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간 토요일]탈렌트의 비유 (마태 25,14-30)
(성녀 모니카 기념일)
모니카 성녀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로, 332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오늘의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그녀는 남편을 개종시키고, 방탕한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된 데에는 어머니 모니카의 남다른 기도와 노력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회개의 길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387년 로마 근처의 오스티아에서 선종하였다. 모니카 성녀는 그리스도교의 훌륭한 어머니의 모범으로서 많은 공경을 받고 있다.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6-31
26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28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29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31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14-3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16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17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19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2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성녀 모니카 기념일 제1독서 (1코린1,26-31)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28~29)
코린토1서 1장 27절과 28절에는 완전히 상반되는 대조적 표현이
선명하게 대구를 이루고 있다.
우선 27절에는 '지혜로운 자들'과 '어리석은 것',
그리고 '강한 것'과 '약한 것'이 각각 대조되고 있다.
그리고 28절에서는 '비천한 것'과'천대받는 것',
'없는 것'과 '있는 것'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반복 대구법을 사용한 문장 기교는 코린토 교인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고자 하는 사도 바오로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앞의 27절의 내용을 이어받아 28절에서도, 코린토 교회가 세상에서
비천하고 천대받고 없는 자들로 구성된 교회라고 지적하면서, 아울러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선택하셔서 '있는 것들'('타 온타'; 'ta onta'; the things that are)을
무력하게 만드신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무력하게 만드시려고'로 번역된 '카타르게세'(katargese)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치게 하다', '끝내다'라는 뜻을 지닌 '카타르게오'
(katargeo)의 가정법으로서 목적절을 이끄는 접속사 '히나'(hina)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비천하고 천대받고 없는 것들을 택하신 목적을 나타낸다.
한마디로 그것은 있는 자들, 유력한 자들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고,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신분 따위는 구원을 얻는 데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역사 가운데서도 실증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신명7,7)
그분이 보내신 독생성자 예수님께서도 당시 종교 율법적인 사회에서
소외되고 단죄받던 세리들과 죄인들을 선택하셨다.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무시하는 인간의 교만을 깨뜨리셨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전혀 무능력한 존재들, 곧 인간의
시각으로는 마치 없는 것 같이 무가치해 보이는 자들을 선택하셔서
스스로 능력있다고 여기는 교만한 자들을 무력화 시켰던 것이다.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과 유능한 자들과 가문 좋은 자들은 앞의 27절에서
'부끄럽게 하시려고'란 표현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미 하느님께서
사회적으로 그들보다 못한 자들을 부르신 사건들을 통하여 굴욕을 당했다.
그러나 28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제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굴욕을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력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무력하게 만들다'는 말은 종국적인 멸망의 심판의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는 말로서, 결국에는 그들이 영원히 멸망을 받아
구세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29)
'이것은 ~ 하게 하셨습니다' 로 번역된 '호포스'(hopos)는 '~하기 위하여',
'~할 목적으로'(so that ~may)라는 뜻을 지닌 접속사로서, 29절이
앞의 26~28절에서 언급한 하느님의 선택하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나타낸다.
여기서 '자랑하지'로 번역된 '카우케세타이'(kauchesetai)는
'자랑하다'라는 뜻을 지닌 '카우카오마이'(kauchaomai)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동사를 부정하는 부정어 '메'(me; no)와 더불어 사용되어 어떠한 자랑도
있을 수 없음을 명확히 밝혀준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인간도'에 해당하는 '파사 사륵스'(pasa sarx)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도 예외없이' 란 의미이다.
26절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코린토 교인들은 인간적으로 보잘것 없는 처지
가운데서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랑을 일삼으며,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었다(1코린1,12; 3,21).
자신들이 받은 은사들을 잘못 평가하여 이것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영적 교만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코린토 교인들이 이런 오류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그들 자신의 겉모습이나 지혜와 능력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주도적 부르심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
그리고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거리끼거나 미천하게 여기는
십자가라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이다.
코린토 교인들은 철저하게 사람들과 사람들의 세상적 지혜를 자랑했다
(1코린3,21; 4,7; 2코린10,17).
이러한 형태가 바로 '코린토 교회 내부에서' 횡행했던 것이다.
그들은 세상과 동일하게 세상의 인본주의적 지혜를 자랑하고,
그런 지혜를 기준으로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던
복음 증거자들을 평가함으로써 교회내의 분열과 분쟁을 유발시켰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당면 문제에 대해서 인간의 지혜와 질적으로 다른
하느님의 탁월한 지혜를 제시하고, 그 지혜가 사실상 세상의 지혜를
무효화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코린토 교인들의 잘못된 사고 방식을
교정하고자 한 것이다.
코린토 교인들은 하느님 앞에서(before)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in) 자랑해야만 한다(1코린1,31).
토요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 복음 (마태25,14-30)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5~29)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주인에 대한 잘못된 지식으로 주인을 두려워했다.
그는 받은 탈렌트에 대한 상실의 두려움과 투자로 인한 실패의 두려움을 가진 채,
주인에게서 받은 자본금을 투자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를 가진 그에게 남은 것은 자본금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 돈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기라도 했더라면, 거기에서 이자라도
얻을 수 있었을텐데, 그는 이자 한 푼 얻을 수 없는 땅에 그 돈을 숨겨 두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원금을 보존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도 나중에 빼앗겨 버리고 만다.
그는 25절에서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라고 말한다.
여기서 '도로 받으십시오'로 번역된 '에케이스'(echeis; here you have)는
'가지다', '소유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에코'(echo)의 현재 2인칭 단수 동사로서
'당신이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당신의 것을 당신이 가지고 있는데, 무슨 불평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라는 뉘앙스를 주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주인이 결코 손해 본 것이 아니라는 변명을 통해
자신의 무책임과 잘못을 덮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주인의 기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마구 내뱉은
무책임하고 무례한 표현이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면책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악하고'로 번역된 '포네레'(ponere; wicked)의 원형 '포네로스'(poneros)는
'도덕적으로 사악한'이라는 의미외에도 '고통과 괴로움을 일으키는'이라는
의미(묵시16,2)를 지닌 형용사인데, 종이 나쁜 관리인 정신을 가졌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로 인해 주인에게 괴로움을 끼쳤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더군다나 그는 '게으른' 종이었다.
여기서 '게으른'으로 번역된 '오크네레'(oknere; slothful; lazy)의 원형
'오크네로스'(okneros)는 진보가 늦고 지체되며 나태한 상태를 의미하는 형용사이다.
그러니까 이 게으른 종은 일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주인이 기대한 진보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여기서 '돈'으로 번역된 '아르귀리아'(argyria; money)의 원형 '아르귀리온'
(argyrion)은 '은'(silver)을 의미하는 명사 '아르귀로스'(argyros)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은전', '은조각'을 의미한다(사도3,6; 루카19,23).
그 당시 화폐는 주로 은전이었는데, 주인은 그 은전으로 된 탈렌트를
'대금업자들에게' 맡겨두었다가 이자를 받게 해야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대금업자들'로 번역된 '트라페지타이스'(trapezitais)의 원형
'트라페지테스'(trapezites)는 수수료를 받고 돈을 교환해 주거나
고객의 예탁금을 보관한 후 이자를 지불하는 사람, 즉 '환전상'이나 '은행가'를 뜻한다.
또한, 여기서 '돈'으로 번역된 단어와 '대금업자들'로 번역된 단어 둘 다
복수형으로 쓰였으므로, 주인이 한 탈렌트나 되는 많은 돈을
여러 대금업자들에게 분산 투자했기를 내심 바랐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탈렌트'에 해당하는 '탈란타'(talanta; talents)의 원형
'탈란톤'(talanton)은 원래 중량을 다는 '천칭', '저울'이라는 뜻의 단어였지만,
중량의 측정 단위와 화폐 단위로 발전했다.
탈렌트는 무게로는 약 34kg에 해당하며(탈출38,25),
돈으로는 6,000 데나리온의 가치에 해당된다.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 데나리온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1탈렌트는 노동자가 약 20년 동안 벌어야 하는 거액이었다.
그리고 영어에서 '재능'을 의미하는 'talent'라는 단어가 희랍어 '탈란타'에서
유래한 것이며, 여기서의 '탈란타'는 '재능'보다는 '사명'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이자'로 번역된 '토코'(toko; interest; usury)의 원형 '토코스'(tokos)는
'산출하다', '낳다'를 의미하는 동사 '티토'(tit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원래 '출산된 것'이라는 뜻이다.
돈의 이자를 '토코스'(tokos)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은
원금에서 증식되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이자율은 연리 8%에서 48%의 고리(高利)까지 다양했다.
구약의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돈을 빌려주더라도
이자를 받지 못하게 규정했지만(신명23,19), 타국인과의 거래에서는
이자를 받아도 된다고 하였다(신명23,20).
하지만 신약 시대에는 동족간의 거래에서도 이자를 받는 일이
거의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상황을 예로 들어 '이자' 이야기를 한 것이며,
동족간 돈 거래에 있어서 이자를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또한, '돌려받았을 것이다'로 번역된 '에코미사멘 안'(ekomisamen an)은
현재의 의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루지 못한 과거의 사실에 대하여
아쉬워하는 의미로 '받았어야 했다'(should have received)는 뜻이다.
그러니까 실제는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에게서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겠다'
이 구절의 선언은 한 탈렌트를 받았던 종이 악하고 게을러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데 대한 응당의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종은 적극적으로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혹한 징계를 받게 된 것이다.
또한 이 구절은 주인이 원래 의도했던 목적이 악하고 게으른 종에 의해
실현되지 않았어도, 그 목적을 다른 방법을 통해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사명을 성실하게 잘 완수한 자에게는 당연한 보상 외에 또 다른
기대치 않았던 보상을 더해 준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부조리한 현상 가운데
하나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옹호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28절의 징계적 선언이 주인의 자의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영적인 원리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마르4,25).
마태오 복음 25장 14~30절의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다.
각 종들에게 맡겨진 탈렌트는 그들에게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적당한 양이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하기에 알맞은 탈렌트를 맡기신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받은 사명과 재능과 은사가 다른 사람들의 그것에 비해
적든 많든, 자기비하나 열등감에 빠지거나 교만해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1코린15,41).
하지만, 우리는 때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 이상의 어떤 열매를 원하신다고
잘못 판단해 버리고, 하느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를 사용한번 해보지 못하고 묵혀두지는 않는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능력 이상의 결과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그에게 부여된 봉사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활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그의 은혜가 넘쳐나며
그의 심령도 성령충만으로 부요해질 것이지만,
반대로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그에게 주어진 봉사의 기회를
하찮은 것이라고 무시하며 활용하지 않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그 은사를 상실해 가며, 더 이상 영적인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전락해 간다는 것이다
<탈렌트의 비유>송영진 모세 신부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4-15).”
‘각자의 능력에 따라’ 라는
말은,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여건이 다른,
인간 세상의 현실을 나타냅니다.
(지금은 불공평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인데,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든 불공평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탈렌트를 다르게
준 것은,
종들을 공평하게 대우한 것입니다.
1) 여기서 주인이 종들에게
탈렌트를 준 것은 ‘임무’를 맡긴 것입니다.
보통 ‘탈렌트’ 라는 말은 은총, 재능 등으로 번역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총과
재능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일하라고 임무를 주신 것입니다.
그 ‘일’은 하느님 나라 건설, 사랑 실천
등입니다.
따라서 남들보다 더 많은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더 큰 임무를 받은 사람입니다.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종은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다가 그대로 도로 반납합니다.
그가 남들보다 더 적은 탈렌트를 받았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 종의 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편안함만
추구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주인은 그를 ‘쓸모없는
종’이라고 부릅니다(마태 25,30).
‘쓸모’ 라는 말에서 소금에 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세 번째 종은 ‘쓸모없는’ 소금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를 ‘바깥 어둠 속으로’ 쫓아냅니다(마태
25,30).
‘바깥 어둠 속’은 ‘하느님 나라의 밖’입니다.
즉 그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2) 종들이 탈렌트를 받은
일을 교회의 직무를 맡은 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는 여러 가지 직무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어떤 자리는 높은
자리로, 어떤 자리는 낮은 자리로,
또 좀 더 중요한 직무로, 또는 덜 중요한 직무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다 똑같이 중요하고
귀합니다.
하나의 공동체로서 하느님 나라 건설이라는 일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도 세 번째 종의 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직무를 맡겼는데,
자신의 편안함만 추구하고 직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또는 권한 행사만 하고
‘섬김’은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교회 공동체 전체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직무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안 해도 다른 사람이 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아무 일도 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그 일을
하겠지만, 그 자신은 맡고 있는 직무를 잃게 될 것입니다.)
3) 종들이 탈렌트를 받은
일을,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남들보다 더 많은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남들보다 더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가 그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주신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른 십자가를 주신 것입니다.
이 경우에 세 번째 종의 죄는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거부한 죄입니다.
십자가가 너무 무겁고
힘들다고 생각해서, 또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또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보다 더 크고 무겁다고, 즉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거부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는 것은
그 자신이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하는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이나 ‘괴로운 일’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최종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목적지가 아니라
중간 경유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목적지로 직행할 수는 없는 생활입니다.
4) 종들이 탈렌트를 받은
일을 ‘성령의 은사’를 받은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각자의 능력에 따라’ 탈렌트를 다르게 받은 일은,
사람마다 다른
은사를 받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1코린 12,11).”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이
주인에게서 받은 탈렌트를 활용하여
더 많은 탈렌트를 번 일은(마태 25,16-17),
신앙인이 자기가 받은 은사를
활용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한 것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종이 탈렌트를 땅에 숨긴
일은,
성령의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나타냅니다.
쓸모 있는 일꾼이 되라고 하느님께서 은사를
주셨는데도
그 자신이 스스로 쓸모없는 일꾼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쓸모없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쓸모없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