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사제직 )-루카 2장 22-40절

2009. 2. 2. 오전 6:19:31

글자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루카 2장 22-40절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산모는 아이를 낳은 지 40일이 지난 뒤 성전에 나아가 정결례를 치러야 했다(레위 12,4-8 참조). 마리아께서도 이 율법을 지키셨다. ‘주님 봉헌 축일’은 성탄 뒤 40일째 되는 날 성모님께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 교회는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복한다. 이는 중세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미사 전례 전에 ‘초 축복’과 ‘봉헌 행렬’을 한다.
한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주님 봉헌 축일’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전 세계 교회가 이를 기념하도록 하였다. 모든 신자, 특히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크나큰 은총인 봉헌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성소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자 한 것이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또는 히브 2,14-18>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시편 24(23),7.8.9.10(◎ 10ㄴ)
◎ 만군의 주님, 주님께서 영광의 임금이시로다.
○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 ◎
○ 누가 영광의 임금이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 싸움에 용맹하신 주님이시로다. ◎
○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 ◎
○ 누가 영광의 임금이신가? 만군의 주님, 주님께서 영광의 임금이시로다. ◎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또는 2,22-32>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마산교구의 차기병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나이 서른에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사제가 된 지 일 년 만이었습니다. 1988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에 교통사고를 당했던 것입니다. 어느새 2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성직자 묘지에 가면 그의 무덤에는 늘 꽃이 놓여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꽃을 놓고 가는 분이 있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슬픔’을 안고 사는 분일 겁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면 누구든 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건 이론이고, 가족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서른 살의 죽음은 사제가 아니더라도 가슴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그의 무덤 앞에 서면 ‘우리 대신 죽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날은 ‘주님 봉헌 축일’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성전에서 만난 시메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의 가슴에 칼을 꽂는 예언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께서는 조용히 받아들이십니다. 이미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봉헌은 바치는 행위입니다. ‘바친다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프고 쓰라린 것’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늘만큼은 내가 바칠 ‘나의 봉헌’을 돌아봐야 합니다.
 
    
 
 주님의 봉헌 축일-세상을 위해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
 
 
오늘은 주님께서 봉헌되셨음을 기념하며 아울러 주님을 본받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말하자면 저희들을 위한 날이기도 합니다.
수도자는 주님을 본받아 봉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정확한 표현은 축성생활이라고 함이 맞을 것입니다.
봉헌생활이나 축성생활이나  라틴말 Vita Consecrata(영어는 consecrated life)를 번역한 말인데 이 Consecrata라는 말에는  祝聖,  聖別,  奉獻이라는 뜻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봉헌생활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만 봉헌생활이 봉헌하는 나를 주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축성생활은 축성해주시는 하느님을 주체적으로 표현한 말이기에
우리의 성소를 더 잘 얘기해준다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성소는  내가 나를 바치겠다고 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축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살고 싶다고 이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아 세우심으로 살게 된 삶입니다.
이 말은 이 삶의 Initiative가 주님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많은 사람 가운데 나를 뽑으셨다는 면에서 이 삶이 뽑힌 자의 매우 영광스러운 삶임을 얘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름 부음과 축성으로 인한 성별의 뜻입니다.  성당이 축성으로 다른 건물로부터 성별되는 것과 같이  다윗이 기름부음으로 형제들로부터 갈라세워짐과 같이
맏아들과 맏배와 맏물이 축복으로 다른 것들과 다르듯이 축성된 사람들은 축성으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고 뽑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수도자들이 축성되고 성별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종 잘못된 선민의식에 빠지듯이 특권의식에 머물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롯한 제물로 하느님께 바쳐지기 위함입니다.
제사 때 쓰는 제기들이 오직 제사 때만 쓰이고 축성된 성당이 오직 하느님을 위해서만 쓰여야 하고 성별된 제물이 오롯이 하느님을 바쳐져야만 하듯이 축성되고 성별된 수도자들은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닌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을 위해서만 쓰여야 하고
하느님께만 바쳐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축성으로 성별되고 봉헌된 수도자들은  하느님께 봉헌되신 주님께서 세상을 위해 봉헌되고 그래서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듯이 세상을 위해 봉헌되고  세상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생활의 의미도 있고 어려움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다르면서도 같아져야 하고  우리는 사람들을 떠나면서도 찾아가야 하고  우리는 하느님께 올라가면서도 사람에게로 가야하고  우리는 주님께 봉헌되면서 세상을 위해 봉헌되어야 합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
 
    
 

주님 봉헌 축일 - 여성 사제직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 특별히 봉헌생활을 하시는 분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봉헌생활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봉헌생활을 하여도 여자는 수녀님밖에 될 수 없고 사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개신교와 성공회 등 여성 목사님과 여성 사제를 인정하는 타 종교에 비해 현대 여성 인권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는 가톨릭교회는 시대에 매우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한 가톨릭 여성 신자가 고민한 내용을 읽어보면 공감되는 내용도 많습니다.  “여성신자로 가톨릭교회 다니기...  저는 서울에서 성당을 다니고 있는 사람이고 어려서부터 신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신부가 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약자, 소외된 자를 위한 종교에서도 여성은 역시 소외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미사 후에 신부님이 진행하신 미사를 정리하고 치우는 수녀님들을 보면 저는 착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일에 충실하고 만족하고 계신 수녀님들께는 죄송합니다)...

왜 여자는 교황이 될 수 없고 신부가 될 수 없을까요.  열두 제자들이 모두 남자였기 때문에?...  사제로 남성을 택한 것은 남성 중심적이고 여행의 위험이 많았던 그 시대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적합한 성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현대 사제의 임무 중 여성이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일은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이 남자였기 때문에 사제도 남자여야 한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을 그저 단순한 인간으로밖에 보지 않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신이 아니라 남자였다면 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한 성의 특징과 행동양식만을 가진 신이라면 저는 그 신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러 유학을 갑니다. 성서 내에서 타당하지 않은 여성의 묘사가 그릇됨을 밝혀내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닌 당시의 시대상황 때문임을 밝히는데 노력할 것입니다  ...” (부산 교구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글이고 전례학 동호회 (LITURGIA.ORG)에서 퍼온 글입니다.)

 이 분이 지금 공부를 하고 계신지 모르겠으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결국엔 가톨릭에선 여성 사제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봉헌의 삶이란 꼭 여자가 사제가 되어야하고 남자가 수녀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넘어섭니다. 성모님이 예수님이 되려고 하고 예수님이 성모님이 되려고 했다면 지금의 동성연애자들보다 더 큰 혼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위의 자매님은 예수님께서 남자로 태어나신 것에 크게 의미를 두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기 위해 선택하신 성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는 것이 그저 두 성을 놓고 제비 뽑아서 결정한 사항이었을까요?  그 안엔 신비로운 구원 계획이 들어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실 메시아는 남성으로밖에 태어나실 수 없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시대적으로 남성이 여행하기 유리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는데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 (창세 1,27)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셨는데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하느님도 그 안에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부는 남자로서 성자는 여자로서 성령은 둘의 사랑으로써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결합하여 한 몸이 되는 신비가 이미 하느님의 삼위일체 안에 있는 것이고 그 모습대로 사람도 사랑으로 하나 되는 신비를 살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의 원천이고 주인이셨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아들이 나오고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적입니다. 삼위일체 안에도 질서와 구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대등해지려는 시도로 두 분이 같은 분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들이 죽기까지 아버지께 낮아지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당신의 모든 것, 즉 성령님을 아들에게 주셔서 아들을 동등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인간도 신랑인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교회는 아담인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하와입니다. 둘은 한 몸을 이루고 질서로 구별한다면 그리스도가 남성이고 교회가 여성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주도권을 가지시고 인간은 예수님께 능동적으로 수동적이 됨으로써 참다운 하와가 됩니다. 인간이 예수님께 순종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비로운 구원계획 안에서 신랑이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신랑으로 오셨기 때문에 남성이고 교회는 여성입니다. 요한 묵시록에 보면 마지막 때에 신랑이신 어린양과 예쁘게 단장한 신부인 천상예루살렘, 즉 교회의 혼인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당신의 직무를 계속 이어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사제는 미사 때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하며 그리스도를 대신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그분의 몸이다, 이것은 그분의 피다.”하지 않고 곧 ‘나의 몸이요 나의 피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해 죄도 용서해줍니다. 사죄경을 할 때 “그분께서 용서해주십니다.”하지 않고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라고 하며 그리스도를 대신해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랑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신랑으로서 여자일 수 없으셨던 것처럼 사제들도 신랑의 대리자들이기 때문에 여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녀님들은 무엇일까요? 수녀님들은 결혼하지 않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와의 혼인이 있다는 상징이고 증거자들입니다. 어떤 누구도 혼인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분들은 성모님의 대리자들입니다. 성모님은 남성인 하느님 앞에 구체적인 여성이 되어 하느님과 혼인하여 한 몸을 이루신 완전한 하와이십니다. 하와가 사제가 되어 미사를 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미사를 한다고 높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남자가 아이를 낳겠다고 하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성모님은 미사 한 대도 못 드렸지만 사도들의 어머니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특별히 그리스도와 사도들보다 더 온전히 한 몸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의 정도는 그리스도와 얼마만큼 온전하게 일치하느냐에 있지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당 내에서도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제들은 성모님을 대리하는 수녀님들을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이 사랑해주어야 하고 삼위일체 하느님이 그러신 것처럼, 또 하느님과 성모님이 그러신 것처럼 사랑으로 한 몸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 봉헌 축일입니다. 참다운 봉헌은 참다운 하와가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참다운 하와가 되어 신랑이신 아버지와 한 몸을 이루신 것처럼, 또 성모님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완전한 하와가 되어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루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하와가 되는 것이 바로 봉헌입니다. 왜냐하면 봉헌이란 말엔 자기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주 강하게 들어있는데 그것이 자신을 버린 완전한 믿음과 순종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봉헌의 의미가 그저 독신으로만 사는 것, 사제 수녀 복장만 입는 것을 훨씬 넘어선 혼인의 신비를 사는 것임을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 전삼용 (요셉) 신부*

 
    

<늘 초심자의 마음으로>


   수도생활에 입문할 무렵, 돌아보니 참으로 순수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기세였습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강물처럼 흘렀네요. 쌓아온 수도생활의 연륜에 비례해서 삶이 한 차원 성숙되고 쇄신되어야 마땅한데, 전혀 그렇지 못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봉헌생활을 꿈꾸기에, 다시 한번 예수님을 제 삶의 중심으로 옮겨오고 싶은 마음에, 다시 한 번 그분을 향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에, 다시 한 번 “그분은 내 삶의 전부입니다”라고 떳떳하게 고백하고 싶은 마음에, 그간 무엇이 문제였던지 곰곰이 지난날을 한번 되돌아보았습니다.

 

   문제의 해답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첫 마음의 퇴색이었습니다. 늘 초심자의 마음으로 살았어야 했는데...세월의 흐름에 따라 입회 때의 순수함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무 필요도 없는 독선과 아집만이 때처럼 덕지덕지 남아있습니다. 수도원에서 먹은 밥 그릇  수와 성덕과는 절대로 정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진작 알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모진 독설을 밥 먹듯이 듣곤 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 정말 그들처럼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자주 걱정했었는데, 어느덧 그들의 모습에 꽤나 근접해있는 저 자신의 모습을 슬픈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런 제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한 노인을 제 삶의 또 다른 이정표로, 또 다른 새 출발의 희망으로 세워주시더군요. 예루살렘의 시메온.

 

   그는 기다림의 달인이었습니다. 기다리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습니다. 다들 메시아를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고 말았는데, 다들 ‘내 나이에, 내 주제에 메시아는 무슨!’하고 절망의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만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끝내 ‘지복직관’이라는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아쉬움 속에 이 세상을 하직했는데, 그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입니다. 시메온은 정말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시메온이었기에 하느님께서 그의 신앙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십니다. 성령께서 시메온의 앞길을 밝혀주셨습니다. 때가 무르익자 성령께서 시메온을 성전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모의 팔에 안겨 성전 안으로 들어오시는 메시아 하느님을 뵙는 일생일대의 행운을 잡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과분하게도 하느님을 자신의 두 팔에 안아보는 기쁨을 누립니다.

 

   세메온처럼 끝까지 참는 사람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상급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꿈과도 같은 기적도 일어납니다. 죽어도 떨칠 수 없을 것 같던 악습도 사라집니다.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행동도 변화됩니다. 행동양식도 달라집니다. 사고방식마저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위주로 변화됩니다.

 

   제대로 된 봉헌생활을 꿈꾸는 분들은 시메온처럼 끝까지 기다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열렬한 기다림을 바탕으로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인내 끝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분 사랑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사람으로서 가장 큰 축복을 누린 시메온을 바라보면서 저 역시 또 다른 희망을 가져봅니다.

    우리 모두는 시메온처럼 하느님을 제대로 한번 만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지루하고, 고되고, 팍팍하다 할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하느님을 만날 은총의 순간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 지지부진한 신앙생활을 반전시킬 호기가 반드시 찾아오리라고 확신합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망가지고 깨진 모습으로 살아도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다시금 새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214번 / 주께드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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