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일꾼은 적다 (루카10,1-9)
전승에 따르면, 루카 복음사가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는 터키의 안타키아) 출신이다. 바오로 사도의 전교 여행에 함께하였던 그는 주님의 복음과 복음의 선포 상황을 기록하였다. 곧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이다. 루카는 다른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부분을 성모 마리아와 함께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성모 마리아를 최초로 그린 화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그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전승이 있는데,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들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루카만 나와 함께 있다며,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해를 많이 입혔으니 그대도 조심하라고 이른다. (2티모 4,10-17ㄴ)
사랑하는 그대여, 10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11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이니 함께 데리고 오십시오. 12 티키코스는 내가 에페소로 보냈습니다. 13 올 때, 내가 트로아스에 있는 카르포스의 집에 두고 온 외투와 책들, 특히 양피지 책들을 가져오십시오.
14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행실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15 그대도 그를 조심하십시오. 그는 우리의 말에 몹시 반대하였습니다.
16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이 불리하게 셈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17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게 하신다. (루카 10,1-9)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2티모4,10-17ㄴ)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이니 함께 데리고 오십시오." (11)
음침하고 축축한 로마의 토굴 감옥에 수감되어 말년을 쓸쓸하게 보내고 있던 노(老)사도 바오로 곁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인물이 바로 루카였다. 루카는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서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행에 동행했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단순히 동행한 정도가 아니고 팔레스티나에서부터 로마까지의 멀고도 험난한 해상 여행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도 바오로를 수행하였다.
그는 사도 바오로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였다. 또한 그는 콜로사이서 4장 14절에서 언급된 대로 '사랑하는 의사'이기도 했다. 그는 감옥에서 죽음과 대면하고 있는 노(老)사도였던 사도 바오로의 건강과 안위를 돌볼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지닌 의사였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사도 바오로의 제1, 2차 로마 수감 생활 동안 그와 함께 있어서 (콜로4,14; 필레몬1,1,24; 2티모4,11)서신을 대필하기도 한 비서요, 신실한 친구이기도 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 선교사, 의사, 비서, 친구로서 사도 바오로와 언제나 함께한 진실한 주님의 종이었다.
이제 티모테오가 올 것임을 확신한 사도 바오로가 그에게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방문할 때에 '마르코를 데려올 것'을 요청한다.
요한 마르코는 예루살렘 출신으로서(사도12,12) 사도 바오로의 제1차 선교 여행에서 사도 바오로 일행을 떠나 개인적으로 행동했던 불명예스러운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사도13,13).
제2차 선교 여행 때 사도 바오로는 이런 전력이 있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동행을 거부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바르나바와 결별하기도 했다(사도15,36~41).
그러나 콜로사이서 4장 10절이나 필레몬서 1장 24절을 참고하면, 마르코는 사도 바오로가 1차로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에 그와 함께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베드로 전서 5장 13절에 따르면, 마르코는 사도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후, 이전의 사도 바오로와의 반목을 털어버리고 다시 그의 신실한 협력자가 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서로 반목했던 자들이 복음 안에서 다시 화해하고, 한 뜻으로 주님 복음을 위해 힘쓰는 모습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마르코와 동행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이유는 마르코가 사도 바오로 자신의 일에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원문을 보면,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일'을 '디아코니안'(diakonian)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이 단어는 교회와 관련된 봉사, 또는 하느님 나라와 관련된 봉사와 일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것을 볼때,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복음 선포에 마르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양피지 책들을 가져 오십시오.'(13)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가져올 것을 부탁한 것은 외투(겉옷) 이외에 '책들, 특히 양피지 책들'로 번역된 '타 비블리아, 말리스타 타스 멤브라나스'(ta biblia, malista tas membranas; my scrolls,especially the parchments)였다.
여기서 '책들'로 번역된 '타 비블리아'는 일반적으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지칭하는 단어이지만, 본문에서는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이라는 문구로 한정되어 있어 양피지 책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양피지 책들'로 번역된 '멤브라나스'(membranas)는 라틴어의 '멤브라나'(membrana)로 표현되는 단어로서 '얇은 가죽'을 뜻한다. 무두질한 가죽이 페르가모에서 최초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parchments'로 표기되는 양피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언급된 '멤브라나스'는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 가죽 위에 필사한 책'을 뜻한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가죽 종이는 파피루스에 비해 훨씬 비쌌기 때문에 대부분의 책들, 곧 일반적인 책에는 파피루스가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사도 바오로가 가져오기를 부탁한 '양피지 책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떤 학자는 이것을 재판을 대비하기 위한 로마 시민권 증명서라고 하기도 하며, 다른 학자들은 희랍어 구약 성경이나 주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을 수 있지만, 모두 추정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은 말년의 사도 바오로가 특별히 보기를 원한 귀중한 내용의 책임에는 틀림없다.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복음 (루카10,1-9)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1~3)
시나이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에는 제자들의 수가 70인으로 되어 있지만, 바티칸 사본과 베자 사본 등에는 72인으로 되어 있어 파견받은 사람의 수효를 확정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70이나 72라는 숫자는 문자적 의미 외에도 상징적이며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
70은 유대인들이 거룩한 수로 여기는 7에 충만한 수의 의미를 갖는 10이 곱하여진 숫자이다. 그리고 72는 12의 6배, 즉 12사도의 6배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당시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의 실제적인 수효임과 동시에 앞으로 모든 믿는 이들에 의해 온 세상에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임을 상징하는 의미도 지닌다(창세10장; 창세46,27; 민수11,16~25참고).
또한 루카 복음 10장 1절에 72인을 수식하고 있는 '다른'이라고 번역된 '헤테루스'(heterous)는 형용사로서 명백히 12명의 사도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둘씩 보내시며'에 해당하는 '아페스테일렌 아우투스 아나 뒤오'(apesteilen autous ana dyo; sent them two by two)에서 '보내시며'로 번역된 '아페스테일렌'(apesteilen)는 '파견하다'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apostello)의 부정과거형으로써 12사도의 파견 때에도 사용된 같은 단어이다(루카9,2).
이것은 보냄을 받는 72인의 제자들이 12사도와는 확실히 다른 별개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이유'나 '목적','권한'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둘씩'에 해당하는 '아나 뒤오'(ana dyo; two by two)의 의미는 아마도 서로 돕고 격려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마르6,7; 코헬렛4,9), 그들의 사명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기에,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 율법의 요구를(신명19,15; 민수35,30)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갑작스런 도래와 함께 그때 올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의 준엄함에 대해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루카12,12)고 말씀하셨다. 복음을 직접 전해 듣고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가진 고을들이 그렇지 못한 소돔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심판의 엄정성을 전제하고 급격하게 온다면, 시급하게 선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추수하는 행동은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모으는 종말론적인 과업을 뜻한다.
여기서 '수확'에 해당하는 '테리스모스'(therismos; harvest)는 '수확'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수확의 대상인 거두어 들여야 할 곡식 및 수확의 과정을 의미할 때도 사용된다. 무르익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수확은 농경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주제이다. 하지만 '수확'이란 예수님께 있어서 하느님의 나라의 여러 국면들을 설명하는 좋은 소재였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일 소지를 미리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확을 기다리는 완전한 무르익은 곡식과도 같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따라서 여기서의 예수님의 명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로 빨리 들어오게 하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루카 복음 10장 2절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 시급한 데 비해서, 이 일을 몸소 행할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안타까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이다. 또한 지금 파견을 받고 있는 일흔두 제자들의 책임이 중대하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다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인에게 또 다른 일꾼들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로 번역된 '데에테테'(deethete; ask; pray)는 단순히 '요청하다'는 의미 이상의 '기도하다', '간구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테오마이'(deomai)의 부정 과거 명령법으로서, '너희들은 간구하라'는 매우 간절하면서도 강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천국의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할 당시의 그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시는 주님의 안타까움이 묻어있는 말씀이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사실은 루카 복음 10장 3절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 10장 16절에는 제자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양'('프로바타'; probata)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여기서는 '어린 양'('아렌'; aren; lamb)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사가보다 이 단어를 통해 제자들의 '연약함'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양은 목자의 보호가 없으면 이리에게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짐승이다. 또한 '양'이 착한 것의 상징이라면, '이리'는 악한 것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양과 같은 제자들이 이리 떼와 같은 세상의 악한 세력들과 영적 싸움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가운데로'에 해당하는 '엔 메소'(en meso; among)라는 전치사구는 이미 그 자체로 '가운데'라는 뜻이 있는 '메소'(meso)와 '~안에'라는 뜻의 전치사 '엔'(en; in)이 결합되어 '한가운데 속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어린 양과 같이 연약하고 착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교하기 위해 험악하고 공격적인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복음 전파자들은 험하고 공격적인 세상 속에서 마땅히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태10,16).
<쓸데없는 일>송영진 모세 신부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과 거의 같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을 할 때에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수단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께만 의지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선교활동은 돈의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 가운데에는 없었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열두 제자와는 달리
일흔두 제자는 사회생활과 세속적인 인간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가르침을 특별히 더
추가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선교활동을 할 때에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전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특히 아는 사람, 친한 사람에게는 먼저 전해
주는 것이 옳지 않은가?
모르는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하라는 말인가?
길을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아는 척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당시에 그 지역에서는 길을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모든 가족과 친지의 안부를 묻고, 여러 가지 소식을 주고받았습니다.
짧게 인사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습니다.
(그것이 당시 그 지역의 풍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쓸데없는 일로 시간낭비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고 급한 일이기 때문에
세속적인
안부 인사로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전해 주는 것이 순서입니다.
가족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이웃과 친구와 친척에게...
또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여러
가지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이 말씀에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세속적인 친분과 인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뒤로 미룬다면,
그것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선교활동을
할 때의 지침이지만,
선교활동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는
생활입니다.
(다른 일에 한눈팔면 안 되는 생활입니다.)
예를 들면, 여가 시간에
하는 취미 활동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건전한 취미 활동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더욱
권장할 일입니다.
그러나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된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일 미사 참례는 의무니까 억지로
하고,
남은 시간은 모두 취미 활동에 쏟아 붓는다면,
또는 취미 활동이 주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기도생활은 취미 생활을 하고
남은 약간의 시간에만 한다면,
그것은 신앙인이 주일을 지키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취미생활 외에도 세속에서의
여러 가지 활동들도 모두
자기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를 잘 판단해서 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신앙인으로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정신이 어두워져 있고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감각이 없어진 그들은 자신을 방탕에 내맡겨
온갖 더러운 일을 탐욕스럽게 해 댑니다(에페
4,17-19).”
세상 사람들이 다 하고 있는
일이라고 해도,
신앙인으로서 하면 안 되는 일이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든지, 그냥 취미로 하는 일이든지
간에.)
신앙인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다.’ 라는 말에는 ‘성별(聖別)되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다르게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지금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또 그것이 나에게 주는 즐거움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라면,
그 즐거움은 일시적이고 허무한 쾌락일
뿐입니다.
그런 즐거움에 빠져 있는 것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인생을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지나고 나면 허무감만 느끼게 될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전력을 다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무슨 죄를 실제로
짓는 것은 아니더라도,
인생을 낭비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걱정과 격려, 희망이 뒤섞여 있습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는 예수님의 표현에는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사악한 세상에 아직 덜 익은 제자들을 보내는 예수님의 걱정 어린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는 말씀은, 행여 선교의 여정에서 내가 지닌 여유로움이나, 내 인맥의 편안함으로 인해 복음 선포의 간절함이나 절박함을 잃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기쁘게 맞이하는 이들에게 평화를 약속해 주시고, 제자들이 일에 대한 품삯을 정당하게 받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들에게 병자의 치유와 복음의 기쁨이 선포될 것이라는 희망의 격려도 잊지 않으십니다.
복음 선포의 열정을 끝까지 잃지 않은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도 이런 예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인간적인 부탁과 더불어, 선교를 방해하고 음해한 이들에 대한 인간적인 속상함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고백은,
그 모든 인간적인 실망과 좌절에도 복음을 전하는 기쁨이 주님께서 함께 계심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고통이 복음 선포를 완수하는 희생의 산 제물이 된다는 확신에 있음을 담대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용감하게 전하고 있습니까? 내 작은 희생과 자선, 이웃을 향한 미소와 손길까지도 신앙인의 향기를 내고 있는지 되돌아볼 일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