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루카 9,28ㄴ-36)

2016. 8. 6. 오후 8: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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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루카 9,28ㄴ-36)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다니엘 예언자는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은 분이 옥좌에 앉아 계신 것을 보는데,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이가 그를 섬기게 된다. (다니엘 7,9-10.13-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시편 97(96),1-2.5-6.9(◎ 1ㄱ과 9ㄱ)
◎ 주님은 임금이시다.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다.
○ 주님은 임금이시다. 땅은 즐거워하고, 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 흰 구름 먹구름 그분을 둘러싸고, 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
○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 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 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 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
○ 주님, 당신은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 모든 신들 위에 아득히 높으시옵니다. ◎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 기도하시는데,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이 하얗게 빛난다. (루카 9,28ㄴ-36)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제1독서 (다니7,9-10.13-14)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다니엘서 7장 9절부터 14절까지는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광경가운데 두번째 장면으로서 다니엘서 7장 2~8절의 벨사차르 제일년(원년)에서 보았던, 바다에서 나온 각기 다른 형상을 지닌 큰 네 짐승의 환시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네 마리의 각각 다른 짐승들이 온 세상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 세상은 하늘에서 그 옥좌를 두고 앉아계신 하느님에 의해 심판되며, 사람의 아들(인자)같은 분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아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나라를 부여하게 된다는  사실이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다니엘이 본장에서 본 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 및 그분의 궁극적인 심판과 승리를 예언하는 다니엘서 2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첫번째 꿈과 다니엘서 4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두번째 꿈과 그 기조를 같이하는 환시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은 이와같은 꿈의 내용을 성경에 기록함으로써, 당시 바빌론 벨사차르 왕의 통치하에서 현재와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보고 있던 하느님의 백성에게 희망을 부여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땅에서는 그 짐승같은 인간 통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진정한 통치자는 하느님 이시라는 사실 및 하느님께서는 언젠가는 당신 백성들에게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권세와 나라를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어두운 세상의 권력 하에 살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은 힘과 용기를 내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고, 하루하루를 승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옥좌들이 배치될 때까지 나는 응시하고 있었다'(I kept looking until thrones were set up)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놓이고'로 번역된 '레미우'(remiu)의 원형 '레미'(remi)'던지다', '배치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앞의 짐승들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옥좌가 던짐을 당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심판을 베풀기 위한 하느님의 옥좌가 새롭게 배치된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제 짐승들의  때 특히 마지막으로 일어난 작은 뿔의 시대는 지나갔고,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의 때가 도래하는 것이다.  하늘의 영들은 하느님께서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앉으시도록 하느님의 옥좌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다니엘은 바로 그러한 장면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옥좌'에 해당하는 '코르싸완'(korsawan)은 원형 '카레쎄'(karese)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옥좌'에 앉으시는 재판관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따라서 수(number)가 호응을 이루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본문의 복수형은 문자 그대로 '옥좌'가 여러 개 있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높고 영광스러운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장엄 복수형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의 복수형 '옥좌'에 대한 타당한 해석을 정리해 보면, 이처럼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거나, 삼위일체 하느님 위격 각자가 동등한 심판자의 자격으로 앉을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 하느님의 우편에 인자같은 이가 동등한 자격으로 앉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마태26,64; 다니7,13), 하느님의 성도들이 심판자의 자격으로 하느님 곁의 어좌에 앉아 심판할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일 수 있다(묵시20,4). 그런데 이어지는 문맥만을 고려한다면,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리고 날들의 고대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and the Ancient of Days took his seat)라는 의미로 거의 대부분 영역본들이 번역되었고, 어떤 것의 경우는 '가장 존경할 만한 한 분이 좌정하셨다'(one most venerable took his seat)로  의역하였다.  

그렇다면 '날들의 고대'(the  Ancient of Days)란 표현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것은 일차적으로 너무나 오래 되어서 측량하기 어려운 긴 시기를 나타내며, 이차적으로는 하느님의 영원성(eternity;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영원 존재성)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연로하신 분'(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은 세상의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성부 하느님(God the Father)만을 단독으로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분은 원래부터 하늘의 옥좌에 앉아 계시지만, 이제는 특별히 세상 왕국들 및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심판의 옥좌에 좌정하신 것이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마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께서는 흰 옷을 입고 계셨고, 머리카락 역시 흰 색이었다. '그분의 옷'에 해당하는 '레부셰흐'(lebusheh)의 원형 '레부쉬'(lebush)는 어원적으로  예복이나 긴 겉옷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하느님의 옷이 마치 흰눈(white snow)처럼 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도덕적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둘째는 하느님의 존엄성과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셋째는 하느님의 풍성한 앎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다. 

요한 묵시록에서 큰 환난을 겪어 내어 하늘에 올라간 사람들 역시 흰 옷을 입은  모습으로 제시되는데,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7,13~14). 만약 이들의 흰 옷이 그들의 영적 도덕적 순결성을 강조한다면, 여기서 하느님의 눈처럼 흰 옷 역시 그분의 거룩하심, 순결하심, 순수하심, 온전하심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흰 머리카락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묘사된다.  양털처럼 흰(깨끗한) 하느님의 머리카락은 사람들의 이해와 결부해 볼 때  하느님의 나이가 매우 많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잠언서에 백발은 노인의 영광의 상징으로 나오며(잠언16,31; 20,29), 요한 묵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털도 희기는 눈과 같고 양털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묵시1,14). 

이상의 의미를 종합하면, 본문은 하느님께서 존재론적으로 영원무궁하시고, 도덕적으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온전하시어 죄에서 완전히 떠나 계신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다니엘의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옥좌는 화염으로 휩싸여 있거나 화염 그 자체였다. 그 옥좌에는 여러개의  바퀴들이 있는데, 그 바퀴들 역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이거나 또는 그러한 불로 휩싸여 있었다. 이와같은 영상은 의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엄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이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휩싸여 계신다고 말한다(1티모6,16;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다니엘이 본 그 불꽃 혹은 이글거리는 화염물리적으로 무언가를 태우는 불이라기 보다는, 악인들을 심판하는 심판의 두려움을 자아내고, 하느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 임재하셨을 때, 동반된 여러 현상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이러한 화염이었다(탈출19,18).  또한 에제키엘이 환시가운데 본 하느님의 임재 및 그분의 옥좌 역시 불꽃으로 휩싸여 있었고, 또 그 옥좌에 여러 개의 바퀴들이 달려 있었다(에제1장). 

하느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하늘로 끌어 올리실 때에도 불 병거와 불 말들을 사용하셨다(2열왕2,11).

다니엘이 후에 티그리스 강가에서 본 환시 속의 한 분은 그 분이 횃불처럼 생겼고, 그 팔과 다리는 광을 낸 청동 같았으며(다니10,6),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서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역시 그의 눈이 불꽃같고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같이 생겼다(묵시1,14.15). 

다니엘서 10장과 요한 묵시록 1장의 주체는 성자 하느님을 묘사한 것이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와 성부와 동일한 본체이시며 동일한 영광과 위엄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철저히 불꽃에 둘러싸인 분으로 묘사하는 본문은 하느님의 위엄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장엄한 것인지, 죄스런 인간이 가까이할 수 없는 그의 거룩한 영광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면모 앞에 사람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두려움과 떨림 외에 어떤 태도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0)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의 옥좌에서는 이글거리는 불이 마치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본문에서 '뿜어 나왔다', '퍼져 나왔다'에 해당하는 '나게드 웨나페크'(naged wenaphek)두 단어 모두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불이 하느님의 옥좌로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모습을 강조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지속성을 암시한다. 또한 '그분 앞에서'라는 표현은 불꽃이 하느님의 몸 속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좌정해 계시는 그 옥좌로부터 나온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 흘러나오는 불의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니엘은 마치 강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고 묘사한다.

이렇게 흘러나오는 심판으로서의 불은 세상 나라들 특히 작은 뿔이 상징하는 적 그리스도를 심판하는 불이다. 이 불은 적 그리스도를 포함한 모든 악한 세력들에 대한 심판이 끝날 때까지 하느님의 옥좌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올 것이다.  

한편 '백만'과 '억만'에 해당하는 '엘레프 알르파임'(elep allpaim)'립보 랍베완'(ribbo rabbewan)은 고대 세계에서 형언할 수 조차 없는 많은 숫자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를 나타내는 데 이처럼 헤아릴수 조차 없을 만큼 많은 수를 들고 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그 명령을 수행하는 소임을 맡은 존재들이다. 이 문맥에서는 특히 심판과 관련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대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문에서 '그분을 시중드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 '예샴메슌네흐'(yeshameshunneh)문자적으로 '그들이(백만) 그분을 시중들고 있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이곳밖에 사용되지 않지만, 문맥상 수많은 천사들이 하느님을 시중들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확실하다. 또한 본문에서 '모시고 선'에 해당하는 '예쿠문'(yequmun)은 문자적으로  '그들이(억만) 모시고 서 있다'라는 의미이다. 

천사들은 하느님과 나란히 옥좌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 옥좌 곁에 서 있으면서 하느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동시에 그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숫자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위엄을 드높여 줌과 아울러 하느님의 권세와 능력, 그리고 그분의 역사하심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고 광대무변함을 암시한다. 

한편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면서 책들이 펼쳐진다.  '책들'에 해당하는 '씨프린'(siprin)은 어원상 '기록하다', '계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싸파르'(sapar)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여러 권의 책들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심판대에 펼쳐져 놓인 이 책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말들이 다 기록되어 있는 책이며,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책이다. 

모세는 이 생명책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탈출32,32), 사도 요한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말하였다(묵시21,27).  또한 사도 요한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책으로서 그들의 행위가 기록된 책을 언급한다(묵시20,12). 

본 문맥에서는 이 두가지의 책 가운데서 행위를 기록한 책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심판이 행위를 기록한 책에 근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심판이 절대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매우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산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는 것을 보았고,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본 모습을 직접 목격한 일이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직접 체험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그 일을 통해서, 자기들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게 되었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최종 목적지를 보여주시고,
당신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 주신 것은,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라고 해석합니다.
결과를 알고 있다면, 과정이 힘들어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믿는다면,
박해와 고난이 닥치더라도 흔들림 없이 믿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1) 당연한 말이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종교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박해자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을 박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박해받는 것이 무섭거나 싫은 사람은 믿음을 버리게 됩니다.)
‘죽어도’ 믿음을 버릴 수 없다고 버티는 사람은 믿음과 목숨을 맞바꿀 것입니다.
즉 순교자가 됩니다.


믿음이 있지만 약한 사람은 처음에는 조금 버티더라도 금방 항복할 것입니다.
따라서 결과만 놓고 보면 믿음이 약한 것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약한 믿음은 강한 확신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체험이나 깨달음이나 묵상이나 증언 등을 통해서...
제자들은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은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체험은 약한 믿음과 용기를 강화시키는 데에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수난 때 제자들이 보인 모습은 믿음이 강화된 모습이 아닙니다.
그 모습만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산으로 데려가셔서
여러 가지를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체험이 확신으로 바뀌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일들의 의미를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깨닫고 확신하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2)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지는 않고,
현세적인 행복만 희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박해가 닥치면 인내하지 못합니다.
박해는 현세에서는 불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만이 박해를 참고 견딥니다.
그러다가 순교하기도 하고.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하느님 나라의 체험이 너무 행복해서
그 상태 그대로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이 서 있는 곳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지상입니다.
(잠깐 동안 하느님 나라를 체험한 곳이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막을 지어야 할 곳은 지금 이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행복하고 황홀하고 편안해도,
반대로 이 세상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프고 괴로워도,
신앙인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경유지일 뿐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최종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라 저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참으로 희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 영원한 평화입니다.


3)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라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그의 말’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는 예수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초막을 지어서 그대로 머물고 싶어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주저앉지 말고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어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목격했어도,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길은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한데, 인내는 강한 믿음과 희망에서 나옵니다.
믿음도 희망도 없다면 고난을 참고 견딜 이유가 없게 됩니다.
제자들의 체험은 그들에게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목적지도 중요하고, 그곳까지 가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만일에 과정은 중요하지 않고 결과만 중요하다면,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 중요하고 지금의 인생은 중요하지 않다면,
한시라도 빨리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살해도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특별한 체험을 할 기회를 주심으로써
그들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신 것은
결과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과정을 충실하게 거친 사람이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아무렇게나 막 살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헤로데가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루카 13,33).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하루하루의 삶’도 마지막 부활 승천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까지 가신 과정도 우리 믿음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시간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 빛나는 존재가 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그 죽음을 끝내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고 있지요.
또한,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두 사람은 구약의 모든 예언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이미 구약 시대 때부터 예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영광의 자리에만 머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없는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역시 이런 유혹에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지요. 고통과 희생 없이 영광만을 맛보려 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만큼 하루하루 많은 십자가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날의 고통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고 있지요.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느님께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 역시, 이런 덧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끝나고 말 것이 아니라, 언젠가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고통을 함께 나누시며, 우리의 삶에 동참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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