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2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 마르코 7,24-30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18-25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25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모두 행복하여라.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모두, 그분의 길을 걷는 이 모두! 네 손으로 벌어들인 것을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
○ 네 집 안방에는 아내가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네 밥상 둘레에는 아들들이 올리브 나무 햇순들 같도다. ◎
○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께서는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어, 네 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게 하시리라. ◎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아무리 ‘당시 어법’이라고 해도 상대에겐 아픈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을 강아지로 표현한 자체가 유다인들의 오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겸손하게 답합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답변이었습니다. 그녀의 말은 재치가 아닙니다. 평소 생각하고 있던 마음의 답변입니다. 그러기에 즉석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에는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크고 작고는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것이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모두가 은총이며, 모두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인과 딸은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평생 그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어떤 난관에서도 힘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능력은 한 번에 끝나는 ‘일회성’이 아닙니다. 기억을 붙잡고 살아가면 사람의 앞날을 바꾸어 주는 은총이 됩니다.
연중 5주간 목요일 -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
저와 함께 공부하는 한국의 한 부제님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부제입니다. 그러나 그것 이외에 어떤 다른 면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겨울을 지나며 그 부제님의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교구 사제와 신학생들은 대부분 겨울에 한 곳에 모여서 연말연시를 함께 보냅니다. 그 부제님 교구도 오스트리아의 한 도시에서 함께 모였고 저희 교구는 독일에서 모임을 했습니다.
독일에서 모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교구 신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 부제님이 다쳐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가 다쳤느냐고 했더니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않고 광대뼈가 함몰되었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걱정을 하며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역시 그 부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일주일 넘게 로마에 오지 못했습니다. 일주일이 넘어서 수업시간에 모습을 나타냈는데 눈은 시퍼렇게 부어있었고 눈 밑과 볼에 수술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아직 실도 못 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안타까워서 어찌 된 것이냐고 물었는데 그 부제님은 웃으며 광대뼈를 고정시키기 위해 티타늄을 세 개 박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쪽 얼굴엔 감각이 없다고 했고 몇 달 감각이 돌아올지 지켜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말했습니다. 만약 저의 얼굴이 그렇게 되었다면 크게 상심하였겠지만 그 부제님은 너무나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교구 신부에게 물어보니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남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사실은 눈썰매를 타다가 앞 사람의 머리에 얼굴을 부딪쳐 얼굴이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독일어 한 마디도 못하는데 우선 한 병원에 입원시켜놓고 교구 식구들은 잠이라도 제대로 자려나 하며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날 찾아가니 웃으며 “켄터키 프라이드 안 사오셨어요?”하며 농담을 했고 이어서는 “이번에 수술하는 김에 맘에 들게 얼굴도 좀 같이 고치면 안 될까요?”하며 선배 신부님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얼굴이 그렇게 되었으면서도 그렇게 여유 있게 농담을 할 수 있는 여유는 누구나가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 부제님은 우리 모두에게 참신앙의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었고 우리 모두는 우리의 작은 믿음을 뒤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나쁜 영에 시달리는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기적을 청하는 한 이방인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시며 그 청을 물리치십니다. 이방인으로서 예수님께 기적을 청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는데 “나는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을 찾으러 왔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시며 사람들 앞에서 청을 드리는 이방인 여인에게 창피를 줍니다.그러나 그 여인은 굽히지 않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감탄하시며 그녀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일부러 청을 들어주시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이들에게 그녀의 믿음을 드러내 보이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방인까지 이렇게 믿는데 이스라엘인들은 믿지 못하는 것을 질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녀는 멸시에 가까운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보이는 믿음이야말로 참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주어집니다. 아무 어려움도 없는데 어떻게 신앙의 힘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아씨시 옆의 Montefalco 라는 동네엔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가 800년 전 모습 그대로 썩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수도생활을 했고 젊은 나이에 기도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녀의 심장에선 예수님의 형상이 새겨진 십자가와 채찍 등 수난 도구 등이 근육이 응고되어 형성되었고 지금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수녀님이 어느 날 기도하는 중 예수님께서 슬픈 얼굴로 십자가를 지고 지나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수녀님은 예수님께 왜 그리 슬픈 얼굴을 하고 계시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요즘 시대에 내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다.”하셨습니다. 성녀는 그 의미를 깨닫고 “당신의 십자가를 제 심장에 꽂으십시오.”라고 청했고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그녀의 심장에 꽂았습니다. 그렇게 그 성녀의 심장에 수난도구들이 새겨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다고 하신 이유는 요즘 세상에 아무도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여 믿음을 증거 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고 성녀는 그 고통을 자신이 받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성녀는 그 고통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그 심장에서 나온 것들과 썩지 않는 성녀를 보며 믿음을 갖고 혹은 더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위에 말한 부제님처럼, 오늘 복음의 이방인 여인처럼, 또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와 같은 이들을 통해 세상에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저조차도 고통을 청하기가 두렵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주시는 고통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청하기는 합니다. 일상에서 주어지는 우리의 십자가만이라도 잘 지고 나갈 수 있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신앙을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가시는 예수님께 작은 위로가 되어드리도록 합시다.
+ 전삼용 (요셉) 신부 +
모욕을 주는 욕을 주님께서는 하신 것인가? 당시의 유대인들과 똑같이 이교도를 차별하시는 말씀을 하신 것인가?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그럴 분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좋은 뜻으로 그리 하신 것이라고 믿는다면 도대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 지 궁금합니다.
얼마나 겸손한지 여인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을까? 얼마나 믿음이 굳건한지 시험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러셨을 수도 있습니다.
겸손을 시험함으로 겸손을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믿음을 시험함으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 왠지, 제가 너무 좋게 보려는 것은 아닌지 모르지만, 그 이상일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겸손을 이미 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믿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해도 괜찮을 거라는 이 여인에 대한 믿음이 있으셨습니다.
믿지 않고는 이리 심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주님의 그 모질고 우작스런 말씀은 여인의 겸손과 믿음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들이라고 자부하는 유다인들에게 이 겸손과 믿음을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실로 여인의 겸손은 빵부스러기 사랑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실로 여인의 믿음은 빵부스러기 정도의 은총으로도 충분히 치유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너희 배부르고 교만한 불신자들아, 이 여인을 보아라!” 하시는 것입니다.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강아지라니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마르코 복음은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교육용임이 확실시됩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하는 사랑의 공동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지만 이 공동체 역시 부족한 인간들의 집단이었습니다. 부족한 인간들이 모이다보니 초대교회 때부터 여러 가지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심각할 정도의 트러블이 있었다는 것은 여러 성서구절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지요. "구원의 우선권" 문제로 인한 갈등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제 1순위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이며, 마침내 우리 동족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이 약속된 민족이다"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염병할! 머릿속에 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들이 잘난 체 하기는. 다들 똑같은 하느님자녀들인데…" 이런 갈등 상황 앞에서 예수님의 태도를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정통 유다인으로서 자신의 동족들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고, 구원사업의 제1차 대상자로 선정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한 복음화 및 구원이었습니다. 유다인 이방인 할 것 없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있어 구원의 보편성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딸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한 이방 여인의 간청을 즉시 들어주시지 않고 뜸을 들이셨겠습니까? 그리고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는 "자녀들"이란 애정 어린 표현을 사용하셨는가 하면,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강아지"라는 표현, 상당한 수치심과 모멸감이 드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상황을 교육적으로 활용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자신 앞에 털썩 무릎 끓고 간절히 청하는 그 가련한 여인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오로지 한 마음뿐입니다. "즉각적인 응답", "간절한 소원에 대한 즉각적인 성취"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템포 늦추십니다. 여인의 신앙을 자극하십니다. 여인의 신앙을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리십니다. 더욱 강렬한 것으로 만드십니다.
그 결과 여인을 간절함과 절박함에서 우러나온 확고한 신앙고백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때로 쌍날칼처럼 날카로워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아프게 하지만 결국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보다 한 차원 높은 신앙에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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