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죄인을 부르러(마태 9,9-13)

아모스 예언자는 빈곤한 이를 짓밟는 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날이 올 것이라고 전한다. (아모스 8,4-6.9-12)
4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5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6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9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
10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나는 모든 사람이 허리에 자루옷을 두르고, 머리는 모두 대머리가 되어,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게 하고, 그 끝을 비통한 날로 만들리라.
11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12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찾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세관에 있던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드시자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못마땅해한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 (마태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아모8,4-6,9-12)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
앞선 아모스서 8장 4~6절에서는 타락한 선민의 대표로서의 북부 이스라엘 왕국의 지배층을 향하여 주 하느님 심판의 원인으로서의 저들의 악행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아모스서 8장 7~10절에서는 저들의 악행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주 하느님께서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이는 심판을 내리실 것이며,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애통할 것을 예고하였다.
이제 아모스서 8장 11절이하 13절에서는 심판날이 반드시 도래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때에는 말씀이 단절될 것을 경고한다. 이러한 내용을 시작하는 본문은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라는 표현보다 '보라, 그날이 온다'라는 표현이 먼저 나온다.
하느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기를 마지않던 자들이 멸망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아모스서 8장 11절부터 13절까지 단락의 첫 부분에서 '보라'라는 의미의 감탄사를 가장 먼저 기록한 것은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동시에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그날이 온다' 에 해당하는 '야밈 빠임'(yamim baim)에서 '빠임'(baim)은 '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뽀'(bo)의 분사형이다.
분사형은 문맥에 따라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의미를 모두 가질 수 있지만, 본문에서처럼 '힌네'(hinne; 보라)와 같은 감탄사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에는 모두 미래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단순한 미래에 대한 예상이 아닌, 예언자에 의해 선포되는, 반드시 성취될 미래에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도록 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즉 본문은 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아모스서 8장 11~13절의 맨 앞에 기술함으로써 그것을 확실히 선언하고 그것의 성취를 강조한 것이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심판으로 보내실 기근의 성격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본절 상반절의 하느님께서 내리신 '굶주림'(기근)이라는 표현이나 본문의 '양식'이라는 표현은 모두 '라아브'(laab)로 동일하다.
창세기 41장 54절 등에서 '흉년'이라는 의미로 번역된 '라아브'(laab)는 개인적 가난이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굶주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보다 자연적 재해나 인위적 전쟁등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굶주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이 기근이나 주림은 개인적 노력으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재앙의 결과인 것이다. 또한 '양식'에 해당하는 '레헴'(lehem)은 장기적 생존을 위해 넉넉하게 쌓아 둔 양식이라는 의미보다 하루 정도의 식사를 의미하는 빵(떡)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창세18,5; 판관8,5),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기본적 식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영역본들은 '레헴'을 '빵'(bread) 혹은 '음식'(food)이라고 번역하였다. 즉 본문이 말하는 먹을 것의 부족은 쌓아 놓은 양식이 없어서 앞으로가 걱정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당장 한 끼의 식사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긴박한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물이 없어 목마르다는 표현에서 '목마름'(갈증)에 해당하는 '차마'(tsama)라는 표현도 전쟁 등으로 인해 마실 물이 없어 당장 사람이 목말라 죽어가는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표현이다(애가4,4; 호세2,3). 그런데 본문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기근이 이러한 양식이나 물을 먹지 못한 기근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굶주림과 갈증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 심판의 근본적 원인이 육신을 위한 양식과 물을 먹지 못해서 생긴 기근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을 먹지 못해서 생긴 기근 때문임을 나타내며, 육식의 양식과 물보다 영적인 양식, 즉 주 하느님의 말씀의 중요성과 그것을 지금 당장이라도 취해야 한다는 긴박성을 동시에 나타낸다.
이상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준다. 첫째, 인간 존재가 먹고 마시는 일과 관련한 육체적 필요만을 충족해서 살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인 양식과 영적인 음료인 하느님의 말씀이며, 이것을 먹고 마셔야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신명8,3; 마태4,4).
둘째,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상징하므로 하느님의 말씀이 기근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가 떠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보호하심과 자비로이 여기심,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즉 하느님의 떠나심은 먹을 것이나 마실 물로 인한 기갈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은 먹을 것이나 마실 것만을 추구하였지만, 이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대해서는 추구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어리석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핍박하며 심지어 그들의 말씀 선포를 가로막기까지 하였다(아모 7,13; 12,12).
북부 이스라엘에 닥칠 심판은 단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바닥나서 발생한 기근이 아니고,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추구하기는커녕 거부하고 배척한 북부 이스라엘의 교만이 자초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셨고,
마태오가 즉시 응답했다는 단순한 이야기인데,
사도 마태오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전후
상황은 알 수 없습니다.
그 당시의 다른 세리들처럼 마태오도 죄인이었는지,
아니면 세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청렴결백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직업이 세리였으니까 다른 세리들처럼 죄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쁜 편견이고, 선입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죄인에게 베푸신 자비가 아니라,
그가 사도로 뽑힐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실 때,
직업이나 출신 같은 것은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0-11)”
여기서 바리사이들이 한
말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한 말과 비슷합니다.
“...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30).”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에게 어찌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십니까?”)
큰아들은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혼내고 쫓아내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리 같은 죄인들을 꾸짖으시고
심판과 멸망을 경고하시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꾸짖으시기는커녕
마치 친구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듯이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니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처럼 화가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13).”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
(“너의 아우가 죄를 지은 것은 맞지만, 자기 잘못을 뉘우쳤고 회개했다.
그러니 그의 회개를 기뻐하면서
그를 용서하고 받아주어야 한다.”)
지금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세리들(죄인들)은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회개하고 죄에서 벗어난(또는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또는 세리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는데,
어떻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한 세리들은
적어도 예수님을 배척하지는 않은 사람들, 즉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세리들이 회개했거나,
아니면 회개하는 중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세리들을 죄인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사실은 ‘회개한(또는 회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회개했다면 죄인이 아닌 것입니다.
또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경우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회개하려는 노력만 보시는 분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만나시는 이유를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우리 모두를)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이(우리 모두가) 다 병든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도 만나셨고, 세리들도 만나셨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도,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만나시는 이유를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죄인들’을 만나시는 이유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만나시는 이유입니다.)
처음부터 ‘의인’이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우리 모두가) 다
죄인인데,
회개한 죄인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인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라는 말씀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해석하고 설명할 때,
죄인들을 가리켜서 ‘그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이라는 표현은 자기
자신은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죄인들은 ‘그들’이 아니라 ‘나’(우리)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그들’이라는 표현은
자기 자신은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그것은 바리사이들과 같은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바리사이들
같은 면도 있고, 세리들 같은 면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시는 것을 기뻐하면서도
내 눈에 아주 나쁜 죄인으로만 보이는
‘그’를 구원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을 일으킬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죄가 더 큰 죄인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메시아의 구원이 필요한, 같은 처지의 죄인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구원을 향해서 함께
나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