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마르코 8,1-10

2009. 2. 14. 오전 6:19:28

글자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마르코 8,1-10

 
                                        

테르니의 성 발렌티노(Valentinus, 우)와 성녀 루칠라(Lucilla, 좌)

 
  성 발렌티누스의 축일을 연인들의 축일로 기념하게 된 것은 14세기부터이다. 연인들이 이날 서로 주고받는 특별한 형태의 축하 카드도 성행하였다. 이날을 선택하게 된 것은 이 시기가 새들이 짝짓기하는 기간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지기도 하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기사도적 사랑의 표현에서 나타난 것으로도 생각된다. 즉 이 전통에 따르면 매년 2월 14일이 되면 젊은 여인들이 ‘발렌틴’(Valentin), 이른바 자신들을 흠모하여 시중을 드는 기사를 선택하고 이 기사들은 젊은 여인들에게 선물을 바쳤다고 한다. 이러한 관습은 아직도 영국의 몇몇 지역에서 존속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념하는 발렌타인 축일의 여러 가지 의미와 형태는 상인들이 상업적으로 변형시킨 것으로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흙을 일구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9-24
9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18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23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24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0
1 그 무렵에 다시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3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8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9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10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오늘의 묵상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오천 명이 등장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숫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적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적에는 숫자가 소용없습니다. 신앙 안에서 숫자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은총은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얼마만큼의 정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숫자에서 초탈해지는 것도 기적입니다. 개수를 염두에 두면 언제나 삶은 바빠집니다. 인생은 숫자에 매달릴수록 초라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억’ 뒤에는 ‘조’가 있고, ‘조’ 뒤에는 ‘경’이 있습니다. ‘경’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요? 모르면서 살아도 불편함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1만 원으로도 12조 원의 돈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부분입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이들은 오아시스를 만나면 반쯤 발광한다고 합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죽했으면 신기루를 보면서 걸어왔을까요? 그런데 낙타는 오아시스를 만나도 조용히 물만 마신다고 합니다. 자신의 몸 어딘가에 물이 있다는 생각에 여유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생의 사막에서 우리 역시 낙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천 명 이상’을 말씀 한마디로 먹이신 분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중 5주간 토요일 - 감사히 봉헌된 희생의 가치

 복음묵상을 쓰기 위해 이용하는 것 같아 루치아에 대한 내용을 쓰지 않으려했으나 부모님들의 놀라운 신앙심을 조금이라도 알리고 루치아를 위해 기도 부탁한다는 의미로 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루치아는 제가 보좌를 하던 본당의 예쁜 고 3학생이었습니다. 고해소에서 미사 전 고해를 듣다보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CD를 틀어놓은 듯한 예쁜 성가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마 한 학생이 마이크를 잡고 성가 연습을 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미사 전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학생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고 바로 교사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교사들은 루치아를 소개시켜 주었고 저는 성가를 아주 잘하니 청년이 되어서도 청년 성가대를 하라고 권유하였습니다. 성악을 전공하기 위해 서울 부근의 한 대학에 진학한 루치아는 청년 성가대를 하였고 어려서 그런지 술자리가 있으면 너무 늦기 전에 가장 먼저 집에 들어가는 착한 학생이었습니다. 제가 유학을 로마로 나왔을 무렵 청년들과 본당 신자분들이 루치아가 청년 성가연습을 하러 나간다고 하고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성가 연습을 나오기 위해 버스를 타야 했는데 버스를 놓쳤다고 합니다. 한 아주머니와 둘이 기다리다 아주머니는 그냥 집으로 돌아왔고 그 이후로 루치아는 2년 동안이나 실종된 상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조차도 희망이 줄어들고 가끔 생각 날 때나 기도를 해 주던 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왔습니다. 루치아가 이번 연쇄 살인의 한 피해자로서 유골을 찾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루 이틀은 그냥 멍한 상태로 있었고 그 이후론 별일도 아닌데 가끔 짜증도 잦아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일을 당한 루치아에겐 배부른 불평을 하는 것 같아 항상 미안했었습니다.

얼마 전엔 한 분이 저에게 더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루치아가 살인범이 죽이기 전에 고민했던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착하고 깨끗하고 예뻐서 한 시간정도를 차에 태우고 돌아다니다가 결국 자신의 얼굴과 일을 알고 있는 루치아를 살려둘 수 없어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되뇌면서도 친가족도 아닌 저조차도 은근히 불평이 늘어나 짜증을 내기도 했는데 오늘 루치아의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고 제 자신이 참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장례식에서 루치아의 어머니는 자신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젠 괜찮아요. 아마 실종되었을 때 바로 딸의 시신을 찾았으면 미쳐버렸을 거예요. 지금은 하느님께 감사해요. 2년이란 시간을 주셔서 저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으니까요.”

아버님은 루치아의 홈피에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끝내 가고야 말았어. 살아서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하느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수난처럼 그렇게 처참하게 데려가셨을까? ...” 그리고는 보상을 안 받기로 하시고 그 이유를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우리아이의 죽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깨우쳐 주신 거라고 생각되기에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이런 불행한 일이 없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허기에 지친 4천명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그 발단은 제자들이 봉헌한 빵 7개와 물고기 몇 마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리고는 수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광주리나 남게 되었습니다. 루치아의 희생이 마치 봉헌된 빵처럼 여겨지고 부모님들이 마치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느님께 감사히 봉헌하시는 모습 같았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지향대로 루치아의 희생은 많은 이들이 죄를 덜 짓게 하고 우리나라에 불행한 일이 없도록 하는데 쓰일 것이 분명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지향대로 봉헌한 루치아의 희생을 양식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아주 조금만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감사보다는 불평만 할 줄 아는 저의 모습을 반성하며 작은 희생을 감사의 마음으로 봉헌하면 얼마나 큰 은총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묵상하게 됩니다.

루치아 위해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전삼용 (요셉) 신부 + 

 
 
 연중 5주 토요일-일념과 다념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할 때마다 예수님 참으로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합니다.
4천명을 먹이신 것이 대단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4천명이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 곁에 같이 있었다는 것이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무엇이 이 많은 사람을 당신 곁에 붙잡아 두었고 예수님의 무엇이 이들을 사흘 동안이나 붙잡아 두었을까? 그것도 굶겨서 보내면 쓰러질 정도로 먹지도 못한 사람들을. 요즘 한창 인기 있는 가수들인들 그들의 팬을 이렇게 붙잡아 둘 수 있을까? 그렇다면 며칠을 굶어도 떠날 수 없는 그 매력은?

너무도 교만한 저임을 미리 양해바라며 얘기한다면. 저는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와도 만나보러 갈 생각이 없습니다.
일 때문에 또는 그러 해야 하기에 가기는 해도 내가 보고 싶어 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대통령이 우리 수도원 마당에 와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태리를 여러 번 갔어도 교황님 알현하러 간 적이 없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저이지만 세계적인 연주자나 단체가 와도 저는 보러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귀국 연주회와 같이 격려차 가본 것 외에는 연주회를 한 번도 간 적이 없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제가 교만하기 때문이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적 사랑이 아니라면 저를 잡아끌지도 붙들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며칠을 굶어도 배고픈 줄 모르고 사람들이 주님 곁에 있었던 것은 배고픔을 잊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주님께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배고파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영적 사랑의 풍요를 경험한 사람은 알 것입니다.

사람들을 잡아끌고 며칠을 붙잡아 두는 사랑의 매력도 대단하지만 4천 명을 먹이시겠다는 그 사랑의 마음도 대단하십니다.
제자들은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뿐이겠습니까? 인간이라면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공중의 새까지 먹이시려는 그 하느님의 마음이 없으면 어느 인간도 그런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먹이시는 것은 어차피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것은 먹이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인간의 차이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보는 것과 능력의 하느님을 보는 것, 이것도 우리와 예수님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그저 먹이겠다는 一念외에는 다른 것 생각지 않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즉 一念과 多念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 저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료된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한 말씀 한 말씀이 얼마나 ‘달던지’, 그분과 함께 보냈던 시간이 얼마나 꿈결같이 감미로웠던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사흘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때는 저마다 먹을 것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지만, 사흘 동안 ‘비상식량’은 동이 나고 말았겠지요.


   한여름인 7월 중순경 근동지방의 기후는 만만치 않습니다. 더위가 극성을 부릴 때였습니다. 백성들이 머물렀던 장소도 도시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던 오지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노약자들도 있었습니다. 치유를 기다리고 있던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아주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뭔가 먹지 않으면 허기에 탈진할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서야 되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답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꽤 의미심장한 답변입니다.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의 답변은 자신들로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음을 시인하는 답변입니다. 자신들의 한계, 무능함에 대한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결국 제자들이 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스승님의 개입이 필요함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근히 스승님의 능력발휘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님, 보십시오. 저희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스승님께서 나서주셔야 되겠습니다. 도와주실 순간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가끔씩 우리도 한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 앞에 직면합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사면초가인 경우가 있습니다. 삶의 막장까지 내몰리기도 합니다.


   그 순간,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을 저주합니다. 냉정하기만 한 세상을 향해 욕설을 날립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벽에 부딪치는 순간이야말로 ‘참 신앙인’으로서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그런 고통의 순간, 인간적 무능력을 절절히 체험하는 순간, 이렇게 주님께 아뢰도록 합시다.


   “주님, 저를 보십시오. 보시다시피 저는 이토록 부족합니다. 주님께서 잘 아시다시피 이토록 나약합니다. 이다지도 힘이 없습니다.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결과를 보십시오. 정말 참담합니다. 오랜 시간 발버둥 쳐 봤지만 결과를 보십시오, 이 모양입니다. 이제야말로 주님 당신께서 개입하실 순간입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꼭 동반해주십시오. 제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힘을 주십시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가톨릭성가 68번 / 기쁨과 평화 넘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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