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간 목요일]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오 16,13-23)

주님께서는 계약을 깨뜨린 이스라엘과 새 계약을 맺으시리라고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한다. (예레미야 31,31-34)
31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32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주님의 말씀이다. 33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34 그때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물음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시라고 대답한 베드로에게, 네 위에 교회를 세우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신다.(마태오 16,13-23)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8월 4일 목요일 제1독서 (예레31,31-34)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32~33)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주님의 말씀이다.'(32)
본절은 주님께서 그가 선택하신 계약 백성과 새롭게 맺으실 새 계약(신약)이 과거 모세 시대에 맺은 옛 계약(구약)과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면서 주로 옛 계약의 불완전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본절에서 '손을 잡고'에 해당하는 '헤헤지키 베야담'(heheziqi beyadam)은 주님께서 과거 선민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순전히 당신의 주권으로 그 일을 이루셨음을 강조한다. 이것을 원문의 뉘앙스를 고려해서 다시 번역하면, '내가 그들의 손을 강하게 붙잡고'라는 의미가 된다.
이와 동일한 표현이 창세기 19장 16절에도 제시되는데, 롯이 멸망하는 소돔성에서 속히 나가지 않고 지체하며 머뭇거리자 주님의 천사들이 그들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을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인 행동을 출애굽과정에서 세 번 보여주셨다.
한번은 그 일을 수행치 못하겠다고 고집하는 모세의 의지를 꺾어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그 사명을 수행하게 하는 과정에서(탈출4,13~16),
다른 한번은 모세가 그 일을 행하면서 자기 동족들로부터의 반대와 저항을 받게 되었을 때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과정에서(탈출5,21~23; 6,1),
그리고 나머지 한번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직면한 선민 이스라엘에게 홍해를 기적적으로 열어 주시는 과정에서(탈출14,10~25) 그렇게 하였다.
이러한 세 번의 사건은 주님께서 이집트에서 나오지 않고 그 안에서 안주하려고 하는 나약한 성향을 가지고 있던 선민 이스라엘의 '손을 강하게 붙들고', 오로지 당신의 주권으로 그들을 이끌어 구원해 내셨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큰 은혜를 베푸신 후에 그들과 계약을 맺으셨지만, 그들은 이것을 깨뜨렸다. 이것은 인간의 사악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역사가 오로지 반역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본문은 옛 계약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옛 계약의 대상인 선민 이스라엘은 그것을 지킬 능력도 없었고 의지도 부족하였다. 옛 계약은 모세 계약(탈출19~24장)으로 대표되는데, 그들은 계약을 체결함에 있어 흘렸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주 하느님을 배반하는 행동을 보이고 말았다(탈출32,1~35).
본문에서 '내가'에 해당하는 단어 '아노키'(anoki)가 사용되어 주어를 강조하고 있다. 즉 선민 이스라엘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 당신의 절대 주권에 입각해 구원해 내시고 그들과 계약을 체결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그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그들의 계약 파기에 대한 책임이 더 크게 부각된다.
한편, 본문에서 '남편인데도'에 해당하는 '빠알르티'(baallthi)의 원형 '빠알'(baal)은 엄격히 말해서 '주인이 되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인됨은 결혼 관계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빠알'에는 결혼 관계를 통해 주인의 신분을 갖게된 '남편'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탈출21,22).
그러므로 본절에서 중요한 점은 결혼 관계 속에서 아내의 남편이 되든 하인의 주인이 되든, 주님과 그 계약의 대상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동맹의 관계, 다시 말해서 선민 이스라엘은 결코 주님을 배반해서는 안 되는 신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계약을 깨뜨린 당사자는 바로 '헴마'(hemma)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언급되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큰 은혜를 받은 그들이 결코 그렇게 하지 말아야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깨뜨렸음을 부각시켜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33)
본절과 34절은 옛 계약과 대조되는 새 계약의 독특한 성격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전달해 준다. 옛 계약과 크게 대조되는 새 계약의 특징은 한마디로 내면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그러나 그 계약의 당사자를 하느님 대전에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다.
모세 계약으로 대변되는 옛 계약은 외적 측면이 두드러진다. 먼저 계약의 내용은 돌로 된 두 증언판에 기록하였다(탈출31,18; 34,28).
둘째 외적 행위로 주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에 촛점을 두고 있다. 물론 옛 계약은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된다'(탈출20,17)는 것처럼, 생각(마음)으로 탐욕을 품지 말라는 명령과 네 이웃을 네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위19,17.18) 등의 내면적 명령도 포함된다.
즉 그 옛 계약이 비록 외면적으로 돌로 된 두 증언판에 새겨져 있고 외적인 율법 준수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내면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적인 거룩함과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계약 시대에는 주님의 법이 이스라엘의 마음속에 새겨져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작용하여 사람의 근본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사도2장) 이전까지는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따라서 새 계약의 가장 현저한 특징으로서 주님의 법을 사람의 마음속에 기록하여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지키게 하신다는 것은 곧 성령의 전면적인 활동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심으로써 새 계약을 세우셨고, 이것을 믿는 자를 성령의 인호(印號)로 영혼에 낙인을 주시어 계약을 그와 더불어 이루어 가시는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사도1,4.5; 2,1~4), 새 계약이 계약의 당사자들 안에서 역동적으로 성취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새 계약의 당사자들은 결코 율법을 무용한 것이나 없앨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이를 적극적으로 행하며 굳게 지키는 것이다(로마3,31).
이것은 인간적 의지와 결단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옛 본성을 부인하는 가운데 내적으로 주어진 성령의 능력을 따라 행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로마 8,4; 갈라 5,16.22.23).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새 계약을 그들의 살로 된 마음의 판에 새겨졌다는 것(2코린3,3)이 의미하는 바이다.
한편, 본문에서 '내 법'에 해당하는 '토라티'(thorathi)의 원형 '토라'(thorah)는 구약의 율법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와 동일하다(탈출24,12). 이런 점은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율법과 결코 무관하다거나 율법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점을 암시한다(마태5,17; 로마3,31; 야고2,26).
사도 바오로가 갈라디아서 3장 1~14절에서 그토록 열변을 토하며 지적한 사실, 즉 율법의 행위가 성도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은 것은 성도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지시기 위함이기에 결코 옛 율법에 의지하여 구원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율법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도 바오로가 반대하는 율법의 행위는 육신적 할례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절기 준수나 음식에 관한 규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왜곡된 구원관을 가르치는 유대교적 율법주의를 염두에 둔 것이다(콜로2,16.20~23).
구원이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율법은 거룩한 것이며,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하느님의 백성들이 한결같이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이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모세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돌판에 율법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낙인으로 사람들의 심령에 그 법을 새겼다.
이런 측면에서 새 계약 시대의 성도들은 과거 옛 계약 시대의 이스라엘 집안보다 훨씬 더 주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로마13,8~10).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바빌론 포로 귀환 이후 선민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긴밀하게 교제하게 될 것을 예언한다. 이러한 예언은 사실 옛 계약 때에도 주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었다(탈출6,7). 그러나 동일한 약속을 새 계약의 당사자들에게 다시 새롭게 주시는 것은 옛 계약 시대의 백성이 그 약속의 축복을 완전하게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느님께서는 옛 계약의 당사자들이 계약 준수에 실패한 것을 다시금 새 계약의 당사자들에게 주심으로써 애초에 계약의 백성을 통해 이 세상 가운데서 그려내고자 하셨던 원래 목적을 반드시 완수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고 계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음의 법을 통해 주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그 계약의 백성의 진정한 하느님이 되실 것이고, 또한 그들은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삶을 통해 자신들이 주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하느님의 백성임을 나타낼 것이다(1베드1,14.15).
본문에서 '내 백성'에 해당하는 '리 레암'(li leam)은 문자적으로 '내게 속한 백성으로'라는 의미이다. 신약의 성도들은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웠다(사도11,26). 이 칭호는 원문상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근본적으로 본문의 '내 백성'이란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신의 것인양 주장하는 자세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며, 오직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다.
8월 4일 목요일 복음 (마태16,13-23)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5~16)
마태오 복음 16장 15절에서 한글 새 성경에는 번역이 생략되었지만, 원문에는 '그들에게'에 해당하는 '아우토이스'(autois; to them)이 나온다. 그리고 '물으시자'에 해당하는 '레게이'(legei; he asked)는 '말하다'는 뜻을 가진 '레고'(lego)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이다.
희랍어의 현재형은 단순히 현재 뿐만 아니라 현재의 계속적 동작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의 질문이 모든 세대의 믿는 이들에게 계속되고 있는 물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에서 '그러면'에 해당하는 접속사 '데'(de; but)는 이 질문이 앞의 대답과 대조됨을 나타낸다.
일반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기대와 욕구에 따라 그들에게 현세적 부귀영화를 가져다 주고, 그들을 구원할 정치적 메시야로만 보지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일반 사람들보다는 더 나은 대답을 기대하고 계시는 것으로서, 사랑하는 당신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소망이 엿보이는 질문이다. 그리고 '하느냐?'에 해당하는 '레게테'(legete; say)는 '말하다'는 뜻을 가진 '레고'(lego)의 복수2인칭으로 '너희는 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문은 여기에 '너희는'에 해당하는 인칭 대명사 주격 2인칭 복수형인 '휘메이스'(hymeis; you)를 첨가하여 '너희'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궁금하셔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 당신의 메시야적 정체성(Identity)의 명백한 고백을 제자들로부터 도출시키기 위한 질문이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앞의 마태오 복음 16장 13절의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는 질문은 마태오 복음 16장 15절의 질문을 이끌어 오기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군중들의 생각과 관심보다는, 당신의 가르침을 직접 받던 제자들의 생각과 고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질문은 동시에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스승님'으로 번역된 '쉬'(Sy; You)는 인칭 대명사 주격 2인칭 단수형으로 '당신'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십니다'에 해당하는 '에이'(ei; are)은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eimi) 동사의 2인칭 단수형으로, '당신은 ~ 이십니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스승님'으로 번역된 '쉬'(Sy)는 강조형으로 고백의 대상이 되는 '당신', 즉 예수님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또한 원문에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크리스토스'(christos; Christ) 앞에 정관사 주격 남성 단수인 '호'(ho; the)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당신은, 그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오실 메시야로 예언된 바로 그분이심을 뜻한다.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비로서 여기서 처음으로 베드로의 입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살아계신'에 해당하는 '존토스'(zontos; living)는 '살다'는 뜻을 가진 '자오'(zao)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이것은 이방의 죽은 신들과 대조되는 표현으로서, 하느님께서 스스로 영원토록 자존(自存)하시는 '영원자존자'(永遠自存者)이시며, 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생명의 근원되신 분이시고, 그리고 과거와 더불어 지금과 미래에도 살아 역사(役事)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또한 원문에는 '아드님'에 해당하는 '휘오스'(hyos; son)앞에 정관사 '호'(ho; the)가 기록되어 있어, 직역하면 '살아계신 하느님의 그 아들'(the son of the living God)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예수님께서 영원자존자이신 하느님의 독생성자 되심을 나타낸다(요한1,14.15; 3,18; 1요한4,9).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송영진 모세 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예수님 뒤를 따라가려면,
우선 먼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서 최후의 만찬 때의 말씀이 연상됩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3,36).”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제자들이 ‘지금은 따라갈 수 없는 곳,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가게 될 곳’,
즉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영광스럽게
되는 곳입니다(요한 13,32).
그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자리를 마련해 두신 곳인데(요한 14,2),바로 ‘아버지의
집’(하느님 나라)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이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서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려면”, 또는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을 얻어 누리려면”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버리고”입니다.
물질적인 것들과 세속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숨도 버려야 한다면
버려야 합니다.
(꼭 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죽음도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얻기를 희망하는
것을 얻지 못합니다.
방해되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도움이 되는(필요한) 것들은 잘 챙겨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또는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물질적인 것도 아니고 세속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 사랑, 희망, 열정, 헌신,
인내 등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입니다.
이 말은 사실상 ‘자신을 버리고’와 뜻이 같습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않는 것은 십자가
지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제대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역시
믿음, 사랑, 희망, 열정, 헌신, 인내 등입니다.
십자가의 길 끝에 부활과 승리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희망도 있어야
하고,
신앙생활에 대한 열정도 있어야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헌신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인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십자가는 ‘참기 힘든 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참기 힘들지만 참는 것, 그것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와 ‘인내’에서
‘좁은 문’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하늘나라의 문이 ‘좁은
문’이 된 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라
참기 힘든 일이 닥쳤을 때,
끝까지 참는 사람보다는 참지 않고
포기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박해 때의 역사를 보면 순교자보다 배교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눈앞의 십자가는 너무 크게
보이는데,
나중에 얻게 될 영광은 너무 멀고 막연하게만 느껴질 때가 많고,
지금 겪는 고난 때문에 힘들어 하다가 나중에 얻게 될
영광을 잊어버리거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고 의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좁은 길이 되고, 그
문이 좁은 문이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훈련의
고통과 어려움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의 영광보다 더 크게 느낀다면,
그래서 훈련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금메달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합격했을 때의 기쁨보다 시험공부의 고통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공부하기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합격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그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고통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에 고통,
희생, 슬픔 같은 것만 있다면
아무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그런 어두운 것들만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에는 기쁨, 평화, 행복이 있고, 사실 그것이 더 크고 더 많습니다.
우리가 힘들어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박해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를 보면,
분명히 고난과 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기쁨’을 노래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6-47)”
우리는 성모님의 생애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믿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고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필리
2,17-18).”
바오로 사도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하고,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서 희생과 헌신을 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 ‘기쁨’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