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8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 마르코 8,22-26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8,6-13.20-22
6 사십 일이 지난 뒤에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밖으로 나가 땅에 물이 마를 때까지 왔다 갔다 하였다.
8 그는 또 물이 땅에서 빠졌는지 보려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러나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노아에게 돌아왔다. 온 땅에 아직도 물이 있었던 것이다. 노아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아 방주 안으로 들여놓았다. 10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11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12 노아는 이레를 더 기다려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21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22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2-26
그때에 22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돌덩이는 엄청난 보석의 원석이었던 겁니다. 같은 보석이지만 가격은 달랐습니다. 알아보는 눈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보물을 안고 삽니다. ‘가족’이라는 보물과 함께 삽니다. 얼마만큼 가치를 깨닫고 있는지요? 모르면 ‘눈먼 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쳐 주십니다. 오늘날에도 눈이 먼 채 살아가는 이들은 많이 있습니다. 자식에 눈이 멀고, 재물에 눈이 멀고, 명예와 권력 때문에 앞날을 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는 눈먼 이를 눈뜨게 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절제하지 않기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귀한 것일수록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분수를 잊기에 삶의 리듬마저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눈에도 손을 얹어 주시길 청해야겠습니다.
연중 6주간 수요일 - 눈 뜬 장님 벗어나기
가끔 손님이 오면 저는 주로 바티칸을 가이드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이 바티칸 바로 옆이고 몇 번 하다 보니 바티칸 전문 가이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번 겨울에도 몇 번 손님들이 와서 바티칸 박물관과 성당을 순례시켜 드렸습니다. 성탄 때면 바티칸 광장에 커다란 구유와 수십 미터에 달하는 트리를 만들어놓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구유만 보고 그 옆에 서 있는 트리의 의미를 묻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트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보면 대부분은 잘 알지 못하고, 혹 조금 열심한 신자는 그 나무가 ‘생명나무’를 상징한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그러나 그 생명나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거의 알지 못합니다.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조하실 때 따먹지 말도록 한 열매는 선악과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자 또 따먹어서는 안 되는 나무가 하나 더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생명나무인 것입니다. 생명나무를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으로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세례로 인해 죄가 없어진 상태라면 그 생명나무를 먹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떤 분은 생명나무가 십자나무라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그 말은 틀립니다. 왜냐하면 십자나무를 아무리 먹는다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죄가 씻겨진 사람이 먹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너희들이 내 몸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생명나무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몸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불과 몇 년 전에야 깨달았습니다. 오랜 세월 신학을 배웠어도 성탄 트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명나무가 무엇인지를 볼 수 없었습니다. 마치 눈 뜬 장님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탄트리가 예수님으로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소경을 치유해줍니다. 사람들이 그의 눈에 손을 얹어 치유해달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을 도시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더니 눈에 침을 발라주시고 머리에 두 손을 얹어 안수를 해 주십니다. 그리고 무엇이 보이냐고 했더니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그의 눈에 손을 얹었더니 완전히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벳사이다로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점차적인 치유를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치유는 완전히 다른 치유입니다. 첫 번째는 영적인 눈을 띄워 주시는 것이고 그 다음이 사람들이 원했던 대로 육체의 눈을 띄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절대 불완전하거나 점차적일 수 없습니다. 침을 발라주는 것이나 안수를 해 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성령님을 부어주시는 상징적인 제스처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넣어주시려는 것은 그것이 물로 상징되든 안수로 상징되든, 은총, 즉 성령님입니다.
어쨌거나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영적인 눈을 성령강림으로 먼저 띄어 주시니 그 사람은 사람을 나무로 보게 됩니다. 구약에서의 상징 중에서 ‘나무’는 ‘사람, 인성, 육체’를 상징합니다. 만약 나무가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생명나무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영적인 눈을 한 순간에 띄어 주시고 다음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그의 눈에 손을 얹어 육체의 눈을 치유해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벳사이다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죄로 가득차고 완고한 세 도시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죄의 도시로 들어가 죄를 지으면 찾았던 영적인 눈을 다시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지 않으면 정말 우리는 눈 뜬 장님들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아나니아의 안수로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모든 것을 새로 보게 되었듯이 우리도 성령의 임하심으로 영적인 눈을 떠야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요구하는 기적이 바로 내 가까이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고 성경도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항상 우리의 목표는 ‘성령 충만’임을 잊지 말고 매일매일 새로운 성령강림을 맞는 삶을 살아나갑시다.
“무엇이 보이느냐?”
<이 특별한 신부님>
교도소 사목을 담당하셨던 한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한 평생 교도소를 내 집처럼 드나드셨습니다. 틈나는 대로 재소자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셨고, 특유의 친절과 미소로 재소자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매일 재소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매일 갇혀있는 사람들의 우울한 얼굴들, 똑같은 얼굴들을 대하니, 그리고 수입이 생기는 일도 아니니, 짜증이 나실 만도 할 텐데, 신부님은 특별하셨습니다. 매일 보는 그 사람들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대하듯이 반갑게 인사하셨습니다. 매번 따뜻한 미소를 건네셨습니다. 매번 반갑게 악수를 건네셨습니다. 매 순간 상대방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어느 날 그 교도소의 최고참인 사형수 한명이 이 특별한 신부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맨 날 보는 얼굴인데, 왜 인사는 매일 하고 또 하는 거요? 짜증나게 시리.”
그러자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제 본 형제는 어제의 형제이고 오늘 내가 본 형제는 완전히 새로운 오늘의 형제입니다. 매일 매일 변화하는 형제가 반가워서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인사하는 겁니다.”(pps.co.kr ‘아름다운 글’ 참조).
신앙인으로서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차대한 과제는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눈은 육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될 때 우리는 매일 만나는 형제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을 뵙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사이다의 소경을 치유하십니다. 눈먼 이들의 치유 자이자 해방 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을 그의 머리에 얹고 안수하십니다. 그리고는 무엇이 보이느냐고 질문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어 일련의 치유과정을 마무리하십니다.
이렇듯이 치유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어렴풋이 나중에는 뚜렷이!
처음에는 육적인 치유에서 나중에는 영적인 치유에로.
영적인 눈을 뜨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이 얻게 될 선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삶이 바뀝니다. 인생관이 바뀝니다. 온 세상이 바뀝니다. 결국 새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한 아기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아기가 방 이리 저리를 기어 다니다가 자수를 놓고 있는 어머니 앞에 멈췄습니다. 자수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러서 아주 멋있었습니다.
수를 뜨고 있는 어머니 쪽에서 바라보니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만월에, 멋들어진 소나무에, 날아가는 기러기에, 정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기 쪽에서 보이는 자수의 뒷면은 도무지 뭐가 뭔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수의 뒷면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볼품이 없지요. 실밥으로 뒤엉켜 무슨 형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기 쪽에서 바라보는 작품의 뒷면은 갖은 색깔의 실로 뒤죽박죽 형편없지만, 어머니 쪽에서 바라보는 작품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보십시오. 하느님의 계획표와 우리 인간의 계획표는 이렇듯이 천차만별입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 인간의 생각은 달라도 엄청 다른 것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되는 순간, 우리는 바로 이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의도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 하느님의 작품과 우리 인간이 구상하는 작품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영적인 눈을 뜨게 될 때 우리는 그토록 회피하는 고통과 시련이 하느님 안에서는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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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 영혼을 주님의 손에 맡기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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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소 |
주교좌 명동성당 대성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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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관 |
2009년 2월 19일(목) 오후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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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일시 |
2009년 2월 20일(금) 오전 10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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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미사 |
주교좌 명동 대성당(한국주교단과 사제단 공동 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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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지 |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인 공원묘지 내 성직자 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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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미사 |
명동성당 - 2009년 2월 22일(주일) 낮 12시(주례 : 교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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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성직자 묘역 - 2009년 2월 22일(주일) 낮 12시(주례 : 총대리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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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락 처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무처 02-727-2023~6 FAX) 02-773-1947 |
| 운영본부 상황실 02-727-2440~3 FAX) 02-727-24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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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소 방문시간은 오전 6시부터 밤 12시까지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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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김수환추기경님께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일찍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시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기쁨에 들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