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 연중 제5주일 - 마르코 1,29-39
▥ 욥기의 말씀입니다. 7,1-4.6-7
욥이 말하였다.
1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2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3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4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6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7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쳐 주시도다.
○ 좋기도 하여라, 우리 하느님께 찬미 노래 부름이. 즐겁기도 하여라, 주님께 어울리 는 찬양을 드림이.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흩어진 이들을 모 으시도다. ◎
○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도다.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을 지어 주시도다. ◎
○ 우리 주님께서는 위대하시고 권능이 충만하시며,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으시도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일으키시고, 악인들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도다. ◎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9,16-19.22-23
형제 여러분, 16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2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9
그 무렵 29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은 믿음을 통해 병이 나았음을 이야기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증언하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개신교 신자들이 많이 했지만, 지금은 성당에서도 그런 증언들을 듣습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일는지요? 정말로 그들은 병이 나았을까요?
정말로 병이 나았을 것입니다. 물론 거짓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믿음 안에서 병이 낫는다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성경에 등장하시는 예수님과 성체의 예수님은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 병을 낫게 하셨다면, ‘성체의 예수님’께서도 병을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흘렀다고 그분의 치유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통해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질병도 주님 앞에선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치유 자체’에만 매달린다면, 진정 어리석은 행위가 됩니다. 치유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좀 윤색하여 말하자면,“인생은 고해요 오래 살고 싶은 사람에게는 풀잎 끝에 이슬과 같고 빨리 고통을 끝내고 싶은 사람에게는 너무도 긴 인생살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도 없고 이래저래 행복하지 않은 인생 어찌해야 하오리까?!”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불행을 절절이 씹으며 하느님께 고통에 대해 따지고 있는 욥에게 동무라는 사람들이 찾아와 하느님에 대해 변호랍시고 하는가 하면 하느님께서 네 잘못 때문에 주시는 것인데 달게 받지 않는다고 욥을 도리어 꾸짖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네게 필요해 주는 고통이니 잘 받아들이라고 훈계하기도 합니다.
저도 이 동무들 같았습니다.
인생을 별로 살지 않았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겁 없이 말하곤 했습니다.
고통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라고. 고통은 우리를 더 성장케 하는 것이라고. 고통은 우리를 주제 파악하게 하는 것이라고. 고통은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기회라고. 그중에서도 압권은 고통 중에서도 행복해야 참 행복이라고.
어느 것 하나 틀린 말 아닙니다. 그러나 나이를 조금씩 더 먹어가면서 이제 저는 저의 시건방졌던 지난날을 부끄러워합니다.
내가 한 순간도 통증이 없는 날이 없는 처지가 되면 그렇게 남에게 얘기하듯 자신에게 할 수 있을까?
남의 얘기라고 그렇게 쉽게 얘지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정신은 말짱한데 중풍으로 소대변까지 남에게 의존하는 처지가 되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영광스런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이런 고통 중에서도 행복해야 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남의 고통에 대해 그야말로 남의 얘기하듯 대함, 그것이 저였습니다.
영어에 Vicarious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리하는’, ‘대신하는’의 뜻이 있는데
‘그의 몸이 되어 느끼는’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묵상을 할 때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그 고통을 같이 느끼는 성인들이 있었고 아니 우리 사람 중에서도 어떤 특별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치료할 때 그의 고통을 자기 몸으로 같이 느낍니다.
진정 사랑을 하게 되면 이렇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구의 고통이 그의 고통으로 객관적으로 있지 않고 나의 고통으로 옮아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는 게 너무도 고통스럽지요. 그래도 이 사랑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랑의 고통은 이분들에게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면서 그러나 놀랍게도 피학적 사랑의 희열을 줍니다. 저에게 영신지도를 받는 분 중에 이런 분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이런 분이십니다.
모든 병자들의 병과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느끼시고 십자가상에서는 Vicarious Sacrifice를 봉헌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고린토 전서에서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연중 제5주일 - 사랑해야 사랑받는다
요즘 ‘워낭소리’란 다큐멘터리 영화가 인기라기에 유투브를 통해 줄거리를 보았습니다. 5분 남짓한 줄거리지만 짧게 보면서도 마음이 따듯해지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야기는 경북 봉화 한울마을에서 벌어지는 여든의 한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30년 지기 친구인 황소와의 이별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는 발이 불편하십니다. 잘 걷지도 못하는 불편한 발로 그 황소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 구남매를 키워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소가 없으면 꼼짝도 하지 못합니다. 소도 할아버지를 닮아 발을 절뚝이며 이젠 밭을 제대로 갈 힘조차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밭을 그냥 놀릴 수는 없기에 기어 다니며 농사를 짓습니다. 아직도 할아버지는 농사를 짓기 위해 그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일터로 가십니다. 그 소의 나이는 지금 마흔입니다. 소는 평균 15년을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무려 마흔이니 그 상태는 안 봐도 뻔합니다. 할아버지도 절뚝절뚝 거리고 그 할아버지를 태운 소도 절뚝절뚝 거리며 보는 사람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걷습니다. 언덕을 올라갈 때는 심지어 할머니가 마차를 밀어야 할 지경입니다.
이가 없어서 사료를 사 먹이지 못하고 지금도 여물을 끓여 먹입니다. 그것마저 젊은 소에게 밀려 제대로 먹지도 못해 여물을 줄 때도 할아버지가 항상 지켜 봐 줘야 합니다. 라디오가 작동이 되지 않자 할머니가 이 상황을 종합해 말해 줍니다. “두드려보소. 라디오도 고물, 영감님도 고물, 다 됐네, 다 됐네, 하하하하...” 그런데 얼마 전에 소가 넘어졌습니다. 전문가는 소의 건강을 체크해봅니다. 오래 살 수 있냐는 할머니의 질문에 그 사람은 오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오래 산다는 것이 고작 1년. 할머니는 “낭패네!” 하시고 할아버지는 “안 그래~”하시며 못내 인정하려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9남매 자녀들은 할아버지에게 이제 그 소를 팔라고 종용합니다. 할아버지는 깊이 생각하신 후 무슨 마음에서인지 소를 팔기로 결심하십니다.
소도 매일 밭에 나가는 것과는 다른 시간에 또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함을 느끼고 자신의 운명을 짐작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주는 여물도 먹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또 한 번 이 상황을 해설하십니다. “먹어, 니 죽으러 가는거 아니래. 니나 내나 고생 많이 했다. 주인을 잘 못 만나가지고. 만날 날만 새면 들에 가고 비나 눈이오나 끌고 가고...” 우시장에서 할아버지는 값을 터무니없게 많이 부릅니다. 500만 원 이하로는 팔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아마 평생 자신을 도와준 소를 판다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셨는지 연신 담배만 태우시고 소는 급기야 굵은 눈물을 흘립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소를 팔지 않고 다시 데려 돌아옵니다.
어느 날 소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할아버지의 재촉에도 소는 일어날 힘이 없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소의 고삐와 원앙을 풀어줍니다. 그 때 소는 그 의미를 안 듯 한 번 눈을 크게 뜨고는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고 다시는 들지 못합니다. “고생하고 애 먹었다... 좋은데 가그레이... 우리 같이 가면 좋은데” 소는 올해 유난히 많은 땔감을 남겨놓고 그 마을에 묻혔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며 좀 억지같이 들리기는 하지만 이 소의 삶이 예수님의 삶과 닮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소가 주인을 위하여 마지막 남은 에너지까지 아무런 불평 없이 쏟아 주고 마지막에 주인이 내다 팔려고 할 때도 그저 눈물만 흘릴 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또 그 인간들에 의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온순하게 당신의 생명까지 바치신 모습과 흡사합니다. 또한 할아버지가 결국 돈보다도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소를 택하여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는 모습은 우리도 결국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세상이 아닌 그분을 택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베드로의 집에 가시고 그 곳에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주시고 또 몰려오는 사람들의 갖가지 질병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내용이 줄지어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들 입장에서 이렇게 모든 것을 해 주시는 예수님께 무엇을 해 드렸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한 듯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또한 그렇게 남김없이 내어주고 베푸는 것이 당연한 것인 양 아무 불평도 하시지 않습니다. 새벽이 되자 예수님은 혼자 기도하러 외딴 곳으로 가십니다. 베드로와 그의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내고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하고 말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예수님은 최대한 모든 이들에게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준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는 우리가 매일 미사 때 영하는 ‘성체’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몸까지도 생명의 양식으로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주셔서 우리가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니, ‘모두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아야 하고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당신을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왜 이리도 받기만 하면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예수님께 조그만 사랑이나마 드리려하지 못할까요? 과연 하루에 온통 우리를 위해 당신을 다 내어 놓으신 그 분을 몇 분이나 생각하며 살까요? 또 그 분을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요?
사랑은 주는 것임을 알지만 우리는 사실 온전히 하느님과 사람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살고 있지는 못합니다. 이는 우리 안에 온전한 사랑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갖아야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질과 시간만 지니고 있다고 해서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줄 수 있는 마음, 그것이 사랑의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가 없으면 아무리 큰 재벌이라도 가난뱅이일 수 있고 그 마음만 있다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줄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줄 것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실 에너지는 누구에게 받으신 것일까요? 바로 아버지께 받으신 것이고 그 에너지자체가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은 더 온전하게 주시기 위해 홀로 외딴 곳에 가셔서 기도하시며 그 에너지를 충전하신 것입니다. 기도 이후에 예수님은 당신을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머물러 있으려하지 않으시고 다른 고을로 이동하자고 하십니다. 당신을 좋아하는 이들을 놓아두고 또 미지의 세계로 사랑을 주시기 위해 떠나시는 예수님의 충만한 사랑의 에너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바로 새벽에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며 얻으신 그 에너지의 힘인 것입니다.
사십년 동안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이 주고 떠난 소는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동물이 사람보다 낫다고 하는지 모릅니다. 아마 동물들은 죄라는 이기심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란 쉽지 않습니다. 역사 이래 세상 누구도 예수님만큼 사랑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만큼 예수님의 내어주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큼 행복하신 분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의미입니다. 사랑합시다.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을 합시다. 물론 그 사랑이 다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나라가 행복한 이유는 내가 하는 사랑 때문에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 전삼용 (요셉) 신부 +.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수도회 인사발령에 따라 최근 새로운 소임지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수련소로 왔습니다. 어떤 수녀님의 권고대로 ‘수련 한번 다시 받는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나는 생활에 익숙하다보니 홀가분하기도 하고, 또 은근히 기대도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솔직히 ‘짠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진하게 정을 주고받았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을 뒤고 하고 떠나야하는데서 오는 안타까움은 정말 큰 것이었습니다. 개구쟁이 꼬맹이들의 그리운 얼굴들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함께 동고동락했던 형제들, 선생님들, 후원자들, 지인들과의 이별도 아쉽기만 합니다. 그간 정들었던 삶의 터전을 바꾸는데서 오는 부담감 역시 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남’을 통해서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6년간의 지난 사목을 정리하면서 저는 다시 한 번 제 삶을 정돈할 수 있습니다. 결국 떠남의 순간은 영원한 떠남인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행위이기에 삶의 여러 순간 가운데 아주 소중한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떠남은 슬픔과 아쉬움의 순간이기보다는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보다 자주, 보다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에게 있어 삶은 언제나 경이로움이며 새로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떠남은 하나의 축복입니다. 만일 우리가 언제까지나 한 자리에 집착한다면, 언제까지나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언제나 제자리일 것입니다.
떠남의 순간이 있기에 우리는 보다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안주와 편리에 길들여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금 과감히 길 떠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매일의 작은 희생과 양보, 기쁘게 물러남, 십자가의 수용 등을 통한 일상적인 떠남에도 보다 익숙해지길 바랍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 역시 ‘길 떠나는’ 구도자이자 선교사로서의 예수님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들었던 어제와 결별하고, 익숙한 곳과 작별하고, 조금이라도 더 어려운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일손이 필요한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낮은 곳으로 떠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인 떠남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해나가셨습니다.
열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엄마 품에 안겨있던 한 갓난아기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았습니다. 저 연약한 것이 이 풍진 세상에 태어나 ‘한 평생 어떻게 살아갈까?’하는 걱정도 앞섰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명의 눈부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누군가의 표현이 생각납니다.
“어른들이 지닌 것은 목숨이고 아기들이 지닌 것은 생명이다. 시간과 욕망의 때가 묻어 낡고 비루해진 냄새가 나는 헌 목숨, 연둣빛 잎사귀와 이슬과 대기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햇살이 녹아있는 생명…
그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기 위해 그 누군가의 떠남이 있었음을 생각합니다. 새로운 세대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난 세대의 물러섬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결국 지는 것이 다시 피는 것이고 잎을 피우는 것이 또한 지는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기에 정녕 아쉬운 일이지만 떠남의 순간이 있어야만 낯선 것과의 새로운 만남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떠남이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계속 떠돌이 생활만을 고집하고 싶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때로 마음에 드는 훈훈한 가정, 고향 같은 집, 정겨운 가족들을 만나셨을 때 어찌 안주의 유혹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보다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보다 더 큰 강을 만나기 위해, 결국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해 또 다시 길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좀 더 머물다 가시면 어떻겠냐는 사람들의 간청에 예수님은 언제나 단호하셨습니다. 또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일어서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온 것이다.”
또 다시 새로워지기 위해, 또 다시 길 떠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습관과 아픈 추억을 버려야만 합니다. 다시금 쇄신되기 위해서는 익숙해진 따뜻한 아랫목과 과감하게 결별해야만 합니다.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난’(蘭), 박목월-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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