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간 금요일]시중드는 여인들 (루카 8,1-3)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다며 부활을 강조한다.(1코린토 15,12-20)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3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15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정말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시편 17(16),1.6-7.8과 15(◎ 15ㄴ 참조)
◎ 주님, 저는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 주님, 의로운 사연을 들어 주소서. 제 부르짖음을 귀여겨들으소서. 거짓 없는 입술로 드리는 제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 ◎
○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놀라우신 당신 자애를 베푸소서. 당신 오른쪽으로 피신하는 이들을 적에게서 구해 주소서. ◎
○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
예수님께서는 고을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는데, 막달레나를 비롯해 여러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든다. (루카 8,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1코린15,12-20)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9-20)
우리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세를 믿지 않는 것이며 현세만을 위해 사는 것이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해 산다면, 희망이라는 것도 현세에서 끝나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일도 현세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 현세의 여러 가지 즐거움과 쾌락을 포기하고, 죄와 죄의 기회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고 있는 성도들은 어리석고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다.
우리의 자유를 시험하는 기간인 현세에서 절제와 포기와 극기의 삶을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은 우리 믿는 이들의 희망이 내세에 있고, 내세에서의 부활과 상급,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그런 희망들은 모두 거짓 희망이 되고 만다.
우리는 현제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종말론적인 심판과 구원, 상급에 대해 말씀하셨지, 현세에서의 불행이나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도 약속하신 적도 없으시다. 다만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의 현세적 삶을 보장해 준다는 말씀은 하셨다.
따라서 내세를 믿지 않고 현세에서의 행복만을 바라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8,1-3)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2~3)
루카 복음사가는 '여인들의 복음서'라고 불릴 만큼 여인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당시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매우 낮은 시대였기에 여인과 관계된 일은 언급을 회피하였고, 굳이 언급할 때는 익명으로 처리하였다.
하지만 루카 복음사가는 이런 통례를 따르지 않고, '몇몇 여자'('귀나이케스 티네스'; gynaikes tines)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하이'(hai)라는 관계 대명사를 사용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즉 그들은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를 비롯해서 많은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마리아'와 '요안나'에 대해서는 그들의 신상이 비교적 더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루카 복음사가가 6장 14~16절에서 제자들을 소개할 때 사용한 표현방식과 다르다. 제자들을 소개할 때 단지 이름만을 나열했던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을 섬기던 여자들을 소개할 때는 이름 뿐만 아니라 내력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활동이 당시 부와 권력, 또는 성(性)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루카 복음사가의 의도 때문이다.
한편, 루카 복음 8장 2절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막달레나'(Magdalene)라고도 불리웠는데, 이것은 '막달라 출신의 여자'라는 뜻이다. '막달라'(Magdala)는 갈릴래아 호수 서편, 티베리아 북쪽 약 4.8km에 위치한 성읍으로서 '하느님의 탑'(the tower of God)이라는 뜻이다.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는 일곱 마귀가 들려 오랫동안 고생하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고 예수님께 헌신한 인물이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어 무덤에 묻히실 때에도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마르15,47),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무덤까지 갔으며(마르16,1), 성경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먼저 목격한 영광스러운 증인으로 묘사한다(마르16,9).
주님께로부터 치유받은 은혜가 막달라 마리아의 가슴 속에 얼마나 크게 자리하였으면, 일생 동안의 삶을 통해 그토록 일관되게 헌신할수 있었겠는가? 막달라 마리아는 한 번 치유받은 감동과 감사를 잊지 않고, 남은 여생 전부를 자신을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해 주신 예수님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
이제 루카 복음 8장 3절에는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가 소개된다. '집사' 또는 '청지기'에 해당하는 '에피트로푸'(epitropu)의 원형 '에피트로포스'(epitropos)는 '돌보다' 또는 '위탁하다'는 의미를 지니는 동사 '에피트레포'(epitrepo)에서 유래하며 '어떤 것을 돌보도록 위탁받거나 그러한 영예를 얻은 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 단어가 관직 이름으로 쓰였으며, 헤로데 임금의 '행정 장관' 정도의 높은 직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고관의 아내 요안나는 8장 2절에 소개된 일곱 마귀들린 막달라 출신 마리아와 신분적으로 현격하게 구분된다.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많은 추종자들 가운데 특별히 이 두 여자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는 것은 아마도 가장 대표적으로 헌신한 여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 이면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데는 지위 고하, 신분의 귀천이 문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으로 섬기며 함께 협력하게 됨을 강조하려는 루카 복음사가의 의도가 있을 것이다.
'시중을 들었다'
희랍어에는 '시중들다', '섬기다' 또는 '봉사하다'는 뜻을 지니는 다양한 단어가 있다. '노예(종)로서의 맹목적 섬김'을 뜻하는 '둘류오'(duleuo), '자상하게 봉사함'을 뜻하는 '테라퓨오'(therapeuo), '급료를 벌기 위해 봉사함'을 의미하는 '라트류오'(latreuo), '공무에 봉사함'을 의미하는 '레이투르게오'(leiturgeo)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디아코네오'(diakoneo)는 특별히 '자원하여 봉사한다'는 기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나타나는 '데이코눈'(diekonun)은 '디아코네오'(diakoneo)의 미완료 형태로서, 여자들의 섬김은 자원하는 마음에 우러나온 희생적 봉사였으며,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었음을 드러낸다.
고대 순회 설교자들은 부유한 여자들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그러나 원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자신의 소유 중 일부를 떼어 아무런 대가없이 자원하여 지속적으로 섬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기 과시적으로 기분에 따라 일시적으로 재정적 도움을 준 일반적 경우들과 차원이 다르다. 복음의 여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재산은 자신의 배만 채우는것도, 자신의 명예를 드러내는 수단도 아니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되는 매우 가치있고 소중한 것이었다.
예수님과 열두 사도들은 복음 선교에 전념하시느라 생계 수단을 갖지 못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의해 구원받고 은혜받은 사람들의 재정적인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사도 바오로도 로마서 15장 2절에서 영적 은혜를 나누어 받은 자들은 그것을 나누어 준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것으로 돌볼 의무가 있다고 말하며, 갈라티아서 6장 6절에는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과 좋은 것을 모두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송영진 모세 신부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여기서 ‘시중을 들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일과 음식을 대접하는 일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고,
또 복음서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는 이야기(마태 12,1),
빵이 한 개밖에 없다고 제자들이 걱정했다는
이야기(마르 8,14-16)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여자들의 후원 덕분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풍족한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여자들은 각자 형편에 따라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수님과 사도들을 도와드렸던 것
같은데, 그것이 항상 넉넉하고 충분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굶게 되는
상황에서는 여자들도 함께 굶지 않았을까?)
어떻든 루카복음서 저자가 복음서에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은 ‘여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다녔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이 내용에
대해서,
“사도들은 전부 남자인데, 시중을 드는 사람은 전부 여자다.
이것은 남녀 차별이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이 내용은 차별이 아니라 역할이 구분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사람마다 다른 탈렌트를 받는 것은 차별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공평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에 여자들이 시중드는
것을 남자인 사도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다면,
또 여자들을 아랫사람처럼 대하면서 자기들은 윗사람인 것처럼 행세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 주님이신 분입니다.
신앙인은 자기를 ‘섬기는 주님’이신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윗사람도 없고 아랫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 섬기고 서로 시중을 들 뿐입니다.
(굳이 누가 더 높으냐고 묻는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시니 섬기는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말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남존여비나 남녀차별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시절의 여자들의 역할과 사도들이 교회를 다스리던 시절의 ‘일곱 봉사자’의 역할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3).”
사도들의 말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시절에 여자들이 했던 일을 기억해 내고 일곱 봉사자를 뽑은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복음 선포에 전념하고 여자들은 시중을 들던 모습과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념하고 일곱
봉사자는 식탁 봉사에 전념하는 모습이 많이 비슷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1코린 12,18-21).”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7).”
또 교회 공동체를 건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에페
2,20-21).”
‘몸’으로 표현하든지
‘건물’로 표현하든지 간에
교회 공동체 안에는 필요 없는 사람도 없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필요하고, 모두가
다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시중을 들면서 따라다녔던 여자들도 공동체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한
일들도 중요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만큼이나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일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비하해도 안 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작은
일들이 모여서 하느님 나라 건설이라는 큰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공염불에 불과하며 복음 선포의 원동력이 없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비슷하게 되며 천상 인간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 하느님의 생명이 인류 안에 부어져 새롭게 창조되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실 때 여인들이 뒷바라지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듣고 변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에는 악령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구원받은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고, 자신들의 재산과 재능을 구원 사업을 위해 봉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의 헌신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교회 공동체 안에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성 고르넬리오 교황님은 가톨릭 교회의 초기 박해 시대에 신앙을 저버린 신자들을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고 화해시킨 분입니다.
초기 교회의 이단으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고 그리스도 안에 일치된 공동체를 이루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성 치프리아노 주교는 라틴 문학에 정통하였으며 성체성사 안에 하나로 일치한 교회의 모습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도 두 분을 본받아 교회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뒷바라지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