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옷자락을 잡자]- 마르코. 6,53-56

2009. 2. 9. 오전 6:46:49

글자
 

2월 9일 연중 제5주간 월요일 - 마르코 6,53-56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하늘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짐승도 주님의 말씀으로 생겨났다. 태양과 달도 주님께서 만드셨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대자연의 주인이 되신다. 그러기에 우주 만물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신다.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신 것이다. 겐네사렛은 이스라엘에서 낙후된 지역으로, 가난한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늘이 보낸 분으로 받아들인다. 언제나 소박한 사람들이 기적을 먼저 체험한다(복음).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1-19
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4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7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8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땅은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였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
1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15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빛물체들이 되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6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하느님께서 이것들을 하늘 궁창에 두시어 땅을 비추게 하시고, 18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3-56
그때에 53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오늘의 묵상 
겐네사렛 호수는 이스라엘 북쪽에 있습니다. 호수 뒤로 기노사르(Ginnosar) 평야가 펼쳐져 있기에 ‘겐네사렛’이란 이름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행정적인 이름은 ‘갈릴래아’입니다. 그러기에 ‘갈릴래아 호수’가 정답입니다. 인근에는 ‘티베리아스’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헤로데 임금이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딴 도시입니다. 그래서 훗날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는 호수 이름을 ‘티베리아 호수’라고 더 많이 불렀습니다.
이 지역은 예루살렘이 있는 남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곳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곳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펼치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많았기에 그분께서 직접 다가가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도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잡이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환자들을 들것에 눕혀 자꾸만 데리고 옵니다. 그들은 그분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간절함이 배인 모습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던 것입니다. 병이 나아 돌아온 이웃들을 눈으로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우리의 모습’도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예수님의 기적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연중 5주간 월요일 - 주님의 옷자락을 잡자

  한 형제님께서 고민이 있어 저에게 상담 메일을 보내오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몸에 아직까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있는데 가족들의 권유로 치유의 은사가 있다는 신부님들을 찾아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형제님은 이렇게 기적을 찾아다니시면서 마음이 편치 않으셨다고 합니다.  부모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다니기는 하시지만 아내에게는 다음부터 그런 곳에 가자고 재촉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시련과 고통을 주시는 것도 자신을 성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치료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꾸준히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분은 병원에서 원인을 정확히 잡아내고 수술을 하여 고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정화시켜서 더 큰 사람으로 단련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있지만 또 언제 주님께서 치유해 주실지 몰라 답답하기도 합니다. 물론 빨리 치유해주시기를 원하시지만 다만 기적을 찾아 여기저기 다니는 것은 마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부모님과 아내의 뜻대로 치유기도를 받으러 다니는 것이 옳은 것인지 참고 기다리며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저의 의견을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복음묵상 내용과 일치하기에 이 기회를 빌려 답해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치유를 좀 더 받으러 다니시라고 권유해드리고 싶습니다.  부모님과 아내의 뜻을 따르는 것도 있고 또 기적을 찾아다니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가족을 이끌어가야 할 분이시기에 주님께 치유를 청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수많은 병자들이 찾아오고 그 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다 나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병이 낫지는 않았을 텐데 예수님은 누구나 병을 고쳐주십니다. 이는 누구도 병으로 고통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모두 치유해주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멀리 떨어져서는 병이 고쳐질 수 없었고 예수님께 다가와 옷자락이라도 만진 사람들만 치유가 되었습니다. 그 분께 다가와 옷자락을 만지는 것 안에는 믿음과 겸손함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고도 치유 받지 못하면 동네 사람들에게 큰 창피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 분께 달려올 수 있는 믿음과 겸손이 기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저도 귀가 좋지 않아 어떤 신자분들이 치유의 은사가 있다는 분을 전화로 연결시켜 주셔서 기도를 청해주실 때 굳이 거절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기도를 받는 것이 청하지 않고 참는 것보다 사람을 더 겸손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치유의 기도를 해 주실 때 굳게 믿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약속하신 것과는 달리 치유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 ‘주님의 뜻이겠지.’하며 더 이상 바라지 않았습니다. 물론 또 다른 기회가 온다면 역시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믿음이 약해서 고쳐지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본래 믿음이 출중하지는 못하기에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듯이 주님께서 항상 치유를 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치유를 청하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은 주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도 지병이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지병을 주님의 뜻이라고 하며 그냥 참아 받지는 않았습니다. 매번 들어주시지 않았음에도 세 번씩이나 강하게 주님께 치유를 청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자 바오로는 그냥 그 지병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지병이 있을 때 치유의 은사가 있는 사제나 교회가 승인한 어떤 분이 있다면 찾아가 치유를 청하십시오. 저희 외할머니도 치유를 받아 삼십 년이나 더 살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마음속에서 그런 방법으로는 나의 병을 치유를 해 주시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드신다면 그 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시고 잘 받아들이십시오.   치유를 청하지만 치유가 안 되는 것은 내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 겸손해지는 기회도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정말 열심히 믿고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가장 높은 영성은 항상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하는 마음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

 연중 5주 월요일-간절한 믿음

 

눈을 감고 오늘 복음의 정황을 상상해봅니다.
호수를 건너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하자  겐네사렛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술렁댑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예수님께서 자기 고장에 오셨다고 알립니다.
어떻게 알렸을까요?
“그분이 오셨다. 악령을 쫓아내신 분,  갖가지 병자를 낫게 하신 분  죽은 소녀를 되살리신 분  옷깃에 손을 대기만 했는데도  하혈하는 여인의 그 불치병을 낫게 하신 분이 오셨다.”   뭐 이렇게 알렸겠지요.

사람들은 환자를 들것에 눕혀 데리고 옵니다.
그러나 환자들이 너무 많아 제대로 된 치료,  정성스런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심사로   아니 만지기만 해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옵니다.

저는 아직까지 건강합니다.
마라톤을 뛸 정도의 다리와 폐와 심장 등  신체의 근간이 되는 것들은 아직도 튼튼합니다.  그래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빨이나 눈 같은 것이 시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근자에 전에 안 가던 병원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치과는 작은 병원이어서인지  꼼꼼히 그리고 정성스럽게 치료를 해 줍니다.
그래서 믿음이 갑니다.   그러나 안과는 유명한 곳이어선지 사람들이 많아서  병증이 가벼운 저에게는 대충 치료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두 번 치료받고 나니 웬만큼 됐다 싶어 더 오라고 하는데도 안 갑니다.

오늘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를 반성하였습니다. 
병원 가는 것을 워낙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는 배가 부른 것입니다.
북한까지 가지 않아도  정말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은 병원 문턱에도 못가보고  그래서 왜 아픈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도 모르는 채  생으로 병을 앓고 있는 것에 비교할 때 얼마나 사치입니까?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가난하지 못함이 불신의 온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다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치료 수단이 전무하기에 간절함이 믿음을 키운 것입니다.
이에 비해 많은 치유 수단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것을 보면서 이것을 믿지 못하고  이것을 보면서 다른 것을 믿지 못합니다.
이것이 부유한 사람들의 믿지 못하는 불행입니다.
심지어 하느님께도 온전한 믿음을 둘 수 없습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이 땅 이 백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치유활동을 통해 당신 백성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은 보편적인 사랑, 큰 사랑, 모든 인류를 다 품어 안으시는 큰 사랑의 소유자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신과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 당신과 함께 인생여정을 걸어갔던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도 충실하셨습니다. 당신과 가까이 살았던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랜 투병생활로 고생이 많은 환자들의 마음 상태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한번 잡아보겠다는 절박한 심정,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번 회복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 예의나 격식을 제대로 차릴 여유도 없지요.

 

   때로 이쪽 사정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일방적이고도 찰거머리 같은 요청에 때로 힘겹기도 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언짢아하지도 않으시고, 한명 한명의 아픔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정성껏 치료해주십니다.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까지도 함께.


   요즘 "토착화"란 용어를 자주 씁니다. 교회나 수도회에서 개최하는 회의나 행사 때 마다, 특히 선교관련 세미나 같은 때 단골 주제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단어가 "토착화"입니다.

 

   그런데 "토착화"란 단어 본래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토착화"를 외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교회나 수도단체가 한 지역에 "토착화 한다"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참된 토착화는 단순히 전례생활에만 해당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사 때 부르는 성가를 무조건 국악성가로 바꾸고, 성찬의 전례 때 사용되는 제병을 백설기 떡으로 바꿔 사용하고, 전례복장을 모두 한복 스타일로 바꾸는 것만이 토착화의 전부는 아니겠지요.

 

   토착화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교회가 이 나라, 이 땅, 이 백성을 극진히 사랑한다는 가장 뚜렷한 표현"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몸 붙여 살아가는 이 나라 백성들을 극진히 사랑하기에 그들의 전통이나 문화, 사상이나 가치관을 존중하여 열린 마음으로 대처하고, 자신을 낮추는 표현이 토착화의 본질일 것입니다. 토착화의 핵심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 육화강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바로 그 곳, 자신이 두 발로 서있는 바로 그 땅의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정신이며, 그 육화의 영성의 실천이 토착화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167번 / 생명이신 천상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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