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 연중 제6주일]
유다인들은 악성 피부병에 걸리면 사제에게 몸을 보여야 했다. 병으로 확인되면 그는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머리를 풀고 수염을 가린 채 자신을 ‘부정한 사람’이라고 선언해야 했다. 그는 격리되어 외딴곳에서 살았다(제1독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바오로 사도는 강조하고 있다. 그런 삶을 산다면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다(제2독서). 한센병 환자는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갔다.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낫게 해 달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없다는 애절함이 숨어 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낫게 하신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기적은 언제나 예수님의 선물이다(복음).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13,1-2.44-46
1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2 “누구든지 살갗에 부스럼이나 습진이나 얼룩이 생겨, 그 살갗에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면, 그를 아론 사제나 그의 아들 사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데려가야 한다.
44 그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이므로 부정하다. 그는 머리에 병이 든 사람이므로, 사제는 그를 부정한 이로 선언해야 한다. 45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46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0,31─11,1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32 유다인에게도 그리스인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33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한센병은 살이 문드러지고 떨어져 나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이 병보다 더 비참한 병은 역사상 없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멍들었습니다. 본인은 그러고 싶지 않지만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정상적인 생활이 허락되지 않았고 가족으로부터도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이보다 더한 형벌이 어디에 있을는지요?
바로 그런 병에 걸린 한 사람이 깨끗하게 해 주시길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병이 나은 것입니다. 한센병의 흔적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의 기쁨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상상보다 훨씬 강했을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을 잡았고, 포기에서 재생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병이 나은 체험’을 평생 간직했을 것입니다. 어떤 체험인데 잊을 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가르침은 한센병 환자의 이 체험을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그의 체험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보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체험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단념했는데 기적처럼 반전된 사건입니다.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개입하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분께서 봐주시면 운명도 바뀌고 인생도 달라집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일어났던 기적을 찾아보고 묵상하는 날입니다.
연중 제 6주일-무엇을 하든
이 말씀은 무엇을 하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무엇을 하건 자기를 위해서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도무지 자기를 위해서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묵상하다보니 저희 수도원 형제 하나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저는 요리를 잘 하지도 않지만 어쩌다 요리를 하면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요리하고
제 입맛대로 짜고 맵게 해서 형제들이 먹기 힘들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성 프란치스코는 맛없게 먹기 위해 일부러 물을 타서 드시고 재를 타서 드셨으니 형제들도 그냥 덕을 쌓는 마음으로 먹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형제는 음식을 하면서 자기를 위해서 하는 적이 없습니다.
소식가이고 입이 까다로워서 자기는 잘 먹지도 못하면서 형제들을 먹이기 위해 이것저것 요리하는 것을 즐겨하고 자기는 못 먹어도 형제들이 그것을 맛있게 먹으면 그것을 기쁨 삼습니다.
자기는 개고기 안 먹어도 그래서 맛도 보지 못하지만 형제들이 개고기 좋아하니 개고기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다 그러하시지요.
그런데 오늘 코린토서에서 하시는 말씀은 하느님을 위해서 하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하십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비유를 들자면 적어도 부모 얼굴에 먹칠을 하는 짓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적어도 하느님을 욕보이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하고 더 나아가 하느님을 드러내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는 말을 듣지 않고 믿는 사람이라 역시 다르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입니까? 어떤 일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입니까?
성당에 가서 기도 열심히 하는 것? 기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노상 성당에서 살고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러나 하느님께 아무런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고백 성사 자주 보고 죄 짓지 않고 사는 것? 죄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학처럼 고고하기만 하고 이웃 사랑 없으면, 그러나 하느님께 아무런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성당에 큰 돈 척척 봉헌하는 것? 이것도 잘 하면 좋지만 건축 성금은 많이 내면서 이웃에게는 노랭이라면, 그러나 하느님께 아무런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성당일이라면 열일 제쳐놓고 하는 것? 이것도 열심히 해야겠지만 이웃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그러나 하느님께 아무런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일은 바로 이웃을 위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면에서 자기를 본받으라고 아주 자신 있게 얘기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내가 아니라 이웃에게 기쁨이 되는 일. 내가 아니라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일.
어떤 일이 이런 일이겠습니까? 바오로가 본받았던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
즉 많은 사람이 구원 받게 하는 일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고고히 계시지 않고 이 세상에 오셨으며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병자를 낫게 하시고,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고, 가난한 사람을 위로하시고, 억압받는 사람을 구해내시고, 영육 간에 굶주린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하신 것입니다.
연중 제 6 주일 - 당신이 원하시면
2003년에 개봉했던 짐캐리가 나오는 ‘브루스 올마이티’란 영화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뉴욕의 버펄로 지방 방송사 리포터인 부르스는 특유의 유머가 있어서 평범한 이웃의 이야기를 재치 있게 보도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매사에 부정적이고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남자입니다. 늘 자신이 하는 취재에 불만이 많은 그는 뉴스 앵커 자리에 눈독을 들이지만 그 자리가 원수지간인 에반에게 돌아간 것을 알고 생방송 도중에 그를 비난하다가 방송사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짐을 싸들고 나오면서 어려움에 처해있는 거지를 도와주지만 건달들에게 몰매를 맞고 차가 엉망이 되자 분노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며 하느님과 싸움이라도 할 듯이 원망하는 말들을 쏟아내요. 그런 그에게도 그를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여자 친구 그레이스가 있습니다. 어느 날 망가진 삐삐에서 얻은 전화번호로 찾아간 낡은 건물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잠시 동안 전지전능한 힘을 얻게 됩니다. 자유의지에 반하는 것은 하지 말며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두 가지 규칙과 함께...
브루스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힘을 자신을 위해서만 쓰면서 앵커에 오르게 되고 원하는 모든 것을 갖게 되지만 가장 소중한 애인 그레이스를 잃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그 절대적인 하느님의 힘으로도 자유의지를 가진 그레이스의 마음을 돌리진 못하죠. 하느님의 일조차도 떠안게 된 브루스는 인간들의 수많은 기도를 처리하느라 골치가 아프자 컴퓨터를 이용해서 모든 기도에 "예스"라고 응답해 버리고 되고, 그 결과 사회 질서가 무너져서 여기저기서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이 터지고 폭동이 일어납니다. 그걸 보며 정신을 차린 부르스는 애인 그레이스의 기도 내용을 보게 되고 그녀가 그를 위해서 매일 밤 간절히 기도하고 있음에 괴로워하게 되지만 결국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서 하느님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과 만난 부르스는 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다시 살아납니다. 망나니 같은 부르스를 위해서 바친 그레이스의 기도는 그를 감동시키고 그녀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며 마침내 그녀의 소망대로 브루스는 기쁘고 감사한 삶을 다시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여기서 결국엔 같은 것이지만 크게 두 가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첫 째는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모조리 들어주시면 이 세상은 단 몇 분 만에 망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기도를 선별해서 들어주셔야만 합니다.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이 수만 명이고 모두가 다 재벌이 되고 싶어 하고 수십 명의 애인을 갖고 싶어 한다고 그 기도를 다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내가 원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모든 원하는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내가 원하니 그대로 되어라.”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그러나 예수님도 그 권능을 본래부터 지니고 계셨던 분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신적권능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십니다. 아버지로부터 그 권능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당신이 원하시는 것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일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오늘 나병환자가 치유의 기적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을 일치시키고자 했기 때문이고, 예수님도 당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을 일치시킴으로써 오늘의 기적뿐만 아니라 모든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들어지기 원한다면 먼저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아야합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뜻만 가지고는 상대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브루스는 하늘의 권능을 얻었지만 애인의 사랑을 잃고 그 권능으로도 그 사랑을 다시 찾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레이스가 원한 것은 브루스가 전지전능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작은 소망대로 브루스가 살아주는 것만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브루스는 자신의 생각대로 출세하고 성공하고 힘을 얻으면 당연히 사랑도 따라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상대의 사랑을 얻는 가장 중요한 길은 상대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그 뜻을 따라주는 것이지 꼭 자신의 생각대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안엔 뱀이 한 마리 들어가 있습니다. 그 뱀은 쐐악쐐악 소리를 내며 자신의 뜻대로 사랑을 쟁취하라고 유혹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는데도 뱀은 하와에게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이 더 옳다고 느끼게끔 만듭니다. 인간은 이렇게 자아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고 결국 하느님의 사랑까지 잃게 됩니다.
브루스는 강해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인간입니다. 세상사람 누구나 하느님과 같은 힘을 지니고 싶어 합니다. 이는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그 후손들의 존재적인 교만을 상징합니다. 또, 그렇게 강해지면서 실제로는 혼란을 초래하고 사랑까지도 잃게 된다는 것은 이렇게 자아가 강해지면서 상대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물론 이웃들까지도 그에게 등을 돌릴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줍니다. 그 사랑을 다시 찾는 길은 애인이 본래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되짚어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대의 뜻을 따라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상대의 뜻을 따라주면 비로소 상대의 사랑을 받고 그 상대와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이 신비를 구체적으로 또 완전하게 보여주신 분이 성모님입니다. 세상 누구도 구속자의 어머니로서 속죄를 위해 바칠 세상 모든 죄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물론 한 인간으로서의 성모님도 아버지의 그런 뜻을 받아들이기가 꺼려집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예!’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인 성령님이 성모님께 내려오고 하느님께서 성모님의 태중에 잉태되어 한 육체 안에 두 개의 심장이 뛰게 됩니다. 즉, 한 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뜻을 버리는 완전한 자기 비움이야말로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가 자꾸만 커지면 하느님의 사랑도 이웃의 사랑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 환자가 ‘제가 병이 고쳐지기를 원하니 당신이 제 병을 고쳐주십시오.’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면 제 병을 고쳐주실 수 있으십니다.” 한 것처럼 항상 “당신의 뜻”을 물으며 그 뜻에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나가도록 합시다.
나병환자의 용기와 믿음
찾아오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의 정체를 조심스럽게 드러내시던 예수님께서 이번엔 죽은 인생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나병환자를 고쳐 주심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그분의 능력과 권위는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모를 정도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점차로 믿게 됩니다.
나병은 실로 무서운 병입니다. 옛날엔 한번 걸렸다 하면 그 시간부터 완전히 죽은 인생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눈은 흘기게 되고 입은 비뚤어지며 목소리는 쇳소리를 내게 되고 눈썹이 빠지며 손가락 발가락 들이 오그라들고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얼굴에 돌기가 생겨서 사람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일으키는 징그러운 사람이 됩니다.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것이 나병에 걸린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하느님께로부터 벌 받은 상처'를 평생 지니고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나환자들은 건강한 사람들과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진지 밖에 자리 잡고 따로 살아야 했으며 혹시라도 건강한 사람이 잘못 접근하게 되면 자기는 '부정한 사람이오.'하면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병을 경고해 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맞아 죽어야 합니다. 부모와 가족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에서 철저하게 소외 된 외롭고도 불행한 사람이 바로 나병환자였습니다.
제가 신부 되고 나서 부임한 첫 본당에는 나환자 정착마을이 있었는데 제법 큰 마을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착마을에 있는 환우들은 100% 음성 환자로서 이제 더 이상 환자는 아닌 셈입니다.
다만 일그러진 상처로 건강한 세상에서 맘 놓고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이해 부족으로 인해서 그들과의 접촉을 대단히 두렵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것이 환우들이 평생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한번은 정착마을에서 식사를 하는데 회장님이 저 때문에 약간 불편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주 찾아 주면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건강한 사람에게 일당을 주고 또한 부식비를 별도로 지불하여 신부님 식사준 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공소 사목회의 재정으로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그랬습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지 말고 각 가정을 돌면서 그 가정에서 먹는 대로 식구들과 함께 먹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동네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누추한 집에 어떻게 신부님을 모시며 더구나 환자들이 어떻게 신부님과 함께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고집을 부렸고 그래서 일주일 에 두 번은 동네 잔치가 되었으며(일주일에 두 번 방문했음)백 호나 되는 정착마을을 4년 동안에 네 바퀴나 돌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신부님은 우리에게 돈 한 푼 주시진 않았지만 돈보다도 더 좋은 것을 주셨다."라고.
오늘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신 것은 치유 그 자체를 넘어서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간주되었던 그들에게 높은 인격의 가치를 부여해 주신 것이며 또한 어떤 인생도 예수님 앞에서 치유될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우리 모두가 본받기를 그분은 은연중에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나환자에게 손을 갖다 댄다는 것은 같이 부정 타는 일인데도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세상에는 나병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죄를 모르고 속에는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찬 인생들입니다. 그들은 속은 썩었어도 겉은 멀쩡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병자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평생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옛날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 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시대에도 교회 안에서나 교 회 밖에서도 그런 무리들이 사회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병을 솔직하게 내보이면 고쳐질 텐데 감추고 있기 때문에 평생 불구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나환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자기 병을 갖고 나감으로써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 곁으로 달려오기를 항상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 늘 측은한 마음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용기 있게 나아갑시다. 그 분만이 진정 우리를 고쳐 주시며 구해 주십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르 1,40). 아멘.
▒ 광주대교구 땅끝공소 강길웅 세례자 요한 신부

<차라리 침묵하라고 이르십시오.>
오랜 투병 생활과 단말마의 고통 끝에 한창 나이(향년 55세)에 서거하셨던 피에르 뵈이요 추기경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동료 주교님에게 남긴 고통과 관련한 유언입니다.
“우리 성직자들은 틈만 나면 신자들에게 고통에 대하여 잘 설명하려고 애를 쓰며, 또한 고통을 잘 이해하고 있고 고통을 겪는 것에 익숙해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신자들을 향해서도 고통을 주제로 한 감동적인 강론들을 많이 했었지요. 그러나 최근 제가 말로 표현 못할 극심한 고통을 겪고 나니 이렇게 생각이 바뀌더군요.
사제들에게 고통과 관련해서 차라리 침묵하라고 이르십시오. 고통이란 것은 말로 표현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체험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고통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걸 깨닫고 나서 저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피에르 추기경님의 고백을 들으면서 많은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고통에 관해서는 ‘쥐뿔’도 모르면서, 고통이 약이니, 고통이야말로 인간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느니, 많이도 떠들어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대로 된 고통, 고통다운 고통도 겪지 않고서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는 정말 제대로 한번 고통을 겪은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나병에 걸린 이후 그의 삶은 한 마디로 고통덩어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그는 지독한 소외감과 외로움, 굶주림과 추위에 맞서야 했습니다. 아침이 올 때 마다 그는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하며 무수한 자살충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나병환자들의 삶을 그야말로 기가 막힌 삶이었습니다. 당시 나병으로 판명되는 즉시 인간세상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도시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나병환자라는 표시로 누더기 옷을 입고 살아야 했습니다. 머리도 깎지 말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고, 감히 남의 집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는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 안까지 들어왔습니다. 율법을 어겨가면서 예수님께로 달려온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 띄면 큰 일 날 텐데, 아마도 목숨을 무릅쓰고 예수님께로 달려왔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왕 죽을 목숨,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진데 마지막으로 한번 모험을 해보자’며 죽기 살기로, 있는 힘을 다해서 예수님께로 달려왔을 것입니다.
자비와 연민으로 충만한 예수님 앞에 서니 서러웠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갑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립니다. 꼭 한번 나아보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간곡히 아룁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생의 막장에서,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간절히 부르짖는 나병환자의 외침 앞에 마침내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삶 자체가 슬픔과 고통 덩어리였던 나병환자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권능의 손을 그에게 펼치십니다. 자비의 팔을 그의 어깨에 두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주님께서 나병환자에게 던진 이 말씀이 계속 여운으로 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결국 구원을 위해, 치유를 위해, 새 삶을 위해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인간 측의 적극인 의지를 요청하시는구나,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삶의 자세를 요구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병환자의 새 삶을 한번 살아보겠다는 간절한 마음,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한 메시아임을 굳게 믿는 확고한 신앙이 결국 기적을 불러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치유 받은 나병환자처럼 주님의 도움으로 다시 한 번 깨끗해지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보란 듯이 새 삶을 시작하길 바랍니다. 새 생명을 부여받은 기쁨에 있는 힘을 다해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온 세상에 외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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