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7일 화요일 성모의 종 수도회 창설자 7성인 기념- 마르코 8,14-21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6,5-8; 7,1-5.10
5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6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7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7,1 주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거라. 내가 보니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2 정결한 짐승은 모두 수놈과 암놈으로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수놈과 암놈으로 한 쌍씩 데려가거라. 3 하늘의 새들도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데리고 가서, 그 씨가 온 땅 위에 살아남게 하여라. 4 이제 이레가 지나면, 내가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를 내려, 내가 만든 생물을 땅에서 모두 쓸어버리겠다.”5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10 이레가 지나자 땅에 홍수가 났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4-21
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살다 보면 마음에 담아 두기에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이미 ‘지나간 것’인데도 다시 끌어안고 놓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지요. 상대는 벌써 잊었음에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속의 누룩이 부풀어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장애물은 있습니다. 교우들과 주고받은 상처거나 성직자에게서 받았던 아픔입니다. 활동 중에 느낀 실망이나 조직 안에서의 좌절감도 장애의 누룩이 됩니다. 자신 안에서 이것을 이해하고 제거하려 애쓸 때 ‘참믿음’은 시작됩니다. 자꾸 부풀어져 내 신심을 방해한다면 정말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지적처럼 위선의 누룩은 언제라도 조심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마음이면서도 ‘자기가 모르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은총이 머무르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빛이 햇볕처럼 스며들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무의식중에라도 선하고 착한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어제 바리사이들은 교만으로 인한 완고함 때문에 표징을 요구합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이미 널려 있는 표징은 보지 못하고 새로운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제자들도 완고함 때문에 봐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빵의 기적이 진정 뜻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은 답답하고 한심하셨을 것입니다. 완고한 바리사이의 표징 요구에 한탄하며 그들을 떠나가시는데 제자들마저 완고함으로 한심한 짓을 하니 말입니다.
어제 바리사이는 교만함으로 봐도 못 보더니 오늘 제자들은 집착으로 봐도 못 봅니다.
못 보는 것에 대한 두 가지 우리말 표현이 있습니다.
“저게 눈에 뵈는 것이 없어!” “저게 뭐에 눈이 멀었나 봐!”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은 교만한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교만하면 자기밖에는 뵈는 것이 없습니다. 교만하면 남을 無視하는데 이 無視라는 말이 ‘보는 것이 없음’, 즉 보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眼下無人이고하느님도 眼中에 없기 십상입니다.
지독한 自己集中으로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합니다. 어제 바리사이들이 이러했습니다.
뭐에 눈이 먼다는 말은 무엇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돈에 집착하면 돈에 눈이 멉니다. 승부에 집착을 하면 거기에 눈이 멉니다.
애인에게 집착하면 사랑에 눈이 멉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만 보고 자기 밖에는 못 보는데 비해 집착한다는 사람은 집착하는 그것만 보고 그것 밖에는 안 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빵의 기적으로 진정 보여주고자 하신 것을 먹는 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보지 못합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웁니다.
제자들은 빵이 많아진 것만 보는데, 빵이 많아진 거기에서 사실은 능력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는 눈,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부족했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보다는 그 병증이 심하지 않지만 제자들 또한 그리 큰 기적을 보고도 보지 못함에 주님은 어제와 그리고 오늘 내리 그리고 내내 한탄하십니다.
영원한 빛을 김 추기경과 죽은 모든 이에게 비추소서!
연중 6주간 화요일 - 극단주의와 위선
먼저 슬픈 마음으로 가톨릭 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며칠 전 저녁식사를 하는데 우연찮게 보수주의 성향을 띤 신부님과 조금은 교회에 좌파성향을 띠는 신부님과 함께 앉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두 분 모두 외국 신부님입니다. 보수주의 성향을 띤 신부님은 교황님이나 주교님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시던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 따르고 받아들여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럼 그분들이 잘못하는 것이 있는데도 그것을 다 옳다고 여겨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대답이 ‘그렇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교회역사에 나오는 교황님들과 성직자들이 잘못한 것들의 예를 몇 개 들었지만 ‘설사 그런 잘못들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다 주님의 뜻이 있어서 한 일’이라며 성직을 부여받은 사람은 마치 그것으로 성인이 된 것처럼 말했습니다. 교황님이나 주교님이 사석에서 한 이야기까지도 무조건 진리라고 믿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너무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면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그 신부를 보며 ‘자기가 주교가 되면 그런 대접을 원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품을 받는 것은 그것으로 그 사람이 마치 빵이 성체가 되듯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은 여전히 죄인으로 남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선임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저처럼 좌파 신부님은 우파 신부님에게 거부감을 표현했습니다. 자신은 교회의 권위적인 모습 때문에 시켜줘도 주교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추기경제도도 예로 들면서 예수님께서 만드시지도 않을 것을 교회에서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역시 거부감을 나타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직접 추기경을 선임하지는 않으셨지만 사도들 중에서도 특별히 셋만을 데리고 다니셨던 것처럼 주교 중에서도 특별히 추기경을 세우는 것이 큰 문제가 있어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교회가 세운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좌파 신부님 역시 교회를 너무 비관적으로 보시는 듯 했습니다. 혹 ‘이 분도 속으로는 주교님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비판한다면 ‘나라면 잘 할 텐데.’라는 맘도 들어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을 자랑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이다.’라는 말처럼 스스로 가난함을 자랑하면서 은근히 부자를 비판하지만 결국은 본인도 부자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단편적인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고 중간에서 양쪽을 모두 안 좋게 보고 있는 제가 옳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극단’적으로 가면 그 안엔 ‘위선’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두 극단이 나오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그 누룩의 의미는 다른 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들의 위선을 조심해야 한다.” (루카 12,1) 즉, 예수님은 그들 안에 감추어진 위선을 조심하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사이들은 유태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는 하지만 속으로는 로마에 잘 보여 자신의 부와 영리를 챙기는 사람들이었고, 헤로데 당원들은 유태인들을 위해 일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들의 영리를 위해 로마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극단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위선적으로 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김수환 추기경님은 평생 어느 쪽으로도 휘지 않으시고 한 손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성경을, 또 한 손에는 세상을 상징하는 신문을 들고 사셨던 분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대로 사는 사람은 위선적일 수가 없고 어떤 ‘파, 부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한 평생 진리의 빛 안에서 어디에도 휘지 않으셨던 추기경님의 모습을 다시 되새기며 진리의 길을 걸어갈 것을 다시 다짐해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명동성당 100주년 미사)]
"교회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안에 세상을 위해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을 향한 고단한 여정>
수도생활에 입문하던 지원자 시절의 일입니다. 모든 면에서 미숙하고 부족했지요. 특별히 신심생활면에서. 언제나 ‘결핍상태’였던 영적생활을 아쉬워하며 들었던 생각이 ‘세월이 좀 흐르면 나아지겠지’였습니다. ‘수도자로서의 연륜이 좀 더 쌓이면, 나이도 좀 더 먹고, 머리도 적당히 희끗희끗해지면 신앙의 깊이도 깊어가겠지’였습니다.
그러나 웬걸요.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것은 사실인데, 세월과 함께 늘어가는 것은 집착이요, 고집뿐이네요. 도를 넘어서는 자기합리화요 지나친 자기연민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동자의 후배들 앞에서 미안스럽기만 합니다. 후배들에게 민폐 끼치는 것, 그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것, 죽기보다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고 있군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유다 신앙의 전수자, 율법에 관한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전문가, 하느님에 관한한, 기도에 관한한 탁월한 지식의 소유자였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는 ‘참 신앙인으로서의 면모’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가장 필요한 덕목인 겸손함, 순수함, 진지함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에게 남아있던 것은 완고함, 위선, 형식주의와도 같은 ‘신앙의 장애물’ 뿐이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여기서 ‘누룩’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여기서 사용된 누룩이란 단어의 의미는 다분히 부정적입니다. 유다문학 안에서 ‘발효’를 일종의 부패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발효를 활성화시키는 누룩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악의 근원’, ‘악한 힘’, ‘악의 영향력’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는 말씀은 ‘바리사이들이 보여주는 악한 행실, 그들의 그릇된 영향력을 조심하여라.’는 의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보여준 악한 행실, 그릇된 영향력이란 그들의 위선입니다. 언행의 불일치, 종교적 편협주의, 배타주의, 독선, 아집 등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한심스럽게도 제자들은 본질과는 한참 거리가 먼 ‘빵’ 문제에 연연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한참 먼 제자들, 전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 앞에 예수님께서는 슬픔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꽤 오랜 기간 합숙훈련을 통한 집중적인 제자교육을 시켰고, 자신들의 눈앞에서 두 번씩이나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에 연연하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정작 해야 할 걱정은 이제 ‘부족한 빵’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부족한 신앙에 대한 걱정이어야 합니다. 부족한 지혜에 대한 걱정이어야 합니다. 부족한 사랑에 대한 걱정이어야 합니다.
우리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열심히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고, 열심히 그분을 따라다닌다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충실히 ‘깨달음에로의 길’로 나아가지 않으면 제자들처럼 ‘영적 소경’이 될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故 김수환 추기경께 평안한 안식을 주소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PRO VOBIS ET PRO MULT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