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기적]-마르코 8,11-13

2009. 2. 16. 오전 7:44:32

글자
 [가장 큰 기적]-마르코 8,11-13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에 데리고 나가서 죽였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4,1-15.25
1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 2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12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13 카인이 주님께 아뢰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14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하늘의 기적을 보여 주면 승복하겠다고 합니다. 조건을 다는 것이지요. 믿음에 조건을 다는 것은 성숙한 자세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 줘야만’ 믿겠다는 것은 어린이의 신앙입니다. 답답한 것은 우리 인간이지 주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들 앞에서 답답한 것이 없으셨습니다.
‘하도 그러니까 참석하겠다.’ ‘하도 저렇게 말하니까 들어 주겠다.’ 이것은 끌려가는 신앙생활입니다. 주일 미사를 ‘참석해 준다.’는 자세로 임한다면 어떻게 은총이 함께할는지요? 강론 말씀을 ‘들어 준다.’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어떻게 깨달음이 찾아올는지요?
‘자꾸만 읽으라니까’ 읽는 성경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읽다 보면 그저 평범한 말이 어느 날 ‘칼날’이 되고, ‘따듯함’이 됩니다. 은총은 늘 그렇게 갑자기 다가옵니다. 그러니 앞에서 끌고 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뒤에서 밀고 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들은 가끔씩 ‘이러이러한’ 신부님 때문에 성당에 못 다니겠다고 합니다. 신부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저러한’ 교우님들 때문에 사제 생활을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돌아보면 모두가 조건을 다는 일이 아닐는지요? 믿음의 길 역시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닙니다.
 
 
                                                 오늘의 복음 묵상 - 주님의 탄식
 
 
오늘 복음에 나오는 대화가 있기 전에 사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들은 성경에 예언된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다시 하늘에서 오는 징표를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표징을 주시기를 거절하십니다. 다만 깊은 탄식을 하실 뿐 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많은 기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많은 신자분들이 성지순례 프로그램을 통하여 오늘날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곳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사실 저도 형편이 된다면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첫번째로 가고 싶은 곳은 오늘날 기적이 일어나는 곳은 아닙니다.)
 
저도 징표가 필요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세례성사를 받은 이 후에도 남들에게 일어나는 기적이 아니라 저를 향한 하느님의 실존을 직접 경험하고 싶어 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니, 지금도 저는 제가 실존하시는 하느님과 자녀로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 생각해 보곤 합니다.
제가 배운 교리지식 때문에 하느님에 대하여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제가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하느님을 알아 차리게 되길 원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제게 주님의 자비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저의 마음이 따듯해지고 주님께서 주신 평화를 느꼈던 것 입니다. 기적이라면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믿음에 대하여 - 관념적인 것은 아닌지 - 되풀이 회의하게 되는 것은 제가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보다 세상 욕망에 더 끌리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 해 봅니다.
 
어쩌면 지금 주님께서는 저로 인하여 깊은 탄식을 하고 계실지도 모르는 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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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올 주님, 제가 세상 가운데 살면서 속세의 욕망대로 살게 하지 마시고, 일상의 행위로써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게 하소서.
 
                                                박수신(susini)
 
 

연중 6주간 월요일 - 증거를 대라

이태리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의 하나는 세계의 기적들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기적이 일어난 각 지역에 가서 그 사건들을 면밀히 검사하여 보여줍니다.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로마에서 가까운 나폴리였습니다.  나폴리의 가장 유명한 기적은 뭐니 뭐니 해도 성 제나로의 피의 기적입니다. 성 제나로는 초대 교회 베네벤또 지방의 주교였는데 AD 305년경 박해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참수형 당했던 돌에서 피가 흘러나온 것을 하녀가 받아두었다고 합니다.  중세를 지나면서 유리병 속에 응고되어있는 피는 기이하게 일 년에 한두 번 다시 액체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사람의 피가 한 번 응고되면 다시 액체로 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인의 축일이 되면 나폴리의 대주교님이 사람들 앞에서 그 병을 흔들어 보이고 그 병에 응고되어있는 피가 점점 액체로 되어 흔들리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한 과학자가 이 현상을 재연하였습니다. 무엇을 섞었는지는 모르나 화학적으로 피를 만들었고 시간이 지나 굳어졌다가 다시 흔드니 액체로 변하였습니다. 마치 케첩이 응고되었다가도 흔들면 다시 액체가 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충분히 현대 과학으로 그런 기적은 하나의 속임수일수도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는지 제가 만나본 이태리 시골 사람들도 나주의 기적을 많이들 알고 있었습니다. 나주가 교회로부터 거짓이라고 단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텔레비전으로 교황님 앞에서 율리아 혀 위에 있던 성체가 피로 변하였다가 다시 성체로 변하는 장면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에 PD수첩에 방영된 것을 보면 나주 율리아가 기적을 조작하고 심지어는 그녀의 소변을 나누어 마시는 장면까지 나왔습니다. 또 그렇게 성체가 피가 되게 하는 것은 입속에 상처를 내어서 그렇게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지금도 그 기적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다고 하여 몰려가는 사람들 중 누구는 나폴리로 누구는 나주로 향합니다. 결국 나폴리로 간 사람들은 아직까지 교회에서 인정하는 기적을 보는 사람들이고 나주로 향했던 사람들은 그것이 매우 창피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나폴리처럼 교회에서 인정하는 기적을 찾아간 사람들이 나주를 찾아간 사람들보다 더 잘 했다는 말일까요? 저는 그들도 한국에 있었다면 나주로 향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어디나 기적을 찾아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텔레비전을 보고는 그 기적이 사실이 아닐 수 있을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 결국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얼마 전에 오상의 비오신부님의 시신이 공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분의 손과 발에는 오상의 자국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시기 10일 전부터 오상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분이 계속 스스로 자해를 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내고 그 분을 치료했던 의사도 그것이 기적이 아니었음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분은 이미 교회에서 성인으로 인정된 분입니다. 결국 어떤 기적들도 우리를 확신시키기엔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아무리 큰 기적이 일어나도 현대 과학으로 다 재현 가능할 것이고 믿지 않을 사람들은 안 믿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믿을만한 확실한 기적이 있다면 그들도 신앙을 갖겠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기적을 청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에서 인정하는 표징을 따르라고 하시지 않고 ‘표징을 요구하는 것 자체를 나무라십니다.’  이는 마치 한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이 친 자식인지 그 ‘증거를 대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DNA 검사를 해보자고 한다면 부모는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자녀는 부모가 평상시에 자신에게 하는 사랑을 보며 그 분이 자신의 부모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증명서가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증명서도 꾸며낸 것이 아니냐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당신이 메시아이심이 확실한데도 끊임없이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하느님께 무례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우리 일상사 안에서도 혹은 조금만 생각하면 하느님이 계심을 또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기 싫기 때문에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표징이 있어도 다른 핑계를 댈 것입니다.

  제가 위에서 말한 세 가지 경우에서 보듯이 교회에서 인정하는 것이든, 인정하지 않는 것이든, 결국 의심만 남기게 됩니다. 그러나 믿고자만 한다면 그 표징들이 도처에 깔려있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들도 특이한 현상이나 기적을 찾아다니면서 하느님을 시험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믿음의 증거들은 우리 안에 우리 주위에 널려있습니다.

 

  연중 6주 월요일-예수님께서 포기한 사람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떠나셨다는 표현이 수없이 나옵니다. 복음 선포를 위한 순례의 삶을 사셨기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떠나시는 경우는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떠나시거나  간혹 쉬기 위해 또는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떠나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찾아 떠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들을 버리고 떠나십니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무엇을 하기 위해 이곳으로 오셨다가 포기하고 되돌아가셨다는 느낌이 큽니다.

예수님께서 포기하신 사람들!  얼마 전 형제 중의 하나가 강론 때 좋은 말씀을 하였습니다.  같이 사는 사람들이 아무 소리 않을 때  그것을 아무 문제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성덕이 뛰어나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몇 번 얘기해도 받아들이지 않기에  포기한 경우라는 것입니다.  실상 우리는 남에게 아픈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화가 나서 퍼붓는 경우가 아니면 여간해서는 안 합니다.
그래도 사랑 때문에 하기 힘든 말을 몇 번 했는데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즉시 그 사람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포기한 사람인 것이고  이런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보통 인간은 사랑이 그 정도이기에 쉽게 포기한다지만  사랑이신 예수님마저 포기하신다면 그 사람들은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고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불쌍한 사람들이란 바리사이들이고 표징을 요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시비를 걸기 시작했고 예수님을 떠보기 위해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다.
교만과 교만으로 인한 완고함.  이것이 그들의 현재 상태이고  이 완고함, 단단함을 깨려면 기적을 보여 보라는 강짜인 것입니다.
저도 20대 때 저의 교만으로 하느님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오랫동안 믿어온 하느님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지금까지 믿어온 교리들이 다 거부되었습니다.
이때 제가 한 짓이 이와 똑 같았습니다.
‘하느님, 당신이 계시다면 하느님, 당신이 저를 사랑하신다면  제가 꼼짝 못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는 기적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신을 믿어드리겠습니다.’
대충 이런 식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묵살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믿고 수그리고 들어가지도 못하는  그런 얼치기의 교만한 상태에서 떼를 쓴 셈입니다.

이런 교만이 깨지기 전에는 주님도 어쩔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당장은 하느님께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시고  적절한 때 기적이 아니라 고통과 좌절이라는 방법으로 이 교만을 깨주실 것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가장 큰 기적이자, 가장 확실한 표징>


   수많은 치유와 구마활동,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을 백성들 앞에서 드러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으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구원의 길이 자신들 바로 코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때가 한 치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불신과 의심, 그릇된 옛 습관을 버리지 않는 가련한 영혼들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선교사 예수님의 장탄식입니다. 죽음을 향해가는 동족들을 향한 슬픔과 괴로움의 탄식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생활 안에서 참된 기적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있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란 또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 크신 하느님께서 과분하게도 이토록 작고 연약한 한 인간을 찾아주심,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토록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가 하늘을 찌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사랑의 현존, 그것이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정녕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지만, 신앙 안에서 조금씩 성장해서 언젠가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 그것은 정녕 크나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는 것, 그분께서 내 안에 머무시는 것, 그분의 이끄심대로 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영성의 대가 아빌라 데레사 성녀께서는 어느 날, 자기 안에 하느님의 현존을 느낀 ‘기적 중의 기적’을 체험한 이후 이렇게 고백하셨답니다.

 

"주님께서 나를 안심시키는 한 단어를 말씀하시는 바로 그 때, 나는 보통 때처럼 두려움 없이 고요와 위로로 충만했다. 예수께서 항상 내 편에 계신 듯이 여겨졌다. 나는 예수님의 형상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매우 분명하게 예수님은 항상 내 오른편에 계셨고 내가 행한 것과 행하지 않고 있는 것의 증인이심을 알았다. 내가 지나치게 산만하지만 않으면, 마음을 집중하고 정신을 가다듬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내 옆에 계신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늘 내 오른편에 자리하시고, 언제나 내 일상생활 전체를 동반하고 계시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자, 가장 확실한 하늘에서 오는 표징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35번 / 나는 포도나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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