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간 월요일]성전 세 (마태 17,22-27)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도미니코 성인은 1170년 스페인 북부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덕을 쌓는 데 몰두하던 그는 사제가 되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적인 설교로 사람들을 회개의 길로 이끌었다. 도미니코 사제는 1206년 설교와 종교 교육을 주로 담당하는 도미니코 수도회를 세우고 청빈한 삶과 설교로 복음의 진리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강조하였다. 1221년에 선종한 그를 1234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사제였던 에제키엘 예언자는 유배지인 바빌론의 크바르 강 가에서 환시 중에 주님의 발현을 본다.(에제키엘 1,2-5.24-28ㄷ)
제삼십년 넷째 달 2 초닷샛날, 곧 여호야킨 임금의 유배 제오년에, 3 주님의 말씀이 칼데아인들의 땅 크바르 강 가에 있는, 부즈의 아들 에제키엘 사제에게 내리고, 주님의 손이 그곳에서 그에게 내리셨다.
4 그때 내가 바라보니,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면서, 광채로 둘러싸인 큰 구름과 번쩍거리는 불이 밀려드는데, 그 광채 한가운데에는 불 속에서 빛나는 금붙이 같은 것이 보였다.
5 또 그 한가운데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습은 이러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형상과 같았다. 24 그들이 나아갈 때에는 날갯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고 전능하신 분의 천둥소리 같았으며, 군중의 고함 소리, 진영의 고함 소리 같았다. 그러다가 멈출 때에는 날개를 접었다.
25 그들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멈출 때에는 날개를 접었다.
26 그들의 머리 위 궁창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어좌 형상이 있고, 그 어좌 형상 위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었다.
27 내가 또 바라보니,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 사방이 불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아래쪽은 불처럼 보였는데,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28 사방으로 뻗은 광채의 모습은, 비 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그것은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자녀들은 성전 세를 면제받는 게 당연하지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이 없으니 내라고 이르신다.(마태오 17,22-27)
제자들이 22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25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26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제1독서 (에제1,2-5.24-28ㄷ)
"그들의 머리 위 궁창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어좌 형상이 있고, 그 어좌 형상 위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었다. 내가 또 바라보니,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 사방이 불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아래쪽은 불처럼 보였는데,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26~27)
본문은 궁창 위의 한 아름다운 어좌의 형상에 대한 묘사이다. 어좌가 궁창 위에 있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나타낸다. 즉 궁창이 모든 피조 세계를 하느님의 영광의 어좌 아래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존재의 초월성과 위엄성을 과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궁창 위의 세계는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후서 12장 1~4절에 기록한, 그가 환시중에 다녀온 셋째 하늘이며, 사도 요한이 묵시록 4~6장에서 기록한, 열린 문을 통해 들어가는 천국과 동일하다.
에제키엘은 그 궁창 위에 어좌의 '형상'이 있다고 기록한다. 이 형상은 그것이 이 땅에 있는 왕들이 앉는 궁전의 어좌(throne)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이지 정확히 그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그 어좌 형상의 모양이 마치 청옥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청옥'에 해당하는 '에벤 쌉피르'(eben saphir)라는 단어는 대부분 영역본에서는 푸르스름하며 투명할 뿐 아니라 광채를 발하는 보석인 '사파이어'(sapphire stone)로 번역하였다. 하느님의 어좌를 이 보석에 빗댄 것은 그 어좌의 거룩함과 순결성을 부각시켜 표현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한편 어좌 위의 한 형상이 있으며,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었다는 것은 정확하게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에제키엘이 목격한 존재가 이 지상의 사람의 모양을 닮았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 이 형상은 강생(육화; Incarnatio)하기 전, 천상에서 신적 신분으로 존재하셨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사람'에 해당하는 '아담'(adam)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자신의 형상과 모습대로 만든 '사람'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단어이다(창세1,26). 이 동일한 단어가 어좌 위에 계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가 장차 그런 사람의 모습으로 강생(육화)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필리2,8).
'내가 또 바라보니,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사방이 불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사람 모양 같은 형상, 즉 강생(육화)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다니엘이 티그리스 강가에서 보았던 그 형상과 외관이 유사하며(다니엘10,5.6), 에제키엘서 8장 2절에 기록된 주님의 권능의 현현을 묘사한 것도 유사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것은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하느님의 모습(1티모6,16)을 연상시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여기서 '불'에 해다하는 '에쉬'(esh)는 육신을 가진 인간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위엄과 두려움, 심판 등을 상징한다. 그리고 본문에서 '사방이'란 표현은 그 사람 모양의 형상이 온통 불 같은 것으로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준다.
또한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에 해당하는 어구 '케엔 하쉬말'(keen hashimal)은 에제키엘서 1장 4절에서도 사용된 어구로서, 문자적으로는 '번쩍거리는 호박 같은 것'(like gleaming amber) 또는 '이글거리는 금속같은 것'(like gleaming metal)이란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이것은 사람의 육안으로 감히 쳐다볼 수 조차 없는 하느님의 영광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를 그대로 묘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신적 존재 자체가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도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서 본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태양이 힘있게 비치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서 엎드렸다(목시1,16.17).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에서 이처럼 눈부신 광채가 비추는 것은 그가 빛 되신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기 때문이다(히브1,3).
그 자신 역시 그 빛을 반영하는 빛과 동일한 존재이신 강생 이전의 성자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요한1,9~12).
이러한 하느님의 영광의 현현은 그분의 찬란한 영광뿐 아니라 그분의 빛으로만 이 세상의 어두움이 소멸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요한8,12).
8월 8일 월요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복음 (마태17,22-27)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26ㄷ~27)
'그렇다면'에 해당하는 '아라 게'(ara ge)는 '그러므로', '따라서'라는 뜻을 가진 '아라'(ara; then)의 강조형이다. 왜냐하면 '게'(ge)는 어떤 낱말에 뒤따라와 그 낱말을 강조하는 접미어이기 때문이다. 또한 뒤에 오는 '엘류테로이'(eleutheroi)의 원형 '엘류테로스'(eleutheros)는 '자유가 있다'(1코린7,39)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직역하면, '그렇다면! 아들들은 자유이다'(Therefore the sons are free; Then the sons are exempt)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므로 당연히 성전 세가 면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성전이 아버지의 집이고(요한2,16),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고려해 볼 때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아들들' 혹은 '자녀들'에 해당하는 '호이 휘오이'(hoi hyoi; the children)가 복수형으로 나오는 것은 앞의 25절에서 복수형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전 세가 면제되는 대상은 성전의 주인되시는 예수님 뿐이시다.
따라서 '자녀들'이란 표현은 일차적으로 면세의 대상자가 다수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임금의 자녀들의 실례가 예수님께도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이 부분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주신 자유와도 관련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은 스승인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므로, 그들도 스승으로 말미암아 '자녀들'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어서 그들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우리가 ~비위를 건드릴 것'에 해당하는 '스칸달리소멘'(skandalisomen; we should offend)의 원형 '스칸달리조'(skandalizo)는 원래 길 가운데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 또는 방해물을 놓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죄짓게 하다'(루카17,2; 마르9,43)로도 번역되고 있다. 이것은 상대로 하여금 죄짓도록 유혹하는 악한 행위를 가리킨다.
이런 단어의 용례를 적용하면,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아드님되시는 예수님의 신분으로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예수님의 행동을 사람들이 이용하여 그들 또한 성전 세를 내지 않는 행동으로 인도할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이 단어는 '버리다', '떨어져 나가다'(마태26,31), '배척하다', '못마땅하게 여기다'(마르6,31)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믿고 순종해야 할 대상을 불신하기 시작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런 내용을 고려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에 대한 태도를 사람들이 오해하여 예수님을 배척하고 불신하게 되는 것을 미리 막고자 하시는 의도도 가지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스칸달리조'(skandalizo)는 '귀에 거슬리다', '투덜거리다'(요한6,61)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불쾌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계셨지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에게 이것이 성전에 대한 모독으로 불쾌하게 여기고 분개할 수 있는 사건으로 부각될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앞으로 반드시 수행해야 할 하느님 아버지의 중요한 사명이 남아 있었기에, 더 큰 목표를 위해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양보하셨던 것이다.
'낚시를 던져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주어라.'
이 구절은 성전 세를 지불하기 위한 예수님의 기적으로 오직 마태오만이 기록하고 있다. '낚시를'에 해당하는 '앙귀스트론'(angistron; an hook)은 '구부러진 것'을 뜻하는 '앙코스'(angko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서 한 번 사용되었다.
'스타테르 한 닢'에 해당하는 '스타테라'(statera; a piece of money; a four-drachma coin)은 '돈 한 세겔'로서 신약 시대에 통용되었던 '은전'(銀錢)의 명칭이다. 1스타테르는 4드라크마이며, 성전 세겔로는 한 세겔에 해당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당연히 율법의 요구에서 면제되신다. 그렇지만, 당신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시어 겸손하게 율법에 순종하셨을 뿐만 아니라,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 성전 세를 마련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지신 하느님의 참 아드님되신 분이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성전 세를 바치시다.>송영진 모세 신부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마태
17,24).”
스무 살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일 년에 한 번 ‘반 세켈’을 성전 세로 바쳤는데, 그 돈은 성전 운영비로 사용되었습니다.
(‘반 세켈’은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25센트 정도입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 사도에게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라고
물은 것은, 성전 세를 빨리 내라고 독촉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마태 17,25-26)”
“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여기서는 “곧 내실 것입니다.” 라는 뜻인데, 예수님께서 평소에 성실하게 성전 세를 내신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임금들을
예로 드신 것은,하느님은 온 세상의 임금(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임금의 자녀들이 세금을 면제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은,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7).”
‘스타테르 한 닢’은 ‘한
세켈’과 같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 몫의 성전 세를 낼 수 있는 돈이 됩니다.
여기서 ‘그들’은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의 정당한 직무 수행을 막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는 별로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모릅니다.)
어떻든
그들은 자기들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직무 수행을
존중하셨습니다.
이 내용을 해석할
때,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의 법과 제도를 존중하셨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성전 세’는 인간 세상의 법에
의해서 거둔 세금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명령하신 일입니다(탈출 30,11-16).
따라서 성전 세는 ‘하느님의 법’에
의해서 거둔 세금이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법’을 지키는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비위를 건드릴 것이
없으니” 라는 번역만 보고서 예수님께서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역시 그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일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일과 비슷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표시로 받는 세례였기 때문에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일부러
세례를 받으신 것은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해석합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뜻이 더 있다고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호수에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시키신 것은 성전 세를 낼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도 돈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호수에 가서 고기를 잡는 것은 평범한 일인데, 고기 입에서 돈을 발견하는 일은 분명히 기적에
속합니다.
잡은 고기를 시장에서 팔면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기적을 사용하셨을까?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돌려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특별한 기적으로 생긴 돈이 아니더라도, 즉 자기가 노동을 해서 번 돈이라고 해도, 그 돈은 하느님께서 주신 돈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얻은 것은
모두,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 가운데 일부를 하느님께 감사 예물로
바칩니다.
‘성전 세’도 명칭은 세금이지만 사실은 봉헌금입니다.
탈출기를 보면 ‘속죄 예물’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탈출
30,15).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돈은
세금이 아니라 봉헌금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세금을 거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율법(교회법)에 정해져 있다고 해도 세금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상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일이 하느님의 의무가 아닌 것처럼 우리가 뭔가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도 우리의 의무가 아닙니다. (의무가 아니라
‘본분’입니다.)
만일에 의무로만 생각해서, 싫은데도 억지로 바친다면,그것은 바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