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 화요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 마르코 7,1-13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20─2,4ㄱ
20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에는 생물이 우글거리고, 새들은 땅 위 하늘 궁창 아래를 날아다녀라.” 21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큰 용들과 물에서 우글거리며 움직이는 온갖 생물들을 제 종류대로, 또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22 하느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번식하고 번성하여 바닷물을 가득 채워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닷샛날이 지났다.2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25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집짐승을 제 종류대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제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2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2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31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2,1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3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4 하늘과 땅이 창조될 때 그 생성은 이러하였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9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11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예수님께서는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꾸짖으십니다. 마음은 씻지 않고 손만 씻으면 되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진심이 떠난 공경을 어떻게 바른 예배라 할 수 있겠느냐는 꾸중입니다. 그러시고는 이사야서를 인용해 마무리를 지으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유다인들은 분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권위에 눌려 말을 잇지 못합니다.
역사 안에서 보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살렸지 음식이 그렇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음식은 도구였을 뿐, 그 뒤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원래 깨끗한 영혼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마음을 씻으며 산다면 결국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손을 씻는다는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지 말고 마음을 씻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수도원 회의로 저희 수도 공동체가 새로운 공동체로 출범하는 날이기 때문인지
오늘 복음 말씀 중에서 이 말씀이 특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올 해 공동체의 목표로 내 건 것이 “지킬 것은 지키고 바꿀 것은 바꾸자!”입니다. 계속 보존해야 할 좋은 전통은 지켜나가고 개선해야 할 것이 있다면 과감히 바꾸자는 것입니다.
먼저 좋은 전통은 지켜나가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좋은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좋은 전통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좋지만 지키기 힘들기에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는 그것이 좋은 전통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사 모든 것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같이 있기 마련인데 전통 또한 좋은 측면과 함께 나쁜 측면이 있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비교적 전통의 좋은 측면을 더 긍정하고 그래서 전통을 지켜나가려 하는 반면 젊은 사람들은 전통의 나쁜 측면 또는 부족한 측면을 보고 바꾸려고 합니다. 더 잘 해 보자는 것이지요. 나빠지자고 바꾸자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3년을 돌아보면 改善이 아니라 改惡인 경우도 있었고 그래서 원위치 된 것도 꽤 됩니다.
그렇다면 개선을 위한 것이 개악이 되는 것은 왜입니까?
그것은 무엇이 문제가 있음에도 지금까지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면 그것이 그만큼 좋은 점이 있는 것이고 현실적인 이유도 있는 것인데 새로운 것의 좋은 점만 보고 전통의 좋은 점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이상에 대한 열망 때문에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아무리 오래 된 전통이 있어도 바꿔야 할 것은 바꿔야 합니다.
전통을 너무 중시하는 것은 하나의 집착과 같아서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모르게 함은 물론 심지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우리는 또 다른 관점에서 성찰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는 ‘오직 성서’만을 부르짖으며 교회의 聖傳을 부정합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 외에는 우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사도 부정하고 성전도 부정하고 성인 공경도 부정합니다.
여기에 가톨릭은 동의하지 않지만 일부 우리 신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성인 공경이 하느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을 호도하고 교회 전통에 얽매여 하느님의 더 큰 뜻을 따르지 못한다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우리는 우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역시 식별입니다.
어떤 전통이 하느님의 뜻을 가로 막는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합당하고 현실적인 지침이요 도구인지 옳게 식별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연중 5주간 화요일 - 형식주의
제가 신자 분들과 이스라엘을 여행할 때입니다. 비행기 출입국 수속이 너무 복잡하고 오래 걸려 들어갈 때부터 주눅이 들었었습니다. 이는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인데 그만큼 다른 이들에게 미움 받을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가이드는 식당에 들어갈 때 고추장 등을 가져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용감한 우리 자매님들은 몰라 가져 들어가서 고추장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 지배인이 달려오더니 마구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먹으려면 자신의 식당에서 나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고추장 안에 돼지고기나 구약에서 금기시된 고기가 들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는지를 들었을 때는 기가 막혔습니다. 안식일은 엘리베이터 버튼도 누르면 안 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자동으로 각 층마다 서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혹 여름에 에어컨을 켜 놓았다가 갑자기 전기 스위치가 떨어지면 그것도 올릴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가는 외국인을 불러서 스위치 좀 올려달라고 청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음식을 안식일 전날 모조리 만들어 놓고 안식일 날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식당에 들어가는데 식당 앞에는 항상 손을 닦는 세면대가 있었습니다. 역시 밖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식사를 하기 전에는 손을 씻는 전통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관습은 본래 먼지가 많고 위생시설이 좋지 않던 시대에 생겼던 아주 좋은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화장실 갈 때마다 손을 씻는 요즘의 상황을 생각하면 쓸모없는 전통이 되었음에도 지금까지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도 어렸을 때 밤엔 손톱을 깎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런 것을 하면 무슨 뱀이라도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손톱을 깎지 말라는 것은 호롱불 켜 놓고 살던 시절, 어두워서 손톱을 자르다 자칫 손까지 다치게 될까봐 생긴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전깃불이 환하게 들어오는 요즘 이런 전통을 강요한다면 우스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사랑의 법만을 강조했습니다. 형식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당시 사랑이 없는 형식주의가 팽배해있던 시대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과도 같았습니다. 제자들도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이 전혀 이웃사랑에 방해되지 않는 것임을 알고 비록 좋은 전통이기는 하나 지키지 않고 음식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달려와서 큰 율법을 어긴 양 예수님께 그것에 대해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전통을 무슨 사랑을 어기는 큰 죄인 양 치부하면서 실제로는 사랑과 정의의 계명을 어기며 사는 위선적인 삶을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얼마 전에도 큰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였습니다. 전쟁은 양쪽 모두의 잘못이지만 열 배의 보복을 강조하면서도 자질구레한 전통들은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지키려하는 모습에서 지금도 예수님의 질책을 듣기에 충분하게 위선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교회 안에는 그런 모습이 없을까요? 한 예를 들어 유럽은 신부님, 주교님, 추기경님, 교황님이라 부르기 보다는 Reverendo(존경할만한 분: 사제), Eccellenza(탁월하신 분: 주교), Eminenza(위대하신 분: 추기경), Sua Santita(거룩하신 분: 교황)님의 칭호를 쓰고 신부님들도 주교님이나 추기경님을 부를 때 칭호를 잘 못 사용하면 높으신 분들이 매우 기분나빠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이런 칭호들은 모두 하느님께만 해당하는 칭호들이지 사람에게 붙여져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아버지라 불리지 말고 스승이라 불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교회 전통 안에는 그보다 더 완전한 이름으로 성직자들을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칭호들이 들어오지 않아 다행입니다. 성직자가 된다고 해서 탁월하거나 거룩해지는 것이 아님에도 그 직위에 따라 거룩함의 칭호를 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손으로 성체를 영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교회의 오랜 전통을 지키기 위함이고 성체를 함부로 만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겸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혈을 예수님께서 일일이 제자들에게 먹여주셨을까요? 아닙니다. 음식이기에 제자들은 손으로 집어 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손은 더럽고 혀는 더럽지 않습니까? 죄를 지으면 온 몸이 다 더러운 것입니다. 만약 그 전통을 계속 고집한다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뭐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일일이 말은 할 수 없지만 교회 내에서도 가정 내에서도 사회에서도 유일한 사랑의 법보다 전통이라는 굴레로 자신들과 이웃들을 옭아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하신 아우구스띠노 성인의 말씀처럼 형식이 영을 옭아매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 전삼용 (요셉) 신부 +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열린 가슴으로 광야로 나가는 일>
한 무리 관광객들이 봄 소풍을 떠났습니다. 버스는 호수와 산, 전원과 강이 어우러진 매우 아름다운 지방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차창 밖으로 무엇이 지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버스의 상석에, 좀 더 편안한 자리에 앉힐 것인가? 누구를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길 것인가? 바깥에는 황홀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엉뚱한 주제를 두고 말다툼하느라 여행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런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만 계속할 것입니다. 앤소니 드 멜로의 ‘행복한 삶에로의 초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부차적인 것, 지극히 지엽적인 것에 몰두하느라 정작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쉽게 놓치고 마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 우리 신앙생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우선적인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분하게도 죄인인 우리를 찾아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스런 하느님 얼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시고 인간세상까지 내려오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일이 아닐까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지속적으로 만나 뵙기 위해 열린 가슴으로 광야로 나가는 일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핵심이나 본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바리사이들, 교만할 대로 교만해져서 진지한 자기반성이나 쇄신작업과는 담을 쌓은 바리사이들, 그래서 결국 빈껍데기뿐인 신앙인으로 전락한 바리사이들을 엄중하게 질책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결례와 관련된 세칙의 부당함과 비인간성을 경고하십니다. 정결례는 한마디로 몸을 씻는 것과 관련된 규칙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정결례에 관한 규칙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규칙이 또 규칙을 낳고, 또 규칙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규정들이 늘어났는지 탈무드 제1부의 6권 전체가 '씻는 규정'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장에 갔다가 귀가했을 때, 아주 엄한 정결례 규정이 적용되곤 했습니다. 시장에서는 죄인들이나 이방인들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기에, 그래서 몸이 많이 더러워지기에 50리터 이상 들어갈 수 있는 물통에 팔꿈치까지를 넣어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흐르는 물에 팔을 씻어야 했습니다. 랍비들은 이런 규정을 실천하기 위해 4마일(약 6.4Km)을 걸을지라도 고생으로 여기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외출 다녀왔다가 손 씻는 일, 위생적인 견지에서 볼 때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권장사항일 뿐이지, 의무조항이 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여건이 마련되어 있어서 큰 준비 없이 손을 씻을 수 있다면 씻으면 되지요. 그러나 상황이 안 된다고 단순히 손을 씻기 위해서 2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걸어가서 손을 씻는다는 것을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 별것도 아닌 손 씻는 예식은 목숨 걸고 지켰지만, 정작 중요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은 소홀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나 몰라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통 유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죄 없다고, 깨끗하다며 어깨에 힘을 주며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완벽하다고, 흠 없다고, 죄 없다고,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절대로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무엇을 향해 전력투구해야 하는지? 무엇이 본질이며, 무엇이 비 본질인지? 무엇이 핵심이며, 무엇이 주변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체험은 요원할 것입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들,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사람들, 스스로 죄인임을, 병자임을 밝히는 사람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청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