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일 [중풍병자치유]- 마르코 2,1-12

2009. 2. 22. 오전 7: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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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 연중 제7주일 - 마르코 2,1-12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늘 새롭다. 그러니 옛날의 일만을 기억해선 안 된다. 그분은 사막에서도 강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번제를 올려야 한다. 희생 제물을 바치며 찬양을 드려야 한다(제1독서). 우리를 부르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분께는 늘 진실만이 있다. 그러므로 “예!” 할 것은 반드시 “예!”라고 응답해야 한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우들을 위로하고 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다. 가족들은 병자를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가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들의 용기를 주님께서 갚아 주신 것이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 그는 벌떡 일어나 걸어 나갔다. 모든 이가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복음).

<나를 위하여 너의 악행들을 씻어 주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3,18-19.21-22.24ㄷ-2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8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21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
22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싫증을 내었다.
24 너는 도리어 너의 죄로 나를 괴롭히고, 너의 죄악으로 나를 싫증 나게 만들었다. 25 나, 바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너의 악행들을 씻어 주는 이,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

시편 41(40),2-3.4-5.13-14(◎ 5ㄴ)
◎ 주님, 저를 고쳐 주소서. 주님께 죄를 지었나이다.
○ 행복하여라, 가련한 이를 돌보아 주는 이! 불행의 날에 주님께서 그를 구하시리라. 주님께서 그를 보살피고 살려 주시어, 그가 땅에서 복을 받으리라. 그를 원수들의 탐욕에 내주지 않으시리라. ◎
○ 주님께서 그를 병상에서 받쳐 주시고, 그가 아플 때 모든 고통을 없애시리라. 저는 아뢰었나이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고쳐 주소서. 주님께 죄를 지 었나이다.” ◎
○ 주님께서는 제가 온전하도록 붙드시고, 저를 주님 면전에 영원히 세워 주시나이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영원에서 영원까지! 아멘, 아멘! ◎

<예수님께서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1,18-22
형제 여러분, 18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걸고 말하는데,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아니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 19 우리 곧 나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시면서 “아니요!”도 되시는 분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20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 합니다.
21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세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22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환자의 가족들은 적극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 예수님께 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려보냈던 겁니다. 사람들은 어떤 표정으로 봤을까요? 더러는 웃었을 것이고, 어이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용기를 받아 주십니다. 그분의 넓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못마땅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죄를 용서해 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도 받아 주십니다. 모두에게 애정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환자의 가족들은 용기가 있었습니다. 주변을 의식했더라면 예수님 앞에 나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의 용기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결정입니다. 사람에게 기대고 사람의 판단에 구애된다면 ‘참된 용기’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시선만을 생각해야 참된 용기에 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믿지 못했고 주위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따집니다. 신앙 안에서 따진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주님 앞에서까지 따져야 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법보다 위에 있습니다. 사랑은 무질서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따지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연중 제 7 주일 - 일어나 들것을 들고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제가 세례를 준 70대 중반의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너무 늦게 세례를 받아 하느님을 어떻게 알아가야 하느냐고 저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분은 발이 불편하여 성당에 나가시기 힘들기 때문에 방에서 시간 될 때 성경 필사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의사 출신이시라 글을 쓰면서 성경의 내용을 묵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습니다. 다리도 아프시고 몸도 좋지 않으신 그 할머니는 신, 구약을 일 년 반 만에 완필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당신이 공부하고 있는 것들을 모아서 책을 내시겠다고 야단입니다. 정말 늦게나마 주님의 사랑에 불이 붙은 것 같습니다. 그 분이 처음부터 그렇게 열성적인 분은 아니셨습니다. 그 분은 평생 산부인과 의사를 해오시며 수 없이 낙태를 하셨습니다. 낙태를 장려하던 시절, 하루에 60명도 해 보셨다고 합니다. 평생 얼마나 많은 수의 아기들이 그 할머니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채 꺼내졌겠습니까?

종교가 없었던 그분에게도 그런 삶은 큰 양심의 가책을 안겨주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얼굴이 비뚤어져 집 밖에 나오지도 못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몸이 많이 안 좋아져 삼 년 동안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지내야 했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인생이 마감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밑에 층에 성당에 다니던 두 자매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분은 골수암 말기 판정을 받으신 분이었고 또 한 분은 그 분의 시누이였는데 두 분 다 열심히 다니던 신자들이었습니다. 이 두 분은 위층의 할머니의 소식을 듣고 본격적으로 공략을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용서하지 못하시는 죄는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움직이지 못하시는 할머니를 위해 그 자매님들이 교리를 해 주었습니다. 제 기억엔 교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았는데 세례를 청하기에 주임신부님과 상의하고 그냥 세례를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 같았습니다. 그런데 세례 받는 날 그 할머니는 절뚝절뚝 걸으시며 성당으로 나오셨고 세례식 때에도 앞으로 걸어 나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지금의 모습으로 변하신 것입니다. 지금 그분의 신앙에 대한 열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중풍병자’는 걸을 힘도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 움직여주지 않으면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님께 다가오지 못할 처지’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심한 병에 걸린 경우에는 주위사람들의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께 갈 힘도, 용서를 청할 용기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중풍병자의 믿음으로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지붕까지 뚫고 예수님 앞에 병자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네 명의 믿음에 보답을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론 본인의 믿음을 가장 크게 생각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주위사람들의 믿음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시는 경우도 여러 번 있으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누워있을 때 장모가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지만 주위사람들의 간청과 베드로가 사도라는 이유만으로 직접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백인대장의 종이 심한 병으로 누워있는데 백인대장이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제 하인이 곧 나을 것입니다.” 하였을 때 그의 믿음이 어떤 유다인들보다 큰 것을 보시고 그의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유다인들은 기적을 행할 때에도 손을 얹어 고쳐달라고 하든지, 찾아와서 고쳐 달라고 했는데 그는 말씀만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도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서 계속 거부하시는 예수님께 포기하지 않고 쫓아와 청을 드려 딸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야이로의 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죽은 아이가 무슨 믿음을 그리스도께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살아난 것은 부모의 믿음 덕택입니다.

  사실 구원 받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사형수도 저에게 이 진리를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청부살인으로 잡혀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옥살이 하는 가운데서 교정사목을 하는 신부님을 만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족들도 다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개신교나 불교 신자가 된 사형수들은 죽기 싫어서 사형장 앞에서 모두 울며 저항을 했는데 천주교 신자가 된 이 사형수는 어머님께 죄송하다 말하고 신부님께 담배를 줄이고 운전 조심할 것을, 울고 있는 수녀님과 가족들에겐 좋은 데 가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웃으며 사형장으로 당당히 들어갔습니다. 이 이야기를 며칠 지나서 해 주시는 어머님도 편안한 얼굴이셨습니다. 사실 사형수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르고 사회에서도 이미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오른 쪽에 같이 못 박혀 있던 죄인을 구원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께서 주시는 이 마지막 기회의 중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네 명의 사람들의 이름은 비록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마음에는 영원히 기억되어 있고 합당한 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율법학자들에게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하는 것과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하는 것과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질문하십니다. 물론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하시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예수님께서 죄까지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지 없는지 사람들이 깨닫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처음에 ‘병을 고쳐준다’는 것을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돌려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의 결과가 병의 고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죄도 용서받고 기적도 행할 능력이 있는 분임을 더 쉽게 보여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중풍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죄도 용서하고 병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을까요?

자리’란 바로 그 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한 가지에 집착하다보면 그 자리에 붙어서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상태까지 가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제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죄의 나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에 집착하여 온갖 거짓말과 죄를 짓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인기에 집착하여 그것을 잃기 전에 목숨을 끊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권력에 집착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애정에 집착하여 그것을 잃고 자살하기도 하며, 육체적 쾌락에 집착하여 결국 강간이나 살인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에 질력이 나서 벗어나려 해도 오랫동안 집착해 온 것들은 그 사람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삶이 허황될 뿐만 아니라 참다운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종으로 만들어버렸음을 깨닫고 다시 자유로워지고 싶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가 있었는데 그 신자도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실 수 없음을 스스로 느끼며 고해보기를 꺼렸습니다. 그런데 주위 신자들이 그 분을 성당으로 데려왔고 고해를 보게 하였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고해를 보던 그 분은 신부님께 아주 적은 보속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를 그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보속을 조금 주는 이유는 자매님께서 이미 자신과의 싸움을 하면서 충분히 보속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그렇지 않은 것 같아도, 교회를 완전히 떠난 것 같아도, 그 자신 안에서는 이런 이길 수 없는 투쟁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예수님 앞에까지 데려다놔야 하는 것은 건강히 걸어 다닐 수 있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그들의 ‘믿음’

예수님께서 다시 카파르나움이라는 마을에 머물러 계시던 날이었습니다. 그분이 어느 집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사방에서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배고팠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목말랐던 사람들입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이 왔던지 그 집 문 앞에까지 빈틈이 없습니다(마르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 중풍에 걸려 사지가 마비된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지 그는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누워 지내며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들고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는 분이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병도 고쳐주실 것 같습니다. 그분이라면 누워만 지내며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 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몸은 누워 있으나 마음은 벌써 그분에게 달려갑니다.
 
다행히도 그 마음에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의 마음을 보고 친구 넷이 그를 들것에 눕힌 채 데려왔습니다(2,3). 그러나 들것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헤쳐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에는 이미 그곳에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포기하고 돌아서야 할 처지입니다. 예수님을 뵙지 못하고 돌아서야 할 판입니다. 아닙니다. 그대로 발길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꼭 치유받고 싶다는 ‘간절함’과 거기 계신 그분께서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그와 그의 친구들을 붙잡습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 11,22ㄴ-23)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믿음이 그들에게 좋은 생각을 끌어냅니다.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예수님 계신 곳 바로 위에 덮었던 곳을 벗겨 구멍을 내고 그를 들것에 눕힌 채 밑으로 내려보냅니다. 그렇게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던 물리적인 장애물과 공간을 제거시킵니다. 막혔던 벽이 제거되고 거리가 사라집니다. 중풍 병자는 ‘아래로 내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가 되어주소서.”(시편 30,11) 예수님께서 그와 그들을 보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질병이 죄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2) 사람들 가운데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율법에 단단히 구속된 그들에게 예수님의 죄의 용서는 하느님 모독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알아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2,9-­10)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사도 10,43).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사도 13,38-­39)

히브리어로 ‘죄’는 ‘과녁을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온전한 상태에서 벗어난 것, 빗나간 삶을 가리킵니다. 육신이 마비되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이 주위 사람들의 도움에 의지한 채 살 수밖에 없었던 중풍 병자는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이제 그는 용서받았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온전한 상태로 다시 돌아옵니다. 자신의 두 발로 일어설 수 없었던 그는 일어나 자신이 누워 있던 들것을 들고 나갑니다(마르 2,12).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 너희는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나와서 뛰놀리라.”(말라 3,20)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이사 43,18-­19.21)

주님, 오늘 제 몸을 일으킵니다. 제 두 발로 굳건히 일어섭니다. 예전의 얽매임을 훌훌 털어버리고 묶여 있음에서 자유롭게 벗어납니다. 그리고 두 팔 벌려 당신께서 하시는 새 일을 찬양합니다.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의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제게 은혜를 베푸셨기에 주님께 노래하오리다.”(시편 13,6)
 
강선남(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사과정)

 

 

 


“얘야, 너는 네 죄를 용서받았다.”


<해질 무렵 긴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혹시 단 며칠만이라도 갇혀 지내보신 적이 있습니까? 모든 곳이 통제되는 생활,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는 생활 말입니다. 정말 숨이 막히는 생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오랜만에 소년원엘 다녀왔습니다. 다들 고생들이더군요. 화창한 주말 오후 당직 서시는 선생님들도 고생이고, 아이들 생각하며 바리바리 먹을 것을 싸서 찾아오시는 봉사자분들도 고생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폐쇄된 울타리 안에서 청춘의 혈기를 억누르느라 용을 쓰는 아이들이 고생입니다.


   해질 무렵,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짠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신부님, 좋은 곳에서 밝은 모습을 만났어야 했는데...정말 죄송해요.”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한 아이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제 귓전을 울렸습니다.


   갇힌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제 발로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 평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절실히 깨닫습니다. 누군가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산다는 것, 누군가로부터 도움 받지 않고 내 힘으로 산다는 것, 정녕 큰 감사거리이자 큰 은총입니다.


   언젠가 만난 한 환자가 기억납니다. 큰 사고를 겪고 나서 재활치료중인 형제였는데, 당시 아주 조금씩 회복 중이었지요. 자존심이 무척 강하셔서, 그리고 남 도움 받는 것 죽어도 싫어하시는 분이셨기에 가급적 당신 스스로 해내려고 기를 쓰셨습니다. 침대에 내려서 신발 한번 신는데 5분은 족히 걸렸습니다. 아주 작은 문턱이나 약간의 오르막만 있어도 그분에게는 정말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물건 하나 바닥으로 떨어지면 그것 줍는 것이 그분에게는 정말 큰 작업이었습니다.


   그분을 생각할 때 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신체 건강하다는 것, 사지가 멀쩡하다는 것 정말 큰 은총입니다.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큰 병치레하지 않고 산다는 것,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의 경우 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된 말기 중풍병자였습니다. 병세가 어지간했으면 부축이라도 받아서 예수님께로 왔을 텐데, 들것에 실려 온 것을 봤을 때, 거의 식물인간에 가까운 병자였음이 확실합니다.


   중풍병자는 그 누군가가 도와줘야만 겨우 밥 한 숟가락 뜰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크게 선심 써야만 겨우 ‘볼일’도 볼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는 일이 오랜 세월 중풍병자가 해왔던 전부였습니다. 그저 환자의 목숨이 떨어질 날만 기다리는 것이 환자 가족의 바람이었습니다. 중풍 병자를 거두고 있던 가족들의 고초도 말 할 수 없이 컸습니다. 환자 못지않게 답답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중풍병자 가족들에게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전해집니다.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가족들은 ‘혹시나’하는 희망을 안고 들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환자를 들것에 실었습니다. 가족들은 큰 기대와 함께 설레는 마음을 안고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 앞에 당도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입구가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치유를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와 가족들로 주변은 인산인해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도무지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가자니 억울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간절히 희망했었기에 가족들은 무리인 줄 알면서도, 예의가 아닌 줄을 알면서도 한 가지 묘안을 짜냅니다. 집 바깥에 나있는 계단을 향해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천장에 있는 지붕을 조심스럽게 뜯어냈습니다. 들것에다가는 줄을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환자를 예수님께서 앉아계시는 방 한 가운데로 천천히 내려 보냈습니다.


   참으로 기상천외한 일, 해도 해도 너무한 일, 도무지 예의가 아닌 일,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가족들의 병자를 향한 극진한 마음을 눈여겨보십니다. 가족들의 병자를 향한 ‘팀플레이’를 높이 평가하십니다. 끝까지 병자를 포기하지 않은 가족들의 지극정성 앞에 탄복하십니다. 치유를 향한 그들의 적극성, 구원받고자하는 그들의 능동성,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는 간절하고도 열렬한 마음 앞에 예수님의 마음 또한 움직입니다.


   오늘 제 안에 들어있는 중풍병자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고칠 수 없는 심각한 마음의 질병을 바라봅니다. 제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형제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번 새 삶을 살아보겠다는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자비, 연민의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저 역시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 자비의 손길만을 기다립니다.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이런 말씀을 던져주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냥 ‘네 병을 치유시켜주마’가 아니라 죄를 용서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단지 외적으로 드러난 병에 대한 치유뿐만 아니라 내적인 치유까지 동시에 선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환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졌습니다. 너무나 많은 인파에 지레 겁을 먹고 집으로 발길을 되돌린 환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결과 예수님을 만났고, 그로 인해 치유와 구원을 받은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그분과의 만남을 통한 치유와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측의 적극적인 의지와 노력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절박한 마음으로,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얼마나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있습니까?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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