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출세와 섬김 (마태 20,20-28)

2016. 7. 25. 오후 5:3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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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출세와 섬김  (마태 20,20-28)


야고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이다. 어부인 야고보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동생 요한과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세 제자 가운데 하나이다. 열두 사도에는 야고보가 둘 있는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작은[소] 야고보’와 구분하여 ‘큰[대] 야고보’라고도 부른다. 42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고 우리는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진다고 이야기한다. ( 2코린 4,7-15)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시편 126(125),1-2ㄱㄴ.2ㄷㄹ-3.4-5.6(◎ 5)
◎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
○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마태 20,20-28)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A.D.44년에 12사도 중에 처음으로 순교(참수치명)당하는 (장長; 대大)야고보 사도(사도행전12,1~2)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제1독서 (2코린 4,7-15)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8~9) 

코린토 2서 4장 7절~15절의 말씀은 2013년 6월 14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제1독서의 해설을 찾아 보기 바란다. 

오늘은 빠진 부분 중에서 코린토 2서 4장 8~9절을 해설한다.  코린토 2서 4장 8절과 9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8개의 분사를 사용한 표현을 통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약의 복음을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원문에는 8개의 분사가 모두 현재형으로 기록되어 현실감을 잘 드러낸다. 

여기서 '환난을 겪어도'로 번역된 '틀리보메노이'(thllibomenoi; we are troubled; we are hard pressed)는 원래 '포도즙을 짜기 위해 누르다'라는 뜻을 지닌 '틀리보'(thllibo)의 현재 분사 수동형이다.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피를 말리는 고통을 당하며 그의 적대자들에 의해 압박당한 사실을 드러낸다.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서 모두 7회 사용된 이 동사는 모두 수동태로 쓰였으며, '환난을 당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고(2코린1,6; 7,5; 1테살3,4; 2테살1,6.7; 1티모5,10), 또한 명사형 '틀립시스'(thllipsis) '환난'이란 뜻으로 쓰였다(마태24,9; 로마5,3).

그리고 '난관에 부딪혀도'로 번역된 '아포루메노이'(aporumenoi; we are perplexed)본래 '어리둥절해지다', '혼란해지다', '불확실하여 당황해지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레오'(aporeo)의 현재 분사형으로서, 일체의 수단이나 빠져나갈 능력이 없는 곤경에 처한 사도 바오로의 처지를 잘 드러낸다.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마치 살벌한 군인들에 의해 단단히 포위당해 있는 것과 같은 신세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환난관 난관 속에서도 그는 결코 억눌리지 아니하고 절망하지 아니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아는 법'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엄청난 힘'(2코린4,7), 즉 질그릇 속의 보물이 그를 모든 환난과 난관 가운데서 보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아무리 당혹스런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결코 사도 바오로를 좌절시킬만큼 당혹스럽지 않으며, 제아무리 시련을 당한다 하더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육체의 한계에 도달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도 동일하게 한계에 직면하시지는 않는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자유의 영으로 인간적인 연약함과 제한됨을 초월하여 역사(役事)하신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겪는 것과 같은 이러한 환난과 난관들은 의미없는 고난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2서 4장 9절에서 사도로서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계속해서 진술한다. 여기서 '박해를 받아도'로 번역된 '디오코메노이'(diokomenoi; persecuted)본래 '사냥하다'라는 뜻을 지닌 '디오코'(dioko)의 현재 분사 수동태이다. 

이것은 마치 사냥감을 추적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듯한 사도 바오로의 적대자들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사도 바오로 자신이 이러한 사냥감으로 쫓김당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결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히브리서 13장 5절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이 사도 바오로의 매일의 박해의 경험 속에서도 분명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맞아 쓰러져도'로 번역된 '카타발로메노이'(kataballomenoi; cast down; struck down)갑자기 습격을 당한 상태를 의미한다.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경험은 사도행전 14장 19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과 결부된다. 거기서 사도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으로부터 리스트라까지 그를 추격해 온  유다인들에 의해 갑작스러운 습격을 당해 돌로 맞아 생명이 끊어진 줄로 안 지경에까지 처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의 위협도 그를 멸망시키지 못했다. 

'하느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들'에게 궁극적인 영원한 멸망은 존재하지 않기에, 현세적 물리적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복음 (마태20,20-28)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기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26~28)

'너희 가운데에서'에 해당하는 '엔 휘민'(en hymin; among you)이란 표현은 제자들을 다른 대상과 구분짓는 말로서, 이미 제자들은 이 세상 나라와는 구별되는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처럼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고방식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겸손, 섬김이 기본이 되는 천국의 본질과 관련해서 역설적인 진리를 가르치신다. 

여기서 '섬기는 사람'으로 번역된 '디아코노스'(diakonos; minister; servant)'심부름을 가다'라는 뜻이 있는 '디아코'(diako)에서 유래하여 '일꾼', '하인'(요한2,5.9), '하인'(마태22,13)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초대 교회 때 교회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는 자를 가리키는 '봉사자', '집사'(필리1,1; 1티모3,12)라는 호칭이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한편, 마태오 복음 20장 27절에서 '첫째가'에 해당하는 '프로토스'(protos; first; chief)장소나 시간에 대해 '~보다 앞에'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프로'(pr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여기서는  지위나 계급 등에 있어서 '제일 높은 자'를 가리킨다. 

반면에 '종'에 해당하는 '둘로스'(doulos; servant; slave)'묶다'(마태13,30), '묶다', '결박하다'(마태12,29)라는 뜻이 있는 동사 '데오'(deo)에서 유래하여 주인에게 완전히 예속된 '노예'(slave)를 의미한다. 종은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야 한다. 

사랑과 겸손, 섬김이 기본이 되는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상대방을 섬기는 자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위의 마태오 복음 20장 28절의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육화(강생)하신 목적만을 밝히시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 아니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을 본받아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합당한 자질을 갖도록 촉구하는데 있다. 

여기서 '몸값'에 해당하는 '뤼트론'(lytron; a ransom)'풀다'(마태16,19), '벗다'(사도7,33) 등으로 번역되는 '뤼오'(lyo)에서 유래하여 '의무나 속박에서 풀어 주는 것'말한다. 말하자면 타인의 속박아래에 있는 노예나 죄수에게 자유를 부여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죄와 죽음의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여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러한 죄와 죽음과 사탄의 속박을  끊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무죄하신 당신 자신의 목숨을 그들을 대신하는 제물로 바쳐야 했다.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의노를 풀어드리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와 위격이 같으신 무죄하신 예수님이 죄지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대속(代贖; Redemption)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대속물로서 죽으신 것은 '많은 이들'을 위해서이다. 

'많은 이들'로 번역된 '폴론'(pollon; many)의 원형 '폴뤼스'(polys)수적으로 많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길다는 뜻과 정도에 있어서 광범위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모든'이라는 뜻이 있는 '파스'(pas)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데에 유념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13,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 참다운 권력은 섬김


<출세와 섬김> 송영진 모세 신부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0,20-21).”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여기서는 두 사도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예수님께 청한 것입니다. 두 사도가 청한 것은 열두 사도가 앉게 될 자리 가운데 가장 높은 두 자리입니다.


앞의 1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열두 옥좌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 자리를 청한 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열두 옥좌 가운데 가장 높은 두 자리를 청한 것이고, 이것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청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열 제자가 두 사도를 불쾌하게 여기게 됩니다(마태 20,24). (아마도 열두 사도가 모두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1) 사도들이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희망한 것은 그들이 아직은 명예욕을 버리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5-27).”

이 말씀을,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라고 내가 너희를 뽑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라고 뽑은 것이다.”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도들은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경쟁하면 안 되고,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려고 경쟁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또는 예수님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것처럼 보이는 자리는 사실은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또 첫째처럼 보이는 사람은 사실은 가장 낮은 종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예수님 나라의 열두 옥좌에 앉아서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죄인들을 처벌하는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통치하실 때, 그 통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통치는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세속 권력자들의 통치와 다릅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섬김’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섬기시니,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또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이니,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이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는 신앙인들을 뜻합니다.)


2)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청한 일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교회 직분에 대해서 말할 때,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확실합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 직분을 맡고 싶어 한다면 훌륭한 직무를 바라는 것입니다(1티모 3,1).”
감독 직분이 봉사직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고, 하느님과 교회와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직분을 맡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훌륭한 소망’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단순히 명예욕만으로 높은 자리를 청했을까?
하느님과 예수님을 위해서, 또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싶다는 순수한 소망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명예욕과 순수한 소망이 섞여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두 사도는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바로 대답했습니다(마태 20,22). 만일에 명예욕만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대답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두 사도가 예수님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답한 것이 아니었더라도...)
또 예수님께서 두 사도에게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도(마태 20,23) 두 사도가 순전히 명예욕만으로 그런 청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떻든 사람의 눈에 ‘높은 자리’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종’이 되어서 사람들을 섬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세도를 부리고 싶어 하는 욕망을 버리려고 노력하고, 제대로 ‘섬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은총에 응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3).” 라는 예수님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올바르게 응답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앉았다면 올바르게 응답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높은 자리’는 꼭 교회나 종말의 예수님 나라에서의 자리만 뜻하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 사회에 있는 모든 자리가 다 해당됩니다.(세속의 높은 자리도 해당됩니다.)
인간은 아무도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할 수 없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은, 단순히 세속의 격언만은 아니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교훈입니다.


제베대오의 아들이요, 요한 복음사가의 형인 야고보 사도는, 성급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인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늘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래서 베드로의 장모의 급작스러운 치유에서도,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의 소생 장면에도, 그리고 타볼 산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에도 함께했으며,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밤을 새우도록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두 아들을 예수님의 가장 측근에 앉혀 달라고 청탁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때문에 권력만을 탐하던 제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예언처럼 사도들 중 맨 처음으로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순교를 하게 됩니다(사도 12,1-2).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그래서 때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성격이 급하고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기도 하고, 반대로 성격이 여리고 내성적인 사람은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러나 이 모든 모습이 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그분께서 쓰실 도구들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그 어머니가 원하던 모습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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