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닮 *제 십자가를 지고 *-마르코 8,34-9,1

2009. 2. 20. 오전 6:36:51

글자
 

2월 20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 마르코 8,34-9,1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우리가 내려가서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 놓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1,1-9
1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시고 6 말씀하셨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8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시편 33(32),10-11.12-13.14-15(◎ 12ㄴ)
◎ 주님께서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은 행복하여라.
○ 주님께서 민족들의 결의를 꺾으시고, 백성들의 계획을 좌절시키시도다. 주님의 결의는 영원히, 그분 마음의 계획들은 대대로 이어지도다. ◎
○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께서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살피시며,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시도다. ◎
○ 주님께서는 당신 머무시는 곳에서,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을 굽어보시도다. 그들의 마음을 다 빚으시고, 그들의 모든 행위를 헤아리시는 분이시로다. ◎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34─9,1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예닮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내 뒤를 따르려면'입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자신을 버리고 고통을 참고 견디는 일들은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훌륭하고 위대한 일이긴 하지만...)

     

     

    흔히 십자가를 설명할 때, 며느리가 시부모를 봉양하는 일을 예로 들거나,

    부모가 장애자 자녀를 키우는 일을 예로 들거나 하는데,

    그런 일들은 신자가 아니라도 많이 하는 일입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 중에도 효자 효부가 많고 장한 부모님들이 많습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그것도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는 합니다.

    효자, 효부, 장한 부모님들의 희생과 헌신이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기는 한데,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뒤따른다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야 합니다.

     

     

    종교박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도 엄청난 박해를 받았고,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유대교 신자들이 받은 박해를 십자가라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십자가라는 말은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 말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극기 고행을 하고 수련을 하고 있는데,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해탈을 해서 스스로 신의 경지에 오르기 위한 것이라면,

    그가 참고 견디는 고통은 결코 십자가가 될 수 없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어떤 탑을 쌓았는데,

    알고 보니 그 탑이 바벨탑이었다고 한다면, 그 탑은 그냥 바벨탑이고,

    하느님께서는 그 탑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너무 배타적인 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뒤따르는 삶이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입니다.

    그 삶에서 예수님이 없다면 그건 그리스도교의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어도 훌륭하고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걸 다 가치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길이라면,

    예수님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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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집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제로 살기 위해서 극기 고행을 하는 것이지

    극기 고행을 하기 위해서 사제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을 잊어버리면 자아도취에 빠집니다.

    그리스도교가 십자가를 많이 강조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을 숭배하는 종교는 아닙니다.

    만일에 고통을 숭배하고 중시한다면 그건 '피학 변태'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기 위해서 일부러 극기 고행을 하는 것과

    자기의 극기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려고 도보 성지 순례를 하는 것과

    체력 단련을 하려고 운동 삼아서, 또는 산책을 하려고

    걸어서 성지까지 가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가지고 있던 차비를 술값으로 써버려서 어쩔 수 없이 성지까지 걸어갔다면,

    그건 극기 고행이 아니라, 그냥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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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려면 왜 꼭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그건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데,

    십자가를 빼고는 예수님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목적이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한 필수과목입니다.

     

     

    필수과목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난 것인데,

    제가 대학교 다니던 시절에 교양과목이나 선택과목은 참 잘했는데,

    전공 필수과목은 아주 못했습니다.

    그래도 성적이 좋은 과목들 때문에 평점은 높았고, 계속 장학금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공 실력은 형편없다는 것을 저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명색이 금속공학을 전공하는 공대생이 금속공학 성적은 나쁘고

    정치학이나 문화사는 잘 알고 있었으니, 또 전공 책은 안 보고 성경만 읽고 있었으니,

    아무리 평점이 높고 장학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졸업한 다음에 참 딱한 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전공과는 아무 상관없는 신학교에 다시 입학했으니

    금속공학 같은 것은 다 잊어버려도 괜찮게 되었지만,

    어디 가서 금속공학을 전공했다고 내세우지도 못합니다.

     

     

    신앙인의 필수과목은 십자가입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도 필수과목입니다.

    그 나머지, 신학을 공부하거나 전례를 공부하거나

    성음악을 공부하는 일 등은 선택과목입니다.

    저의 신학교 전공은 역사신학(성서학)으로 되어 있습니다.

    교회법에 대해서는 수업시간에 배운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사실 성서학이라는 학문도 신앙인에게는 선택과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삶으로 사는 것은 필수과목이지만.)

     

     

    우리에게는 '죽으나 사나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만이 필수과목입니다.

    쉽게 말하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사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는 그 순간,

    마리아는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마리아를 존경하는 것은 학식이나 재능 때문이 아니라 그 믿음의 삶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된 순간

    그들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사도들을 존경하는 것은 학식이나 재능이나 업적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끝까지 뒤따랐다는 점 때문입니다.

     

     

    처음에 부모 봉양을 하는 며느리나 장애자 자녀를 둔 부모를 언급했는데,

    그런 부모가 없고 그런 자녀가 없는 사람은 십자가를 덜 지게 되는가?

    라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다.'입니다.

    누구에게나 각자 자기의 십자가가 있는 법입니다.

    크고 작고, 무겁고 가볍고를 따질 수 없습니다.

    각자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고,

    각자 자기 몫의 외로움이 있고,

    각자 자기 몫의 슬픔이 있습니다.

     

    남의 것을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을 충실하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일입니다

     

    -----------------------------------

    (제목의 '예닮'이라는 말은 '예수님 닮기'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 묵상 
 
심리학 강의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느닷없이 3일 후에 죽는다면 ‘당장 하고 싶은 일’ 세 가지를 이야기해 보라 했습니다. 학생들은 웃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일단 부모님께 전화하고 애인이랑 여행 가고……. 아, 작년에 연락이 끊긴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그러다 보면 사흘이 가겠지요.” “음, 저라면 부모님과 마지막 여행을 가고, 그다음엔 꼭 가 보고 싶었던 고급 식당에서 비싼 음식을 먹겠습니다. 그러고는 삶을 정리하는 마지막 일기를 써야죠.”
학생들의 소망은 뜻밖에도 평범했습니다. ‘여행을 간다. 친구를 만난다. 짝사랑했던 그녀에게 고백을 한다.’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동안 교수님은 칠판에다 한마디를 썼습니다. ‘Do it now!’(지금 바로 하라!) 교실 안은 금세 조용해졌습니다. 어디선가 읽었던 만화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십자가를 피하지 말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죽는다고 생각하면 ‘지지 못할 십자가’는 없습니다. ‘지금 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끌어안아야 합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를 싫어하는 것이 싫어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는 인간관계가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내가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해 주는데 왜 나를 싫어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성경말씀대로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나의 사랑이 부족한 것 같아서 모든 에너지의 98%를 그 사람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결국 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노력 끝에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썼었다면...’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를 사랑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당신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술을 한 잔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몇 더 들어왔는데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조직폭력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술 마시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장면들이었습니다. 보스는 포장마차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소주병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니 옆에 있던 급이 낮은 사람들은 얼른 자신들의 술잔을 비웠습니다. 보스는 그냥 보지도 않고 아무 곳에 술을 부었습니다. 졸병들은 술을 따르는 곳에 재빨리 술잔을 갔다대어 술을 받았고 넘치기 전에 약간 잔을 들어 올려 따르는 것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보스는 다른 곳을 보며 본인이 원하는 곳에 술을 부었고 그 때마다 졸병들이 잔을 갔다대며 술을 한 방울도 바닥에 흘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스가 주는 술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사회에서도 웃어른이 따라준 술을 다른 곳에 붓거나 버린다면 큰 실례가 됩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은총은 성령님의 선물이고 거룩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아무에게나 주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은총을 받을 만큼 자신을 비운 사람에게 그 비운 만큼만 은총을 주십니다.  은총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만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사랑을 흘려버리거나 낭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받아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실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 사랑을 왜 받아주지 않느냐며 그 한 사람에게 온 사랑을 쏟아 붓지는 않으십니다. 더 합당한 사람을 더 사랑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준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며 받아들이는 만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에너지는 나를 원하는 사람에게 더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랑은 하되 그 사람을 위해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에게 묶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받아들이겠다면 언제든 사랑할 준비를 하되 그 사람에게 묶여서는 안 됩니다.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고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밖에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주님을 따르려면

오늘 복음의 Key Words는 “주님을 따름”  “자신을 버림”  “제 십자가를 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행위는 주님을 따르는 행위, 자신을 버리는 행위,  제 십자가를 지는 행위, 세 가지로 얘기되고 있지만 주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기에 사실은 주님을 따름 하나이며 주님을 따름 안에 다른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다른 곳에서는 주님을 따름에 대해서 조금 다르게 얘기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하는 부자 청년에게 주님은 “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주님을 따름” “모든 것을 버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입니다.
그러니 부자 청년의 얘기에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소유물에 대한 가난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셨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모든 것 대신 자신을 버리는 자기 무화와 이웃 사랑 대신에 제 십자가를 사랑함에 대해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自己無化,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생명을 내 놓고 목숨을 잃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고 많은 순교자들이 보여주셨듯이 이것이 가장 완전하고 궁극적인 자기무화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생의 마지막 한 번뿐입니다. 그러니 일상에서 자기를 버리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자기주장을 꺾는 것. 자기고집을 버리는 것. 자기 바람대로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 자기 좋을 대로 하지 않는 것.
그런데 이것을 뒤집으면  그것이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꺾는 것이 내가 져야 할 십자가이고 자기고집을 버리는 것이 내가 져야 할 십자가이며 나의 바람대로 되지 않음이 나에게 십자가이며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이 나에게 십자가일 것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작은 형제회)-
 

 

 

 

<있는 힘을 다해 떨어트리려 했던 돌덩어리>


   아프리카에 마음씨가 아주 고약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싱싱하거나 건강한 대상을 보면 괜히 화가 나고, 질투심이 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식물을 보면 줄기를 끊어버리거나 뿌리 채 뽑아 던져버리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지요.

 

   그가 하루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먼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여행 중간에 한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아시스에는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던 싱싱한 종려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하필 심술궂은 그가 종려나무 옆을 지나가다가 길게 뻗쳐 나와 있던 나무 가지에 눈이 찔리고 말았습니다.

 

   잔뜩 화가 난 그였지만, 종려나무가 워낙 커서 뿌리를 뽑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그가 아니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다가 엄청 무거운 바위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 바위를 종려나무 줄기 한 가운데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종려나무는 갑자기 다가온 날벼락이자 감당하기 힘든 고통 앞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몸 전체를 흔들어보기도 하고, 있는 힘을 다해 가지를 흔들어 돌을 떨어트리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돌은 종려나무 몸통 한 가운데로 점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종려나무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큰 바위의 무게를 지탱하기위해 땅 속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종려나무의 혼신을 다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과 최선을 다한 ‘뿌리내리기’ 작업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뿌리내리기 작업에 최선을 다했던 종려나무의 뿌리는 아주 깊은 곳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아시스의 깊은 수맥까지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맥 위에 견고한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그 종려나무는 다른 나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큰 나무로 성장했습니다. 풍부한 물과 영양을 지속적으로 공급받게 된 종려나무는 아주 당당하고 기품 있는 거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는 오아시스의 명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 종려나무가 오아시스의 거목이 되고, 그 지방의 자랑이자 명물이 된 가장 큰 이유는 괴팍한 사람이 끼워 넣고 간 정녕 괴로웠던 바위 덩어리, 십자가처럼 여겨졌던 바위덩어리 때문이었습니다(요하네스 브란첸, ‘고통이라는 걸림돌’, 바오로 딸 참조).

 

   우리에게 매일 매 순간 다가오는 십자가, 우리 삶을 억누르고, 우리를 힘겹게 하는 십자가는 사실 어떻게 보면 은총인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성장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지혜로워집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두 가지 조건으로 ‘자아 포기’와 ‘십자가 수락’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십자가는 ‘상징’이 아니라 ‘잔악한 현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주 십자가를 자기 몸에 친히 지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많은 사형수들을 봐왔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함부로 던질 수 있는 말도 아니었고, 선선히 수락할 있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수락은 목숨을 건 약속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적당한 예수님 추종이 아니라 목숨을 건 예수님 추종이 필요합니다. 적당 선에서의 예수님 추종, 적정선에서의 십자가 수락이 아니라 삶 전체를 건 자아포기와 생애전체를 통한 십자가 수락이 요청됩니다.

 

   크게 포기할 때 묘하게도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전적인 추종, 목숨을 바친 투신을 하게 될 때 묘하게도 하느님은 당신 자비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참 평화와 참 기쁨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156번 / 한 말씀만 하소서
 
 
 
 
 
 
~~장례미사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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