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9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 마르코 4,21-25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19-25
19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20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21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사제가 계십니다.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23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약속해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24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25 어떤 이들이 습관적으로 그러듯이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합시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더욱더 그렇게 합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1-25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2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2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베풀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주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울한 중년이나 외로운 노년은 ‘베풀고 나누는 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운명은 언제나 자신의 것입니다. 아무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운명에 끌려가기’보다는 ‘운명을 밀고’ 가야 합니다. 삶의 본질은 기쁨이며, 인생의 근본은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천천히 베풀며 가도 인생은 늦지 않습니다.
누구도 등불을 침상 밑에 두지는 않습니다. 높은 곳에 두기 마련입니다.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르게 베풀어도 언젠가는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미래를 밝혀 줍니다. 시간이든 건강이든, 명예든 자식이든 ‘꼭 쥐고’ 있으면 오히려 떠나갑니다. 내어 놓고 나누어야 오히려 주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삶의 신비입니다.
연중 3주간 목요일 - 죄의 사회적 측면
어떤 피정에서 한 지도 신부님이 혼자 짓는 죄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괜찮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혼자 그 죄를 지었다고 과연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요? 제가 일반 대학 다닐 때 심심풀이로 관상을 좀 공부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관상 책을 보며 강의하는 교수님들의 얼굴을 표본 삼아 관상을 연습하였습니다. 그 때만 해도 얼굴 보며 몇 시간은 이야기 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내면인데 그것들이 얼굴에 드러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관상을 봐주었는데 보아주는 제가 신기하게도 80%정도는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관상은 하나의 통계입니다. 선천적으로 생긴 얼굴과 후천적으로 인상을 써서 생기는 얼굴의 조합이 사람의 성격과 운명을 만들어갑니다.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중에 더 중요한 것은 후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해진 운명이란 사실 없고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얼굴이 변해가는 사람도 있고 사실 제 얼굴도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변했습니다. 예를 들면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은 윗눈썹 사이에 골이 파입니다. 걱정을 하니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지고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나다보니 당연히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눈이 위로 치켜뜬 눈은 윗사람들에게 대항하는 상입니다. 실제로 자신도 모르게 윗사람들을 그렇게 노려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래로 내려 보는 눈은 아랫사람을 내리 누르는 상이겠지요.
물론 지금은 관상을 보지도 않고 다 잊어먹었습니다. 사람들 중에 혹시 특이한 관상이 있을 때는 하나씩 기억나기는 하지만 사람을 앉혀놓고 관상을 보아 주는 것은 군대 제대하고 끝냈습니다. 어느 순간에 관상에서 말하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이 현세에서 돈 많이 벌고 오래 사는 등의 매우 속세적인 기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관상에서의 복은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잘 사는 것이지 영혼이 구원되거나 하는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관상학으로 보면 그것만큼 안 좋은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난하고 고생하고 치욕의 죽음을 당한 것이 우리 믿음 안에서는 더 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위험성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관상을 조금 했어도 맞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관상대로 성격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쨌거나 관상 보는 것을 더 이상 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하나 믿는 것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얼굴엔 안에 있는 것들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십 이후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듯이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짓는 표정들이 얼굴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다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숨길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하느님은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경험 안에서도 아이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뻔한 거짓말’을 할 때 쉽게 알아차렸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거짓말을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사람들은 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 죄를 짓고 그것이 감추어질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의 말과 행동, 표정 등을 통해 밖으로 나타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이 죄의 사회성이고 온전히 개인적인 죄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빛은 대낮이고 대낮에 숨길 수 있는 것들은 없습니다. 죄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짓는 것입니다. 적어도 완전히 죄를 물리칠 수는 없어도 자신에게 솔직하고 또 이웃을 위해서라도 죄를 줄여나가도록 합시다.
+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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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거리 비추는 작은 등불처럼>
아이들과 목청 터져라 즐겨 부르는 18번 생활성가가 한 곡 있습니다. 하도 많이 부르다보니 기억력이 나쁜 저까지도 그 가사를 다 외울 정도입니다.
김태진 신부님의 곡 ‘하늘의 태양은 못 되더라도’입니다. 가사 말이 참으로 예쁩니다.
“어두운 거리 비추는 작은 등불처럼
내 주위의 사람에게 빛을 줄 수 있다면
나의 한 평생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나의 사랑으로 빛을 줄 수 있다면
하늘에 태양은 못 되도 밤하늘 달은 못 되도
주위를 환하게 비춰주는 작은 등불되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에 관련된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등불, 요즘 우리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추억속의 물건이 되었지만, 등불 생각만 해도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따뜻했던 지난 시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다시금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힘을 주는 물건입니다.
오늘 이 시대, 어둔 거리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된다는 것,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제가 만난 많은 아이들, 환한 대낮의 밝은 거리보다는 약간은 음침하고, 약간은 퀴퀴한 어둔 거리를 선호하더군요. 당당하게 대로를 활보하기보다는 뒷골목으로 숨어듭니다. 그래서 결국 스스로를 어둠의 세계로 몰고 갑니다. 자신을 어둠의 세력에 속박시킵니다.
영화를 보여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미 넘치는 가족영화나 감동적이거나 서정적인 영화를 보여주면 다들 괴로워합니다. 폭력이 난무하고, 적어도 100명 이상 죽어나가는 영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영화는 이게 ‘웬 떡이냐’며 화면 앞으로 바짝 다가갑니다.
이런 아이들을 가끔씩 정돈되고, 포근하고, 밝은 분위기로 끌고 나오면 엄청 어색해합니다.
이런 상황은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밝고, 건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보다는 어둡고, 폭력적이고,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분위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이런 분위기 앞에서 작은 등불로 선다는 것,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아 보여 무의미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상식이 무너지는 상황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걸고, ‘그건 아닙니다. 이렇게 합시다.’ 라고 말했을 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너나 잘하세요!”
등불로 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모진 박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손가락질도 견뎌내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꿋꿋이 나는 주님께서 제시한 이길, 내가 기꺼이 선택한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간다는 의연함이 필요합니다.
어둔 거리의 등불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점점 무너져만 가는 상식과 도리의 선을 다시금 회복하자는 눈물어린 예언자적 호소입니다.
극단적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에서 탈피하자는, 그래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는 외로운 부르짖음입니다.
등불이 어둔 거리에서 지속적으로 활활 타오르기 위해서는 넉넉한 기름이 가장 기본입니다.
넉넉한 기름이란 바로 활발한 성령의 현존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흘러넘치는 자비입니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연민의 마음입니다.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 잡아보겠다는 우리의 적극적인 의지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하늘의 태양은 못 되더라도/제주교구 신학생회와 보좌신부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