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화요일]회개 하지 않으면 (마태 11,20-24)
아람과 이스라엘 동맹군이 유다에 쳐들어오자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 임금 아하즈에게 주님을 믿지 못하면 서 있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이사 7,1-9)
1 우찌야의 손자이며 요탐의 아들인 유다 임금 아하즈 시대에, 아람 임금 르친과 르말야의 아들인 이스라엘 임금 페카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지만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2 아람이 에프라임에 진주하였다는 소식이 다윗 왕실에 전해지자,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듯 임금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떨렸다.
3 그러자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아들 스아르 야숩과 함께 ‘마전장이 밭’에 이르는 길가 윗저수지의 수로 끝으로 나가서 아하즈를 만나, 4 그에게 말하여라.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5 아람이 에프라임과 르말야의 아들과 함께 너를 해칠 계획을 꾸미고 말하였다. 6 ′우리가 유다로 쳐 올라가 유다를 질겁하게 하고 우리 것으로 빼앗아, 그곳에다 타브알의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자.′ 7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8 아람의 우두머리는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의 우두머리는 르친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순다섯 해만 있으면 에프라임은 무너져 한 민족으로 남아 있지 못하리라. 9 에프라임의 우두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우두머리는 르말야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시며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하신다.(마태 11,20-24)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제1독서 (이사7,1-9)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아람의 우두머리는 다마스커스요, 다마스커스의 우두머리는 르친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순 다섯 해만 있으면 에프라임은 무너져 한 민족으로 남아 있지 못하리라." (7~8)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본문은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 하느님의 구원을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은 미래의 계획을 세우고 야심에 차 있지만, 주 하느님은 그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사야는 남부 유다 임금 아하즈가 그 두 임금의 말이 아닌, 주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서언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 the Lord)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이루시는 주(主)이심을 강조적으로 나타내주는 칭호이다.
아람 임금 '르친'과 북부 이스라엘 임금 '페카'는 결코 '아도나이'가 아니다. 그들은 두 왕국의 임금으로서 교만하게 자신들의 야욕에 찬 계획을 선언하였지만, 만군의 주님, 모든 주권을 틀어쥐고 계신 주 하느님은 자신의 계획을 선언하신다. 아무리 종들이 이런 저런 계획을 도모한다 해도, 주인이 결정을 내리면 그것을 따라야만 한다.
인간 왕국의 어좌보다 더 높은 하늘의 어좌가 없다면, 인간들은 인간 세상에서 권력을 잡은 오만한 자들, 악한 자들의 횡포에 휘둘릴 수 밖에 없지만(이사40,27), 그 위에 진정한 주권자이신 '아도나이'가 계신다.
잠시 잠깐 인간 권력자들이 자기 세력을 과시하고 자기 계획들을 도모하려고 광분하고, 그것이 실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은 바로 '아도나이' 이시다.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본문은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부정어 '로'(lo)가 두 번이나 사용된 문장으로서 두 임금의 도모가 결코 또한 영원히 성취되지 못할 것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 정황으로 판단할 때, 아하즈에게는 그들의 계획과 시도가 당장이라도 성취될 것처럼 느껴졌겠지만, 역시 동일한 정황의 한 복판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을 주관하고 계시는 주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이사야 예언자에게는 그 시도가 사산(死産)된 아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시각에 그 두 왕국의 침공을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아람의 우두머리는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의 우두머리는 르친이기 때문이다.'(8ㄱ)
앞선 이사야서 7장 3절~7절은 주님께서 이사야로 하여금 남부 유다 임금 아하즈에게 나아가 북부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의 침공이 실패할것을 예언하라고 명한 내용이었다.
이제 이사야서 7장 8절과 9절은 북부 이스라엘의 영원한 멸망을 예언하며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먼저, 주님은 남부 유다를 침범한 주역인 아람 임금 '르친'의 위치를 밝힌다.
여기서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로쉬'(rosh)는 지배적 도시, 즉 '도성'이란 의미와 더불어 '지배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아람의 도성은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에서 아람 국을 통치하는 자는 르친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이것을 밝히는 것은 단순히 북부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은 주체가 누구인지 밝히기 위함이다. 즉 여기서 하느님께서 관심을 갖는 대상은 르친이 아닌, 르친과 군사 동맹을 맺은 북부 이스라엘이요, 그 왕국을 다스리는 르말야의 아들이다.
이것은 본문에 뒤이어 곧바로 북부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사야서 7장 8절과 9절에서 하느님께서 '우두머리'란 표현을 거듭 사용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아람이나 북부 이스라엘이 남부 유다와 구별된다는 점이다.
사실 신정(神政)왕국 남부 유다의 우두머리는 하느님 임재와 현존의 상징적 처소인 예루살렘이고, 이곳의 우두머리는 하느님이시다. 이처럼 남부 유다는 신정 왕국인 반면에, 남부 유다를 침략한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은 허무한 인간, 임금이 그 우두머리이며, 헛된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임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이제 예순 다섯 해만 있으면, 에프라임은 무너져 한 민족으로 남아 있지 못하리라.' (8ㄴ)
본문은 이사야서 7장에 등장하는 난해한 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당시 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에게 예언을 주고 있던 때는 아람과 북부 이스라엘의 연합군이 남부 유다를 공격한 B.C.734년경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65년후는 B.C.669년 경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는 북부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패망한 B.C.722년과 53년의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B.C.669년은 앗시리아의 통치자 예잘하똔을 승계한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이 제국의 통치자의 반열에 올라서 북부 이스라엘에서 마지막으로 인구 이동 정책을 시행한 첫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서의 저자 이사야 예언자는 그떄까지 살아 있지도 않을 것이며, 그 미래에 있을 역사적 사실을 알 수도 없다.
이사야 예언자는 65년 이후에 있을 아슈르바니팔의 북부 이스라엘 인구 이동 정책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예언으로서 직접 화법이 사용되고 있다. 본문은 65년 이후에 있을 인구 이동 정책으로 인해 북부 이스라엘은 이제 정치적 주권의 측면에서 뿐 아니라 혈통적 측면에서까지, 예전의 이스라엘 민족이 구성하던 나라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은 B.C.722년에 있었던 무력에 의한 패망 뿐만 아니라 B.C.667년까지 계속되었던 민족의 강제 이주 정책까지 포함하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의 예언은 이사야 예언자 뿐 아니라 그 예언을 듣고 있던 아하즈 임금에게도 그 생전에 일어날 예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영적 진리를 전달해 준다. 즉 비록 생애 동안이 아닌 먼 훗날 일어날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언의 말씀을 믿으며 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자신의 예언서에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즉 이사야가 '예순 다섯 해만 있으면'이라는 표현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 것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먼 훗날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을 때에 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굳게 설 수 있다.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11,20-24)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24)
카파르나움(Gapernaum)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마태4,13), 특히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베푼 곳이었다(마태8,5~12; 14~17; 9,1~8).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많이 체험하고도 완고하고 사악하여 그들의 교만이 하늘에 닿았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심판을 선언하셨다.
여기서 '아니'(not)라는 뜻을 지닌 부정(否定) 불변사 '메'(me)는 부정적인 대답이 예상되는 질문에 쓰인다. 이런 원어의 뉘앙스를 살려 해석하면,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그러나 결코 높아지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이 된다. 즉 카파르나움이 하늘에까지 높아질 수 없음을 반어법적으로 강조해 주는 것이다.
특히 이 구절은 구약의 이사야서 14장 13절과 14절에 나오는 '나는 하늘로 오르리라. 하느님의 별들 위로 나의 왕좌를 세우고 북녘 끝 신들의 모임이 있는 산 위에 좌정하겠다. 나는 구름 꼭대기로 올라가서 산 위에 좌정하리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 구절은 역사상 바빌론을 가리키며, 영적으로는 사탄의 교만을 나타낸다. 당시 카파르나움의 교만함이 역사상 대제국 바빌론의 교만과 영적으로는 사탄의 교만에까지 비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11장 23절의 후반부 역시 하늘까지 교만했다가 저승으로 떨어졌던 사탄의 세력에 대한 이사야서 14장 12~13절의 묘사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저승'에 해당하는 '하두'(hadou; hell; the depths)의 원형 '하데스'(hades)는 '보다'(to see)라는 뜻을 가진 '에이도'(eido)에 부정 접두어 '아'(a)가 붙어 보이지 않는(not to be seen) '지하의 깊은 세계'라는 뜻을 가진다.
신약에서 '저승'은 무신론자들이 벌을 받는 장소로 여겨졌다. 특히 마태오 복음 11장 23절과 24절의 문맥을 볼 때, '저승'은 '소돔'(Sodom)에 비유된다. 성경은 소돔(Sodom)이 하늘의 유황불이 내려 멸망했다고 말한다(창세19,1).
그런데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소돔 부근의 아스팔트(역청) 구덩이(창세14,10)이 있어 지진에 의해 땅이 함몰했고, 석유와 가스의 폭발 때문에 불바다가 되어 사해 속으로 사라졌다고 본다. 마치 땅이 입을 벌려 코라에게 딸린 모든 사람과 모든 재산을 삼켜 버렸으므로 그들이 저승에 빠졌던 것처럼(민수16,31~33), 소돔도 땅속으로 꺼져들어가 멸망했던 것이다.
실제로 소돔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사해 저지대에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중해보다 해발 392m가 더 낮은 지중해의 해수면 아래에 잠기게 된 소돔은 지구상의 저승과 같은 곳이다.
그러니까 마태오 복음 11장 23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하고 사악한 죄를 저지른 카파르나움이야말로 지상의 저승인 소돔보다 더 깊은 저승까지 낮아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엄정한 심판의 선언이 담겨져 있다.
한편 마태오 복음 11장 24절의 '견디다'는 뜻으로 번역된 '아네크토테론'(anektoteron; more tolarable; more bearable)은 '지속할 수 있는', '참을 수 있는'이란 뜻을 가진 '아네크토스'(anektos)의 비교급이다. 이러한 비교급의 뉘앙스를 가지고 다시 번역하면, '소돔 땅의 사람들이 카파르나움 사람들보다 심판을 더 잘 견디고, 더 잘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심판에도 등급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본문은 심판의 차별성에 강조점이 있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죄가 참으로 크며, 심판 날에는 반드시 처벌받게 될 것이라는 확실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송영진 모세 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여기서 ‘고을들’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지역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들을 꾸짖으신 것은,
그들에게 은혜를 더 많이 베풀어주었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것이
인간적으로 ‘서운해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타까워서
꾸짖으신 것입니다.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이라는 말은,
그 고을들을 다른 지역보다 더 편애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단순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지역보다 먼저 복음을 들었고, 예수님의 은혜를 먼저 받은”으로.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1-22).”
여기서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이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을 뜻하고,
티로와 시돈은 아직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을 뜻합니다.
지금 이 말씀은 티로와 시돈을
칭찬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의 죄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실제로는 티로와 시돈은 퇴폐와
타락으로 유명했던 도시들입니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아예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보다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죄를 지어도,
계명을 알고 있는 사람과 모르고 있었던 사람은 다른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은 비신자보다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고,
성직자와 수도자는 평신도보다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입니다.
은총을 더 많이 받았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3-24).”
이 말씀은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교만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들이 이미 완전히 구원을 받은 것처럼,
또는 구원을 받는 것이 확정되어 있는
것처럼 우쭐거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회개하지도 않고 잘난 체만 했던 것 같습니다.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는
“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으냐?”입니다.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는
교만에 대한 벌로서
지옥의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께서 소돔을 언급하신
것은
카파르나움과 소돔을 비교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소돔을 칭찬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카파르나움의 죄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카파르나움에서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도시가 멸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돔은 그 자신의 죄악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소돔의 멸망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소돔처럼 멸망당하지 않으려면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경고하기 위해서이고,
카파르나움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라는 말씀도 역시
카파르나움을 회개시키기 위한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소돔을 심판하셨고,
멸망시키셨습니다.
그 심판과 처벌이 최후의 심판 때에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하신 일은 번복이나 취소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소돔에 내린 하느님의 선고가 바뀐다는 뜻이 아니라,
카파르나움이 소돔보다 더 엄한 벌을 받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고을들’을
꾸짖으셨지만,
그 고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해당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그곳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심판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고을들과 각 개인의 운명은 다를 수 있습니다.
소돔이 멸망할 때, 롯과 두 딸이 살아남은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죄의
연대책임이라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그 죄에 직접 동참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죄인들과 어울리고, 또 그 죄를
막지 않고 방관했다면, 사실상 공범입니다.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실 때 죄인들과 함께 같은 벌을 받지 않으려면
서둘러서 죄인들의
무리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루카
21,20-22).”
죄인들이 멸망할 때 같이 있다가 휩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