에까지 와서야 자존심을 버리고 결국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호수를 평온하게 하시고 그들의 약한 믿음을 꾸짖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자신을 버리는 겸손이 바탕이 되어야합니다. 교만으로 죄를 짓고 두려움이 온 것처럼 그 반대로 겸손으로 다시 그분이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지니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강론이나 강의를 할 때 저는 주님께서 함께 해 달라고 기도하고 제 영광이 아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내 자신을 위해 하지 않으니 떨리거나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내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긴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머무는 것이 기도입니다. 겸손과 믿음의 증표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주무시고 계신 그분을 깨워 대화하고 도움을 청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어떤 두려움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도가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지면 살아가면서 단 한 순간도 그분의 존재를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기들이 물에 빠져죽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부모가 함께 있어주며 보호해 줍니다. 그러나 조금 컸다고 혼자 물장난을 하다가 익사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다는 그 믿음, 그래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정말 두려워 할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부모가 무슨 일을 저지를 줄 모르는 아기를 항상 주위에서 돌보는 것처럼 주님께서 항상 옆에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지가 아닐까요?
*+ 전삼용 (요셉) 신부 +*
연중 3주 토요일-믿음으로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믿음으로써, 그는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써, 사라는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지금 저희 수도회는 인사이동의 때입니다.
이번 인사회의가 끝난 다음 형제들 간에 오가는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습니다.
다름 아닌 실시간 인터넷 검색이라는 말입니다.
요즘은 공문이 서면으로 나오기 전 인터넷으로 먼저 발표되는데 인사이동 내용이 발표되었는지 어떤 형제는 매 시간, 또 어떤 형제는 30분마다 실시간 검색을 하였다 하며 농담을 한 것입니다.
새로운 풍속도이긴 하지만 앞으로 적어도 3년 어디로 가게 될지, 누구와 살게 될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몇몇 형제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입니다. 사실은 애초부터 관구장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제가 관구장일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 형제들에게 의견을 물으면 이 형제들은 알아서 보내야 할 곳에 보내라고 합니다. 대단한 순종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대단한 믿음입니다. 대단한 믿음에 대단한 순종인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이 없다면 대단한 순종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관구장이 가장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 보낼 것이라고, 관구장이 자기에게 가장 좋은 곳으로 보낼 것이라고, 관구장이 공동선을 위해 가장 좋은 곳으로 보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것이고 그렇게 믿기에 어찌하든 상관없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제가 그렇게 믿을만한 사람이기에 믿는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지요. 저는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잘못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고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인간적인 선입관이나 인간적인 감정으로 그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저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저의 뒤에 있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돌멩이를 가지고도 빵을 만드실 수 있으시고 악을 가지고도 선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가라고 하는 대로 떠납니다.
이런 믿음으로 같이 살라고 하는 사람과 같이 삽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라는 일을 합니다.
지금은 왜 그곳으로 가라고 하시는지, 왜 그 사람과 살라고 하시는지, 왜 그 일을 하라고 하시는지 알지 못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요셉과 마리아처럼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말씀하시는 대로 떠나고 믿음으로 말씀하시는 대로 봉헌합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인간 돈보스코>
돈보스코는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이 아니었습니다. 돈보스코 역시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면서, 그 인간적인 결핍들과 매일 투쟁하면서 성덕에로 한발자국씩 올라간 사람이 돈보스코였습니다.
어린 시절 돈보스코는 원만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다방면에 걸친 자질이나 능력이 골고루 뛰어났지만, 천성적으로 인내나 온순,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 맘마 말가리타가 낳은 두 아들, 요셉과 요한(돈보스코) 가운데 요셉이 요한보다 더 온순하고 다정다감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요셉은 손님이 찾아오면 아주 반갑게 맞이했고, 기꺼이 담소했으며, 붙임성이 있어 즉시 친해져서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셉과 반대로 요한은 좀 쌀쌀하고 말수가 적으며 거만한 편이었습니다. 요한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나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쉽게 말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귀엽다고 어른들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싫어했고,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신중하게 분위기나 주변을 살피는 스타일의 소년이었습니다.
돈보스코가 세상을 떠난 후 시작된 시성절차에서 돈보스코를 가까이서 겪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돈보스코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자신을 반대하는 의견을 수용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갈리에로 추기경)."
"돈보스코는 참으로 막무가내였다. 매사를 자기 방식대로 처리했다. 그렇지만 돈보스코가 계획한 일은 그냥 놔두어야 한다. 별로 의미 없어 보이는 계획도 돈보스코가 밀고 나가면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다(가파소 신부)."
여러 가지 증언들을 토대로 할 때 돈보스코는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불굴의 노력이 필요로 했던 사람입니다. 과격한 자신의 성격을 조절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자기 억제가 필요했습니다.
돈보스코는 자신이 계획했던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이란 목표에 접근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조절, 자기 포기, 자기 이탈의 노력을 거듭했습니다.
이렇게 돈보스코의 생애는 완덕에로 향한 진지하고도 열렬한 구도자로서의 생애였습니다.
돈보스코의 완덕에로의 여정에서 특별히 돋보이는 점들은 "절도", "점진성", "자기 이탈의 노력" 등입니다.
돈보스코의 생애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성인(聖人)은 절대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끝도 없는 자기반성, 자기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 끝에, 그리고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힘입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돈보스코가 걸어갔던 길, 힘겨운 여행길, 자신과의 길고도 지루한 싸움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무수한 노력 끝에 완벽한 자기 이탈과 자기 통제에 도달한 돈보스코의 모습을 전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1875년 1월의 일이었다. 돈보스코께서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형제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들고 있었다. 그때 후계자 루아 신부가 가까이 와서 당장 4만 리라를 지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막대한 금액이었다. 당시 돈보스코에게는 돈이 단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이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당시 바깥 날씨가 꽤 쌀쌀한 1월이었는데, 식당은 난방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기에 실내 온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조마조마하던 루아 신부와 회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돈보스코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돈보스코는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하느라 얼굴이 다 빨갛게 달아올랐다. 묵묵히 그 순간을 견뎌내던 돈보스코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 접시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내지도, 일어서지도 않고 아무 말도 없이 하던 식사를 마저 마쳤다."
돈보스코는 자신의 불같은 성격을 불굴의 노력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스려나갔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온유와 겸손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 꼭 닮은 모습으로 자신을 변모되었습니다.
성인(聖人)이 우리와 다른 한 가지 특징은 부단히 어제의 나 자신을 떠나 끝없이 변화를 시도한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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