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간 월요일]나를 따르라 (마태 8,18-22)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열거하고, 그들의 멸망을 예고하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아모스 2,6-10.13-16)
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7 그들은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살길을 막는다. 아들과 아비가 같은 처녀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 8 제단마다 그 옆에 저당 잡은 옷들을 펴서 드러눕고, 벌금으로 사들인 포도주를 저희 하느님의 집에서 마셔 댄다.
9 그런데 나는 그들 앞에서 아모리인들을 없애 주었다. 그 아모리인들은 향백나무처럼 키가 크고 참나무처럼 강하였지만, 위로는 그 열매를, 아래로는 그 뿌리를 없애 주었다. 10 그리고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끈 다음, 아모리인들의 땅을 차지하게 하였다.
13 이제 나는 곡식 단으로 가득 차 짓눌리는 수레처럼 너희를 짓눌러 버리리라. 14 날랜 자도 달아날 길 없고, 강한 자도 힘을 쓰지 못하며, 용사도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하리라. 15 활을 든 자도 버틸 수 없고, 발 빠른 자도 자신을 구하지 못하며, 말 탄 자도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하리라. 16 용사들 가운데 심장이 강한 자도 그날에는 알몸으로 도망치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시편 50(49),16ㄴㄷ-17.18-19.20-21.22-23(◎ 22ㄱ)
◎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 어찌하여 내 계명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너의 입에 담느냐? 너는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뒷전으로 팽개치지 않느냐? ◎
○ 너는 도둑을 보면 함께 어울리고, 간음하는 자들과 한패가 된다. 너의 입은 악행을 저지르고, 너의 혀는 간계를 꾸며 낸다. ◎
○ 너는 앉아서 네 형제를 헐뜯고, 네 친형제에게 모욕을 준다. 네가 이런 짓들 저질러도 잠자코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 아는구나. 나는 너를 벌하리라. 너의 행실 네 눈앞에 펼쳐 놓으리라. ◎
○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내가 잡아 찢어도 구해 줄 자 없으리라.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율법 학자에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고 하시고,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따르겠다는 이에게는, 내버려 두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마태오 8,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19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21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아모스 예언자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제1독서 (아모2,6-10.13-16)
"이스라엘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넘겼기 때문이다."(6)
아모스서 2장 6절부터 16절까지는 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이다. 아모스서 2장 6절 하반부부터 8절까지에서 북부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고발된 내용은 자국 내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란 특징이 있다. 그리고 남부 유다에 대해서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점에 대해 지적했지만, 북부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사회의 불의에 대한 지적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 역시 북부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는 잘하였고, 도덕적으로만 잘못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북부 이스라엘은 왕국 분열 초기 여로보암 왕 때부터 베델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우상을 섬기기 시작한 이래로 우상 숭배를 근절하지 못하고 끝내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모스서 2장 6절 하반부부터 8절까지의 내용은 북부 이스라엘의 뿌리깊은 우상 숭배를 전제로 한것으로 그것이 사회적, 윤리적 타락으로 귀결되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모스서 2장 6절은 이러한 사회적 고발을 담고 있는 내용으로서 북부 이스라엘 사회가 자신의 경제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인신 매매를 하는 매우 부패한 사회였음을 잘 보여준다.
원문으로 볼 때에 본문은 '그들이 팔아넘겼기 때문에'로 직역되는 '알 미크람'(al mikram)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미크람'의 원형은 '팔았다'의 의미의 동사 '마카르'(makar)이다. '마카르'는 정상적 상거래를 나타내는 용례보다는 사람을 사고 팔거나 진리를 팔아 넘기는 부정적 상행위를 지적하는 용례에서 더 자주 사용되었다.
특히 금전적 이익을 얻기 위해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 파는 비도덕적 행위를 묘사하는데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일례로, 이 단어는 레아와 라헬이 라반에게 불평을 토로하면서 아버지가 돈을 받고 자신들을 야곱에게 팔아 넘겼음을 진술하는데 사용되었다(창세31,15). 또한 이 단어는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파는 것, 즉 인신 매매를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되었다(창세37,28).
한편 '알 미크람'에 이어지는 내용은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신매매를 하는 이유를 대구 형식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인신 매매의 대가로 은과 신발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은'에 해당하는 '케세프'(keseph)는 일차적으로 '은'이란 의미를 지니지만 '돈'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에서는 은이 화폐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창세17,13.23). 또한 '신발'에 해당하는 '나알라임'(naallaim)은 당시 여러 신발의 종류에서 가장 싼 샌들 모양의 신발을 지칭한다.
이같은 표현들은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온 천하와 우주보다도 더 귀중하다고 말씀하신 사람들을 단 몇 푼에 또는 신발 한 짝에 팔아 넘길 정도로 무가치하게 여겼다는 것을 부각시켜준다. 그리고 본문에서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기록되었다. 한 부류는 '무죄한 이'(의인) 이었고, 다른 부류는 '빈곤한 이'(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무죄한 이'(의인)에 해당하는 '찻디크'(tsadiq)는 '공의로운' 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다. 이 단어는 창세기 6장 9절에서 홍수의 심판 속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에 대해서 사용되기도 하였고,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찾으려고 했던 의인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북부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의인을 핍박하고 노예로 팔아 넘겼다는 것은 그 사회가 얼마나 불의한 사회인지를 역설해 주는 것임과 동시에 스스로 정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음을 부각시키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빈곤한 이'에 해당하는 '예브욘'(yebyon)은 탈출기 23장 6절, 신명기 15장 7절 등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돌보고 보살펴야 할 존재로 규정된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북부 이스라엘에서는 의인과 가난한 사람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돌보기는 커녕 착취와 핍박의 대상으로 여긴 것이다. 이것은 북부 이스라엘이 본래 구현해야 할 하느님의 자비와 동정(연민)과 상관없는 곳이 되었고, 무자비하고 냉혹하여 비인간적인 사회가 되었음을 함축하고 있다.
북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첫번째 내용에서 의인과 가난한 자에 대한 인신매매가 지적된 것을 통해 볼 때, 북부 이스라엘에서 주된 심판의 대상이 될 사람들은 이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반대 부류의 사람들인 불의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송영진 모세 신부
“그때에 한 율법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19-20)”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는 어떤 율법학자의 말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만 놓고 보면,
고통도 위험도 어려움도 다 받아들일 각오가 잘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말로 그런 각오가 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율법학자의 말은, 최후의
만찬 때 베드로 사도가 했던 말과 비슷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 22,33).”
베드로 사도는 말을 하던 당시에는 ‘진심으로’ 말했을 텐데,
결과를 보면 거짓말을 한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겁에 질려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처럼 그 율법학자도 ‘진심으로’
말했겠지만,
그가 정말로 예수님을 잘 따르는 제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그에 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은
그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생활은 ‘풍찬노숙(風餐露宿)’,
즉 글자 그대로 노숙자 같은 생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호의호식이나 부귀영화 같은 것은 기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그런 생활을 하고 계시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그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노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온갖 어려움과 고통과 시련을 겪을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런데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상황은 지상에서의 생활이고,
하늘나라에서는 정반대가 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8,21-22).”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지상의 일에 너무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과 아픔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나가는 일일 뿐입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의 영혼은 하느님께 맡기고,
살아 있는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슬픔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믿음 없는 태도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언젠가는 다시 만난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져야 하고,
그 믿음과 희망으로 슬픔을 극복해야
합니다.
물론 그 슬픔과 아픔이
사람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사별의 슬픔과 아픔으로 힘들어 하고 있을 때,
아무것도 아닌 일로
그런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는 것,
그것이 선이고
사랑입니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슬픔과 아픔에 대한 공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없을 때 우리는 “인간도 아니다.”
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사랑으로’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은 함께 일어서기 위해서입니다.
함께 예수님을 따르고,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기 위해서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이야기
하나가 더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62)”
예수님을 따르려고 모든 것을
버렸다면(루카 5,11),
이미 버린 것들에 대한 미련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작별 인사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련, 아쉬움 같은 것들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멸망해 버린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창세 19,26).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소금 기둥은 허망함, 어리석음 등을 상징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해서
가장 중요한
것, 즉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을 미래,
현재, 과거로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면,
지금은 힘들어도 ‘미래’에는
참 행복을 얻는다는 가르침으로,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라는 말씀은,
‘지금’ 당장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한 가르침으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은,
이미 버린 ‘과거’는 철저하게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면 지상에서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과 희망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막연한 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는 순간 하늘나라의 행복도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는 동안에는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행복과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 참 행복과 안식이 시작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이스라엘의 죄악을 폭로하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오늘날 신자본주의가 낳고 있는 폐단과 별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가계 부채로 인한 경제적 압박과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체불, ‘열정 페이’와 비정규직은 청년들의 희망을 앗아 갑니다.
“그들은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살길을 막는다.” 개발이란 명목으로 힘없는 이들을 내쫓고, 기득권자들의 탐욕이 사회적 양극화를 부추겨, ‘흙 수저’를 물고 나온 이들의 분노와 절망이 커져 갑니다.
“아들과 아비가 같은 처녀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 자극적이고 향락적인 미디어의 범람과 인간의 숨은 욕망을 부추기는 소비문화는 거룩함을 상실한 폭력의 세상을 만들어 냅니다.
“제단마다 그 옆에 저당 잡은 옷들을 펴서 드러눕고, 벌금으로 사들인 포도주를 저희 하느님의 집에서 마셔 댄다.” 종교적 삶의 가치가 커지면 세속적 욕망은 상대적으로 약해져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종교인이 늘어나도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이 더 커지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의 종교가 오히려 욕망을 자극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도 합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는 복음 환호송 시편 말씀대로, 우리는 “시대의 표징을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사목 헌장, 4항) 하는 교회의 소명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