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 마르코 1,21ㄴ-28

2009. 2. 1. 오전 7:54:16

글자
 
2월 1일 연중 제4주일 - 마르코 1,21ㄴ-28
 
 
 
오늘 복음에서는 더러운 영을 몰아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분께는 그러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자녀답게 살아간다면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능력이 함께합니다. 깨달음의 은총을 청하면서 미사를 봉헌합시다
예언자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당신의 뜻을 펼치실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는 추궁당할 것이다. 주님의 뜻이 아닌 가르침을 전하면 그 예언자 역시 죽임을 당할 것이다(제1독서). 종말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걱정 없이 하느님을 섬기도록 애써야 한다. 가족 관계가 주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제2독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힘과 권위가 있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더러운 영은 그분의 말씀에 곧바로 물러갔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눈과 귀로 확인했다. 마귀 들린 사람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복음).
 
<나는 예언자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18,15-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16 그것은 너희가 호렙에서 집회의 날에 주 너희 하느님께 청한 것이다. 그때에 너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다시는 저희가 주 저희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게 하시고, 이 큰 불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지 않게 해 주십시오.’
17 그러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한 말은 옳다. 18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일러 줄 것이다. 19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 20 또한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

시편 95(94),1-2.6-7ㄷ.7ㄹ-9(◎ 7ㄹ과 8ㄱ 참조)
◎ 오늘 너희는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 와서 주님께 환호하세. 우리 구원의 바위 앞에서 환성 올리세. 감사드리며 주님 앞 으로 나아가세. 노래하며 주님께 환성 올리세. ◎
○ 들어가 몸을 굽혀 경배드리세. 우리를 만드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주님은 우리 의 하느님, 우리는 주님 목장의 백성, 주님 손수 이끄시는 양 떼로세. ◎
○ 아, 오늘 너희가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므리바에서처럼, 광야에서, 마싸의 그날처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나를 떠보았도다.” ◎
 
<처녀는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7,32-35
형제 여러분, 32 나는 여러분이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혼인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33 그러나 혼인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34 그래서 그는 마음이 갈라집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와 처녀는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혼인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35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굴레를 씌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ㄴ-28
[카파르나움 마을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맒척?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연중 제4주일 -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제가 가장 힘이 솟고 팔팔할 때는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남자라면 이 때 누구와 싸워도 이길 것 같은 자신감이 생깁니다. 저도 싸움은 하지 않았지만 운동은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도 싸움 잘하는 아이들의 패거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저의 친구에게 이것저것 시키더니 결국엔 발로 등을 찼습니다. 저는 참을 수 없어서 그 아이 중간에 막아섰습니다. 그런데 그 때리던 아이는 놀랐는지 뒤로 자빠졌습니다. 창피해서 그랬는지 내가 자기를 때렸다고 하며 마구 흥분하였습니다. 저는 싸울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데 그 아이가 갑자기 제 얼굴을 때렸습니다. 그러나 마치 솜으로 맞은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회심의 일타를 때렸다고 생각했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 저를 보더니 움찔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교실 뒤로 가더니 마대자루를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말려서 결국 원치 않았던 싸움은 그렇게 끝나버렸습니다. 그 아이가 무기를 든 이유는 맨 손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으로 보면 이미 그 아이가 싸움에서 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아이들은 떼거리로 다니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있는 편을 택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국회에 계시는 어른들까지 서로 더 자기가 세다고 난리법석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높아지고자 하는 권력의 욕구는 정치판에서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는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 위에 서기 위해서는 상대방보다 더 뛰어난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뛰어난 것을 권력을 위해 사용할 때 그 모든 것들은 ‘폭력’이 됩니다. 전 세계 역사에서 권력을 쥐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는 없습니다. 힘이든 돈이든 지식이든 무엇을 이용해서라도 다른 사람 위에 있기를 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폭력이 됩니다.

 얼마 전엔 어떤 자매님이 딸이 결혼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딸을 실내화를 벗어서 때리다가 결국 눈이 붓고 충혈 되어 겁을 잔뜩 집어먹었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머니로서 자녀를 복종시키고 싶은데 그래서 결국 사용하는 것이 폭력인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께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이 자신들을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합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뭐라 해도 침묵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무시하는 이 침묵의 행위는 어쩌면 말대꾸 안 하는 것처럼 위장되어 있을지라도 결국 부모의 화를 더욱 돋우는 무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 높아지려고 할 때 서로간의 사랑이 깨지고 있음을 좀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남편의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아내가 사랑스러울 사람이 누가 있으며 대드는 자녀들이 사랑스러울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폭력으로 얻은 권력은 오히려 그 사람의 참다운 권위를 떨어뜨립니다. 아이들이 당장 때리는 부모의 말을 듣기는 하겠지만 커서 독립하면 그래서 더 이상 부모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되었을 때에도 그 권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다 성장한 자녀들이 부모의 그런 폭력성을 기억하며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들 것입니다. 로마의 위대한 시저도 온 세상을 정복했지만 결국 동료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세기의 정복자 나폴레옹도 쓸쓸한 유배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그런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허무한 권력을 위해서 세상엔 얼마나 많은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까? 단순한 예로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자주 서로 주먹질과 욕설을 퍼붓는 것을 보면 알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뿌리는 바로 이 권력욕, 성욕, 재물욕인데 그 중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권력욕이라합니다. 그래서 재벌들이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이고 이태리만 보아도 최고 거부인 사람이 오랜 시간 수상을 몇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본성을 거슬러 새로운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데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었지만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계셨다고 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신학박사들입니다. 예수님은 초등학교도 안 나왔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 영을 한 마디로 내쫓으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맞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헤로데도 로마의 황제도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에게 조정당할 수도 있는 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러운 영까지도 한 마디로 누를 수 있는 권위를 지니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이런 권위를 지닌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독립시키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줄 줄 알았는데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매 맞고 비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더러운 영까지도 제압하고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던 그 힘은 어디로 가고 실제로는 양처럼 온순하게 도살장에 끌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그분의 힘과 권위를 보게 됩니다. 죽었던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권위는 이 세상의 권위와는 전혀 다름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은 폭력으로 힘을 얻으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순종과 비폭력으로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참다운 권위와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 있는 권위들조차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누구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권위와 힘은 바로 성령님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도 계속 누가 서로 높은지에 대해 다투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세상의 권위에만 눈이 멀어 있는 제자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자리에 앉아 열 두 제자를 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낮아지는 사람만이 그 안에 성령님을 충만히 받아 참다운 권위를 지니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성모님의 경우 사도 중에 들지 않았어도 그 겸손하심으로 성령님으로 충만하셨고 그래서 참다운 권위로 따지자면 성모님이 사도들 위에 서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사도들의 모후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겸손해진 사도들도 급기야 성령강림으로 참다운 권위를 입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베드로는 그 날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에게 세례를 줍니다.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은 죽기를 원하지 않는 한 사람을 위해 대신 죽기로 자청합니다. 그냥 죽는 것도 아닌 굶어 죽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에도 가족이 있는 사람보다는 자신이 죽는 편이 낫다고 간수를 설득합니다. 세상 어떤 권력가도 죽음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죽음도 이기는 위대한 권력가들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이 세상 참다운 권위와 힘을 누리며 살아갑시다.

 

  연중 제 4주일-쿨한 사랑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쿨하다’는 말이 유행합니다.
영어의 “Cool"이라는 말에서 온 표현으로 관계나 감정의 뒤끝이 없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풀어서 얘기하면 연인 관계가 끝났음을 한 쪽이 선언했는데도 다른 한 쪽이 감정을 깨끗이 정리하지 못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거나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이으려한다면 그것은 쿨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쿨한 것은 관계나 감정에 있어서 지저분하지 않은 것이고 깨끗이 정리를 잘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더러운 영이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하고 이상한 소리를 지껄입니다.
주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함으로써 당신은 왜 쿨하지 못하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께서는 참으로 쿨하지 못하십니다.
우리가 싫다고 해도 주님은 사랑한다고 하시고 우리가 관계를 끊어도 주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런 사랑이 정말 지저분한 미련이요  끊지 못하는 애착에 불과한 것일까요?

사랑과 미련, 사랑과 애착이 같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차이가 하늘과 땅 차입니다. 사랑은 나의 필요가 아니라 그의 필요 때문에 떠날 수 없습니다. 애착은 그의 필요가 아니라 나의 필요 때문에 떠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그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습니다. 애착은 그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미련 때문에 떠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그가 나를 싫다고 하고 그래서 필요 없다고 해도 그의 속 필요를 알기에 떠날 수 없습니다.
애착은 그가 나를 싫다고 하고 그래서 필요 없다고 해도 지금까지 투자한 것이 아까워 떠날 수 없습니다.
마치 요즘 투자한 주식이 반 토막이 났는데도 투자한 것이 아깝고 다시 반등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포기치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애착하는 것은 더러운 영입니다.
더러운 영이란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 세상을 어슬렁거리고 이 세상 것을 애착하는 영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영이고 그러느라 하느님과 관계성을 부정하는 영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제 2독서는 이 세상 것에 애착하지 않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깨끗하고 거룩한 성도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천착하고 매달리어 이 세상에 대한 애착도 애착으로 인한 걱정도 초월하는 사랑을 살아갑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지금 이 자리에서 구원을>


   여러 가지 행사 참석이나 소풍 등으로 고속도로를 자주 타는 편입니다. 웬만해서는 수련자 형제들에게 핸들을 맡기지 않는데, 아주 가끔씩 부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드는 느낌이 한 가지 있지요. 제가 직접 운전을 할 때는 전혀 못 느끼던 것인데, 다른 누군가가 운전할 때면 그렇게 불안할 수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간섭을 하게 됩니다. 

  “브레이크, 브레이크! 자네는 왜 그렇게 차간 거리를 바짝 붙이나?”

  “조심, 조심, 옆에 차가 끼어 들어오잖아!” 

   “어이, 좀 천천히 못 달리겠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최고 120Km 절대 넘기지 말라고, 알았어?” 

   착한 형제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예! 알겠습니다!”만 연발합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제가 운전을 할 때였습니다. 행사 시간이 꽤 촉박했습니다. 규정 속도로 가다보면 빠듯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필 옆자리에 앉아있던 형제는 지난번 제가 단단히 야단치며 교육시켰던 바로 그 형제였습니다. 어쩔까 하다가, 특수상황이니만큼, 하면서 좀 밟기 시작했습니다. 130, 140, 150, 160...

 

   바로 그때 그 형제의 입이 점점 벌어지고, 눈이 점점 커지더니, 다급하게 하는 말, “신부님, 지금 160이예요. 지난번에 저더러는 절대 120넘기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아,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흠흠, 아, 그랬지? 그래도 지금 자네도 보다시피 시간이 많이 촉박하지 않은가? 뭐 이럴 땐 어쩔 수 없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 적나라한 실상을 후배에게 제대로 들키게 되어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권위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쌓아가야 하는 것이겠지요.

 

   권위의 배경에는 반드시 갖춰져야 할 기본적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언행일치입니다.

 

   요즘 대다수의 국민들,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아예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얼굴을 돌립니다. 투표장에도조차 가지도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언행일치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때 그들이 선거 전에 내세웠던 수많은 장밋빛 청사진들, 요란스러웠던 공약들에 귀가 솔깃할 때도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그렇게만 된다면, 하는 생각에 귀중한 한 표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거의 말잔치로만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본인 스스로 했던 약속들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보십시오. 말씀하신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 말씀이 실현됩니다. 악령 들린 사람 앞에서 내가 언제까지 악령을 고쳐주마, 하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한번 최선을 다해보겠다, 고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악령을 물리치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한 사람을 악령으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베푸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이처럼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권위의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필요 앞에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으시고 즉각적으로 움직이시는 역동성의 주님이십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210번 / 나의 생명 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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