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 6,1-6

2009. 2. 4. 오전 6:24:07

글자
 
 

2월 4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 마르코 6,1-6

 
 
신앙인은 어떤 시련이든 견디어 내야 한다. 주님께서는 믿는 이를 단련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련은 은총이다. 시련을 통해 하느님의 손길과 평화를 체험한다면 분명 축복이 된다. 시련 속에서도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히 살도록 힘써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복음을 전하신다.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그분을 대한다. 하느님의 모습은 보지 않고 인간적 모습만 보려 한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기적을 많이 베풀지 않으셨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복음).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2,4-7.11-15
형제 여러분,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14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또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하나라도 솟아나 혼란을 일으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묵상>>
 
예수님께서도 무시당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언자는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남기십니다. 섭섭함이 배인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무시당했던 체험이 많습니다. 가족이 그렇게 했고, 이웃이 그렇게 했고,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별 뜻 없이 말하고 행동했지만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된 기억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깎아내립니다. 편견을 갖고 대합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평소의 습관일 뿐입니다. 좋은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습관입니다.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지 못하는’ 잘못된 습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많이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기적까지도 오해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허물을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허물이 있는’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 때문에 신앙생활이 실망스러워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보면서 믿음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지내면 쉽게 허물이 보입니다. 뛰어난 사람도 틈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주는 상처에 너무 예민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가족에게 상처 주며 사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봐야 합니다. 사랑하면 가끔은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연중 4주간 수요일 - 주님의 빛 안에서 사고하라

 법률학도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역사연구에 몰두하다가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진정한 위인이란 세상의 악한 자들을 넘어서고 이용하여 세상의 선익을 위해서 더 큰 일을 하는 사람이다.”  사실 우리나라 홍길동도 이와 같은 생각으로 가난한 이들을 등쳐먹은 돈들을 다시 부자들로부터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던 의인이었고 어쩌면 가난한 이들의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도 결국 욕심 많은 늙은이가 고리대금으로 모든 돈이 머리 좋고 가난한 학도의 학비로 쓰일 수 있다면 인류를 위해서는 훨씬 유익할 것이라는 두 번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한 명의 악인이 사라지는 반면 세상을 위해 일할 또 한 명의 일꾼이 탄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위해서는 악인이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공동선을 위해서는 희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세 번째 결론이 이릅니다.  이윽고 청년은 면밀하게 살인 계획을 세우고 늙은 고리대금업자와 그의 여동생을 죽이고 돈을 손에 넣게 됩니다. 완전범죄였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의 이러한 철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간의 마음 안에는 양심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머리로 ‘나는 올바르고 정당한 일을 했어!’라고 되뇌었지만 마음속에선 계속 ‘살인자! 살인자! ... ’라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양심의 소리에 무릎을 꿇고 자수를 하게 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게 됩니다.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내용입니다.

 이성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믿음을 갖기 위해서도 반드시 이성의 작용이 필요합니다. 정신적 작용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무엇을 믿어야하는지조차 알 수 없기에 믿음도 가질 수 없습니다. 또 성경이나 묵상을 통해서 믿음을 더 증가시켜야 하는데 이것도 이성의 작용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빛을 떠난 이성의 작용은 오류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더라도 성령의 빛 안에서 학문을 하지 않으면 결국 공부를 해서 믿음을 잃는 일도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대 낮에도 촛불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그 영문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너희 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내 눈에는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서양철학의 시초였던 그리스에서도 이성적 사고만 하였지 빛 안에서 사고하지 않던 당시대를 풍자한 것입니다. 위대한 철학자란 위대한 사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빛’ 안에서 사고하는 사람입니다. 그도 결국 영혼이 있음을 깨닫고 악법조차도 어기지 않기 위해서 독극물을 마시고 죽게 됩니다. 그의 제자 플라톤도 이 지상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참다운 하늘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참다운 세계가 이미 세상에 내려와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며 신은 한 분이라는 결론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다신교의 그리스 사상에선 혁신적은 깨달음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 안에 있는 양심의 빛 안에서 사고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그리스 신들을 숭배하는 분위기에서 결국 신은 유일하게 한 분이 계실 수 있고 그래서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훌륭한 설교를 하십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놀라면서도 ‘저런 지혜는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 그러나 그는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 왜 남의 동네에서만 기적을 행하는가? ... 그가 마귀 들리거나 미친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찾아다닌 일이 성경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결국 어떤 예언자도 자신의 집과 동네에서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며 그 곳에선 어떠한 기적도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머리를 쓰되 마음의 빛에 비추어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적인 머리로 사고를 하였기에 그들이 가졌던 선입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사람의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안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이유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많은 부녀자들을 살해한 사람도 아내가 죽고 나서 여자들이 싫었다는 둥, 종교도 자신의 살인 충동을 어찌하지 못했다는 둥, 많은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테러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빈 라덴도 말만 들어보면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입니다.  혹시 우리들은 죄를 지을 때, 성당을 안 나오게 될 때, 기도하지 않을 때, 혹은 다른 사람을 돕지 않는 이유 등을 머리로만 정당화시키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봅시다.

 

 연중 4주 수요일-사랑하니까

제가 처음 수도원에 들어왔을 때 호랑이 수사님이 계셨습니다.
수도원 살림을 사셨는데 대부분의 형제들은  그 수사님이 너무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를 못했습니다. 저만 가까이 갈 수 있었는데 그래서 수사님은 시장을 가실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고 탁구나 테니스 같은 운동을 할 때도 저와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수사님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은 수사님께서 저를 야단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도 수사님께 야단을 많이 맞았습니다. 특히 담배 때문에 야단을 맞았습니다. 처음 수도원에 들어가니 선교사 선배들은 담배를 권하고 예의 때문에 어른들 앞에서 담배를 피지 않으려 하니까 어른들 앞에서 담배를 주고 피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그때 수사님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담배를 핀다고 꾸짖으셨습니다.
누구는 담배를 피라고 주고  누구는 담배를 핀다고 뭐라 하고  헛갈렸지만 아무튼 야단치는 수사님을  저는 고깝게 생각지도, 두려워하지도,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윈 저는 아버지가 그리웠습니다.
동무 집에 갔을 때 동무가 ‘아버지!’하고 부르고  아버지하고 의논을 하는 것을 보면 부러웠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저를 꾸짖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 스스로 아비 없는 후레자식 소리 듣지 않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제 아버지뻘인 그 수사님께서 저에게 야단을 치실 때  저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던 것입니다.
아버지!   이후 제가 양성을 맡았을 때 저는 매우 엄한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 형제들에게 한 것은 지금도 전설처럼 얘기되곤 하는데  그로 인해 상처 받은 형제들도 많이 있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저는 그때 형제들을 진짜 사랑했습니다.
진짜 사랑했기에 그렇게 심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무엇 하려 합니까?
그저 듣기 좋은 말만 하거나  잘되거나 잘못 되거나 무관심해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사랑만큼 줄다리기를 할 힘이 있고  사랑만큼 미움을 견딜 힘이 있기에   남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그 힘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는 얘기합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이 말을 뒤집으면  “아들을 훈육하지 않는 아비가 어디 있습니까?”가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사랑하는 아비는 훈육을 할 것이고  아비의 사랑을 믿는 아들은 그 훈육을 받을 때  하찮게 여기지 않을 것이고  낙심하지 않을 것이고  사랑으로 여기며 기꺼이 받을 것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형제 (작은 형제회)-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변신>


   오늘 복음에서 마르코 복음 사가는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마을을 방문하면서 겪은 일화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달라진 예수님의 모습에 고향마을 사람들은 우선 깜짝 놀랍니다. 제자들을 거느린 예수님의 모습, 회당에서 가르치는 모습, 병자들을 치유시키고 기적을 행하는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향마을 사람들은 완전히 새롭게 변신한 예수님의 금의환향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의혹에 찬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던 고향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은 하루 온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한마디 말도 없이 목공소에서 못질과 대패질만 하던 바로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으로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이건 뭔가 속임수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고착화된 시각으로 인해,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 메시아를 메시아로 바라보지 못한 고향마을 사람들의 아둔한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을 찾아가면서 아마도 이런 생각이 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고향 마을 사람들, 30여년이란 긴 세월을 같은 울타리 안에서 살면서 동고동락했던 내 고향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리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리라."

   그러나 도착과 동시에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은 철저한 냉대와 거절, 비아냥거림, 불신 등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주시길 기원합니다. 누가 우리를 이 죽음의 계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구원의 주님이신지 알게 하는 혜안을 주시길 빕니다. 누가 우리를 악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사탄의 두목인지를 식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님, 오늘 하루 인간적인 눈을 감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괴롭다, 괴롭다" 하며 보낸 지난 세월은 지옥 같은 고통의 세월이 아니라 주님께서 늘 뒤에서 지켜주셨던 은총의 세월이었음을 인정케 하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루하루 모든 순간들은 그저 허송세월하면서 흘려보내야할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금 쪽 같이 소중한 구원의 시간임을 알게 하는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가장 가까이 지내기에 늘 티격태격하는 이웃들은 나를 성장케 하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가장 감사해야할 존재이자 또 다른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420번 /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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