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간 금요일]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마태 19,3-12)

2016. 8. 12. 오전 5: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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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간 금요일]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마태 19,3-12)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나던 날부터 보살펴 주셨는데 그들은 불륜을 저질렀다며, 그래도 계약을 생각해 용서하겠다는 말씀을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리신다.(에제 16,1-15.60.63)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예루살렘에게 자기가 저지른 역겨운 짓들을 알려 주어라. 3 너는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예루살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의 혈통과 태생으로 말하자면, 너는 가나안 땅 출신이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고 너의 어머니는 히타이트 여자다.
4 네가 태어난 일을 말하자면, 네가 나던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잘라 주지 않고, 물로 네 몸을 깨끗이 씻어 주지 않았으며, 아무도 네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 않고 포대기로 싸 주지 않았다.
5 너를 애처롭게 보아서, 동정심으로 이런 일을 하나라도 해 주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네가 나던 날, 너를 싫어하여 들판에 던져 버렸다.
6 그때에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살아남아라!′ 하고 말하였다. 7 그러고 나서 너를 들의 풀처럼 자라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서 꽃다운 나이에 이르렀다.
젖가슴은 또렷이 드러나고 털도 다 자랐다. 그러나 너는 아직도 벌거벗은 알몸뚱이였다.
8 그때에 내가 다시 네 곁을 지나가다가 보니, 너는 사랑의 때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옷자락을 펼쳐 네 알몸을 덮어 주었다. 나는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리하여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
9 나는 너를 물로 씻어 주고 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돌고래 가죽신을 신겨 주었고, 아마포 띠를 매어 주고 비단으로 너를 덮어 주었으며, 11 장신구로 치장해 주었다.
두 팔에는 팔찌를, 목에는 목걸이를 걸어 주고, 12 코에는 코걸이를, 두 귀에는 귀걸이를 달아 주었으며, 머리에는 화려한 면류관을 씌워 주었다.
13 이렇게 너는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아마포 옷과 비단옷과 수놓은 옷을 입고서, 고운 곡식 가루 음식과 꿀과 기름을 먹었다. 너는 더욱더 아름다워져 왕비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14 네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명성이 민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던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5 그런데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네 명성에 힘입어 불륜을 저질렀다. 지나가는 아무하고나 마구 불륜을 저질렀다.
60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63 이는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이사 12,2-3.4ㄴㄷㄹ.5-6(◎ 1ㄹ 참조)
◎ 주님은 분노를 거두시고 저를 위로하셨나이다.
○ “보라, 내 구원의 하느님. 나는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해 주셨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을 민족들에게 알리고, 높으신 그 이름을 선포하여라. ◎
○ 위업을 이루신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이 하신 일 온 세상에 알려라. 시온 사람들아, 기뻐하며 외쳐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 ◎


예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냐고 묻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마태 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제1독서 (에제16,1-15.60.63) 

'그런데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네 명성에 힘입어 불륜을 저질렀다.  지나가는 아무하고나 마구 불륜을 저질렀다.'(15) 

앞선 1~14절은 타락한 선민의 징계와 회복의 전과정을 조망하는 일련의 비유인 1~63절의 전반부이다. 여기서는 버려진 신생아처럼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이스라엘을 구하시고, 아름답게 키워 단장하시며, 왕후로 삼으셨던 주님의 은혜를 회상하였다. 

이제 이어지는 15~52절은 본장 중반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전반부의 긍정적인 내용과 달리 아주 부정적인 내용을 다룬다. 15~34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의 전적인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이에 보답하기는 커녕 그 은혜로운 결과를 악용하여, 남편되신 주님을 배반하는 가증스러운 일, 주님 보시기에 실로 구역질이 날만한 각종 더러운 죄악을 다른 이방 사람들 및 그 종교들과 결탁하여 범했다는 사실 다양한 비유로 매우 상세하게 진술한다. 

여기서 '그런데 너는 ~믿고'에 해당하는 '왓티브테히'(wathibtehi)의 원형 '빠타흐'(batah)는  어떤 대상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로 인해 안정감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들이 믿는 대상은 바로 '네 아름다움'이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을 존귀한 존재로 삼아주신 주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아름다움과 명성을 의지하여 주님을 저버리는 배신의 죄악을 범했다.

그들은 자신에게 궁핍과 곤란을 겪던 자리에서 풍요와 번영을 누리는 자리로 옮겨 주시고, 수치와 굴욕의 자리에서 아름다움과 명성을 누리는 자리로 옮겨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기 보다  그들 자신으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를 맹신하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누리는 은혜의 결과물들로 인해, 하느님을 의지하는 자리에서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본문에서 '불륜을 저지르다' 해당하는 '왓티즈니'(wathizni)의 원형'자나'(zana)문자 그대로  유부녀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더불어, 또는 창녀가 남자와 더불어 간음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여기서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어, 이스라엘 자손이 남편되신 주님을 저버리고, 이방의 신들을 끌어들여, 그 신들을 남편처럼 떠받들고 의지하는 죄를 범하였음을 나타낸다. 

주님께서는 비천한 이스라엘에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자기 소유로 삼으셨지만(8절), 그들은 주님께 속하기를 거부하고 이방 민족처럼 되기를 바라며, 이방 민족과 교류하며, 그들이 섬기는 허망한 신들을 섬기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본문에서 '지나가는 아무하고나'에 해당하는 '콜 오베르'(kol ober)는  이스라엘에 큰 관심을 갖지도 않는 이방 사람들 혹은 그들의 우상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관심도 없이 그 주변을 지나갔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매혹되어 그들과 더불어 영적 간음을 저질렀음을 말하고 있다. 실로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우상과 무차별적인 영적 간음(불륜)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60) 

앞선 56~59절에서는 맹세를 멸시하고 계약을 배반한 예루살렘을 징벌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하실 것임을 강조했다. 이제 이어지는 60~63절은  주님께서 예루살렘과 영원한 계약을 세울 것을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은 과거 어렸을때 맺었던 계약을 잊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를 철저히 배반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과 어렸을 때 맺으셨던 계약을 기억하고, 또한 당신의 은혜를 근거하여, 그들과 전혀 새로운 영원한 계약을 맺어, 그들을 새로운 백성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의 어렸을 때에 맺으셨던 계약은 사실상 8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혼인 계약이며, 이는 역사적 시각으로 볼 때, 시나이 계약(탈출19,5.6)이라 할 수 있다. 이 계약이 구원사적 발전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과 하느님께서 새롭게 맺으시는 계약으로 발전된다(1베드2,9).

 한편, '나는~기억하고' 해당하는 '웨자카르티  아니'(wezakarthi ani)22절과 43절에서  예루살렘이 과거 어렸을 때의 비참한 상황 및, 바로 그때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않았다고 한 진술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과거 자신들의 본래 상태와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며, 심지어 과거 하느님앞에 행한 맹세를 저버린 예루살렘은 계약을 배반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과거를 기억하시며 결코 이를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 새로운 계약을 세우시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소개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에는 '나는'에 해당하는 '아니'(ani)라는 단어가 강조되어 있다. 즉 앞선 59절까지는 이스라엘과 그들의 태도, 그들에 대한 심판에 강조를 두었다면, 이제 본절 이하에서는 주 하느님 자신과 하느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해 시각을 돌려 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영원한 계약'에 해당하는 '뻬리트 올람'(berith ollam)계약의 효력이 영원히 변치 않고 지속됨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에제키엘서에는 본절 외에 37장 26절 또 다시 나타난다. 

그곳 문맥에서 제시되는 영원한 계약은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무덤에서 나오게 한 후, 그들에게 새 영을 주어 살게 하신 다음, 그들에게 다윗이라는 이름의 왕을 세워 그들의 목자가 되게 하고, 주님의 법규와 규정을 지키게 할 것이며, 그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제후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세우는 이 영원한 계약은 곧 '평화의 계약'으로 설명된다.  그 문맥에서 다윗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다윗의 계보에서 태어나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내어 놓으심으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가져 오시고(로마5,1.10), 그들과 당신 피로 세운 새로운 계약을 맺어(마태26,28), 영원히 그들을 통치하는 왕이 되실 것이다(필리2,9-11).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이 영원한 계약에 대해 예언한 바 있는데, 그 계약은 주님께서 과거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맺은 계약, 곧 돌판에 새겨져 계약궤 안에  넣어 두지 않고, 그 법을 그들의 가슴에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새겨 주어, 하느님께서 그들의 하느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계약으로 제시된다(예레 31, 31-33; 33,38-40).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19,3-12)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8)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11ㄴ)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12) 

마태오 복음 19장 8절에서 '너희'라는 복수 2인칭 대명사가 원문에는 세 번 나오는데, 모세 율법을 들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폄하하려는 소위 선민이라는 '너희'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의 피폐함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영적 피폐함은 '마음이 완고하기'로 번역된 '스클레로카르디안'(sklerokardian; hearts were hard)이라는 단어에서 드러난다.
이 단어의 원형 '스클레로카르디아'(sklerokardia)는 '딱딱한', '거친', '엄한', '잔인한' 등의 뜻이 있는 '스클레로스'(skleros)'마음'이란 뜻을 가진 '카르디아' (kardia)의 합성어로서 '완고한 마음', '냉담한 마음', '잔혹한 마음'을 뜻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처럼 완고하고 잔혹한 마음을 품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내를 내어쫓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책으로 이혼을 하려면 최소한 이혼증서만은 반드시 써주라고 하셨던 것이다.
당시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했던 근동에서 여자들은 남자들로부터 소유물의 일부처럼 취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이 마땅히 종사할 직업도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남자들의 일방적인 횡포에 의해 이혼당한 여자가 다시 결혼하지 못하면,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폐단을 막고 이혼당한 여자도 최소한 다시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 갖도록 하기 위해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 율법은 바리사이들이 주장하듯이 이혼을 합법화하기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무분별한 이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며, 법 제정의 동기로 볼 때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할 수 있는 여성에 대한 보호법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율법의 대가들이었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던 실정법이라고 할 수 있는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공격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창조의 원리와 근본에서부터 점검되어야 하는 법 제정의 정신을 밝힘으로써 이것을 비판하신다.
인간이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려 죄를 짓고 타락하기 전에 에덴 동산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혼인법에는 둘이 완전히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는 내용 (창세2,24)만 나올 뿐, 이혼은 그 가능성 조차도 비치지 않는다.  

하지만 후대에 인간의 타락 이후에, 이혼 문제에 있어서의 일방적인 여성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약자 보호 차원에서 이혼 문제를 거론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락한 사회를 전제로 한 방편적인 이 법을 절대화시키려는 바리사이들의 시도는 혼인의 신성함을 전제로 한 하느님의 혼인법을 뒤엎을 수는 없는 것이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여기서 '허락된'으로 번역된 '데도타이'(dedotai; it has been given)'주다'라는 뜻을 지니는 '디도미'(didomi)의 완료 수동형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과거에 그렇게 타고난 것을 계속 유지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혼인 생활의 번거로움 때문에 오히려 독신 생활을 선택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독신은 인간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밝히신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19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독신으로 지낼 수 있는 세 가지 경우를 말씀하신다.
선천적인 성불구자와 궁중의 내시나 이교 사원에서 거세되어 바쳐진 자와 같이 후천적으로 성불구자가 된 자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의도적으로 독신으로 지내는 경우를 말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특별한 경우이기에, 독신은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에 해당하는 '호 뒤나메노스 코레인 코레이토'(ho dynamenos chorein choreito; the one who is able to receive it let him receive it)에서 '들일 수 있는'으로 번역한 '뒤나메노스'(dynamenos)의 원형 '뒤나마이'(dynamai)는 '~할 수 있다',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할 수 없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또한 '이 말을 받아'에 해당하는 '코레인'(chorein)'받아들여라'에 해당하는 '코레이토'(choreito)의 원형'도달하다', '차지하다'는 뜻이 있는 '코레오'(choreo)이다. 이것도 역시 독신이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자가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자도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도달할 능력이 있는 자만 도달하라'는 명령으로서 독신은 인위적인 강요로 되어지는 일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송영진 모세 신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이 말씀은, ‘혼인’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고, ‘이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인간들이 마음대로 부정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인간들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일을 ‘사람의 일’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한 일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라고, 즉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일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인간들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말씀을, “하느님께서 결정하신 일을 사람이 마음대로 취소하거나 변경하거나 번복하거나 무효화시킬 수 없다.” 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혼인성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사에 대한 대원칙이 됩니다.


세례성사의 경우, 인간들은 자기가 종교와 신앙을 선택하고, 자기가 결정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사실은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뽑으셨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세례성사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해서 받은 세례이기 때문에 자기가 취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신앙을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성사는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세례대장은 세상 종말 때까지 영구 보존됩니다.)
한 번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한다고 해도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일 자체가, 또 사람의 목숨 자체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도, 자기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도 모두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마음대로 갈라놓는 일이 됩니다.)


고해성사의 경우,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받은 일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한 번 고해성사를 본 죄로 다시 고해성사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제대로 회개하지 않은 채로 고해성사를 보는 경우도 있고, 무거운 죄를 감추고 가벼운 죄만 고백하는 경우도 있을 텐데, 그런 ‘모고해’는 고해성사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고해성사가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 더 이상 시비를 걸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으니 인간들도 용서해야 합니다.
만일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결정하신 일을 사람이 마음대로 취소하려고 하는 죄가 됩니다.


신품성사의 경우, 한 번 신품성사를 받으면 취소되거나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환속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직무가 정지되는 것이지 성사가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처음 서약할 때에는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살겠다고 결심했더라도 나중에 마음이 변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서약을 취소하고 싶겠지만, 취소할 수 없습니다.

세례 때의 서약이나 혼인 때의 서약이나 신품성사 때의 서약은, 하느님께 서원한 일이기 때문에 모두 다 ‘하느님의 일’입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취소할 수 없는 서약입니다.


“내 입으로 한 말인데 내가 취소할 수 없나?” 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약속의 상대가 하느님이기 때문에 취소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히 절대 불변이신 분입니다.
마음대로 약속하고 마음대로 취소한다면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서약할 때에는 분명히 진심으로 했지만, 살다보면 서약을 지킬 수 없는 때가 있다.”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안 지킨 것과 못 지킨 것은 구분되지만, 서약을 지킬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세례 때의 서약의 경우, 종교박해가 불가항력적인 일이 될까?
신앙과 목숨을 맞바꾼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세례 때의 서약을 지킬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경우란 없습니다.
죽어도 믿음을 지키겠다는 것이 세례 때의 서약입니다.
(신품성사 때의 서약도 ‘죽어도’ 지키겠다는 서약입니다.)


혼인 서약은 ‘죽어도’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입니다.
(배우자가 죽으면 서약에서 풀리게 됩니다.)
그런데 혼인 서약의 상대는 하느님과 배우자입니다.
배우자가 서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나?
우리는 이혼을 한 사람과 이혼을 당한 사람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하지만, 그래도 이쪽의 서약은 살아 있습니다.
배우자가 서약을 깼다고 해서 이쪽에 깰 권한이 생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혼 불가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이혼을 당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바오로 사도의 말이 하나의 해결책이 됩니다.
“혼인한 이들에게 분부합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분부하시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일 헤어졌으면 혼자 지내든가 남편과 화해해야 합니다(1코린 7,10-11).” (이 말은 아내들에게 한 말이지만, 남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아니라 내가 말합니다.
어떤 형제에게 신자 아닌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가 계속 남편과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 그러나 신자 아닌 쪽에서 헤어지겠다면 헤어지십시오(1코린 7,12-15).”
(이 말은 혼인보다 신앙이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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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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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승천 대축일]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 (루카 1,39-56)16.08.15조회 48[연중 제19주간 토요일]어린이 (마태오 19,13-15)16.08.13조회 87[연중 제19주간 금요일]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마태 19,3-12)16.08.12조회 87[연중 제19주간 금요일 ] 용서 (마태 18,21─19,1)16.08.11조회 84[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밀알 한알.(요한 12,24-26)16.08.10조회 84[연중 제19주간 화요일]작은 이 (마태 18,1-5.10.12-14)16.08.09조회 85[연중 제19주간 월요일]성전 세 (마태 17,22-27)16.08.08조회 49[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루카 9,28ㄴ-36)16.08.06조회 50[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마태16,24-28)16.08.05조회 53[연중 제18주간 목요일]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오 16,13-23)16.08.04조회 53[연중 제18주간 수요일]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15,21-28)16.08.03조회 49[연중 제18주간 화요일] 물위를 걸으시다 (마태오 14,22-36)16.08.02조회 52[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오병이어의 기적 (마태14,13-21)16.08.01조회 49[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예수님의 소문 (마태오 14,1-12)16.07.30조회 49[성녀 마르타 기념일]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19-27)16.07.29조회 46[연중 제17주간 목요일]그물의 비유 (마태 13,47-53)16.07.28조회 47[연중 제17주간 수요일] 올인 (마태 13,44-46)16.07.27조회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