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간 금요일(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루카 11,15-26)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다고 한다. (갈라 3,7-14)
형제 여러분, 7 믿음으로 사는 이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알아야 합니다. 8 성경은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내다보고, “모든 민족들이 네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전해 주었습니다. 9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10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한결같이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니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율법은 믿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 규정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들로 살” 따름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4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이르러, 우리가 약속된 성령을 믿음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시편 111(110),1ㄴㄷㄹ-2.3-4.5-6(◎ 5ㄴ 참조)
◎ 주님은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 그 집회에서, 내 마음 다하여 찬송하리라.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그 일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치네. ◎
○ 그분 업적은 엄위롭고 존귀하네. 그분 의로움은 영원히 이어지네.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 ◎
○ 당신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시네. 위대하신 그 일들 당신 백성에게 알리시고, 민족들의 소유를 그들에게 주셨네. ◎
예수님께서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다고 하신다.(루카 11,15-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군중 15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24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25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26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연중 제27주간 금요일제1독서 (갈라3,7-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셨습니다.
성경에 "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3)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지적했듯이, 율법은 그 특성상 모든 율법 조항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온전히 지킬 것을 요구하는데,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결국 율법을
통해서는 그 누구도 살 수 없음을 반의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믿음을 가지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율법의 저주아래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3장 13절의 상반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로 번역된 '엑세고라센'(eksegorasen)의
원형 '엑사고라조'(eksagorazo)는 '되사다', 즉 '대가를 지불하여
타인의 지배에서 소유권을 되찾다', '몸값을 치르고 되찾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도록 우리를 '속량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우리에게 선포한 단죄의 판결과 그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대해(신명30,15.19; 요한3,36; 로마5,12; 에페2,3) 대가를 지불하심으로써,
우리를 되찾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대속(탈출21,30)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는데,
그 속전은 바로 무죄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피였다
(1코린6,20; 7,23; 묵시록5,9).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신 것이다.
이사야 예언서 53장 6절에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러한 사실이
이미 하느님의 깊으신 계획 가운데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신 것은 대속적인 것이며,
그를 믿는 자로 하여금 의로움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2코린5,21)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
신명기 21장 23절을 인용한 부분이다.
그런데 신명기는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로 표현하여 저주를 내리는 주체가 '하느님'임을 명확히 제시해
주고 있는 반면에, 본문에는 '하느님께'에 해당하는 '휘포 테우'
(hypo theu; LXX 70인역) 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결코 하느님에 의해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적인 생략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신명기의 인용구 자체가 직접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의 처형 방법은 로마 시대에 보편화된 것이며,
모세 당시에는 생소한 것이었다.
오히려 신명기는 형을 집행하고 난 뒤, 죄인의 시체를
기둥이나 나무에 매달게끔 되어있는 관습을 반영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시체의 매달림이 저주를 의미한다는
구약의 관습적 사상을 들어서, 나무에 달린 채 죽어가는 십자가 형벌은
두말할 나위없이 저주의 상징이 되기에 충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11,15-26)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0)
복음
'손가락'에 해당하는 '닥튈로'(daktylo; the finger)인데, '하느님의 손가락'은
하느님 자신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며(탈출8,19; 31,8; 신명9,10), 특히
하느님의 능력을 의미한다(시편8,4).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을 표시하기 위해서 더 흔하게 '하느님의 손'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탈출7,4.5; 9,3).
루카 복음 11장 20절과 병행되는 마태오 복음 12장 28절에는
'하느님의 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3,22; 4,1.18참조).
구약의 표현에 있어서 '하느님의 손'과 '하느님의 영'이 의미상 거의
동일하게 사용되었음을 볼 때(1역대28,12), 루카와 마태오 복음사가는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미 ~와 있는 것이다'로 번역된 '엡타센'(ephthasen; has come)은
'도달하다', '앞서오다'는 뜻이 있는 '프타노'(phthano)의 부정과거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는 그 시점에 이미 하느님의 권세가
사탄의 권세를 물리쳤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에페2,2) 가운데 하느님의 지배가
시작되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라면, 여기서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성취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해석이 기능한 또하나의 이유는 '너희에게'에 해당하는 '에프 휘마스'
(eph' hymas; to you)라는 표현이 미래의 청중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군중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사건은 단순한 구마 기적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 상징적 사건 중의 하나이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이 고백으로, 유다인 사회에서 조롱거리가 되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확신에 찬 믿음으로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민의식의 굴레에 갇힌 유다인들이 율법을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여긴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의로움을 얻는, 곧 의화(義化)의 영예를 얻게 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이야말로 만민을 향한 하느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체험하는 통로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은 교회 분열이라는 상처를 역사에 남겼지만, 자칫 전통과 제도의 율법적 굴레에 빠질 위험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킬 수 있게 해 주는 자극제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을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유다인들이 치부했던 이유는, 그들이 모든 병과 악의 근원인 마귀를 몰아낼 수 있는 힘을 한 인간인 예수님이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마귀를 몰아내는 권능을 지닌 예수님의 능력에 맞서려는 사탄의 세력에 믿음이 아닌, 인간의 나약한 의지로 맞서다 보면, 교만과 위선의 덫에 걸려 “더 악한 영 일곱”의 세력에 쉽게 무너지거나, 힘겨운 영적 투쟁을 해야 한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악의 세력이 갈수록 강해지는 우리 시대에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를 청하는 우리의 믿음의 힘이 더 절실한 이유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