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간 목요일]화해하여라 (마태5,20ㄴ-26)

2016. 6. 9. 오전 5:10:56

글자


 


[연중 제10주간 목요일]화해하여라 (마태5,20ㄴ-26)



엘리야가 카르멜 산에서 주님께 기도하자 큰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열왕상 18,41-46)
그 무렵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42 아합이 음식을 들려고 올라가자, 엘리야도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었다. 43 엘리야는 자기 시종에게 “올라가서 바다 쪽을 살펴보아라.” 하고 일렀다.
시종이 올라가 살펴보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엘리야는 일곱 번을 그렇게 다녀오라고 일렀다.
44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에 시종은 “바다에서 사람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 올라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엘리야가 시종에게 일렀다. “아합에게 올라가서, ‘비가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병거를 갖추어 내려가십시오.’ 하고 전하여라.”
45 그러는 동안 잠깐 사이에 하늘이 구름과 바람으로 캄캄해지더니,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아합은 병거를 타고 이즈르엘로 갔다. 46 한편 엘리야는 주님의 손이 자기에게 내리자, 허리를 동여매고 아합을 앞질러 이즈르엘 어귀까지 뛰어갔다.


시편 65(64),10ㄱㄴㄷㄹ.10ㅁ-11.12-13(◎ 2ㄱㄴ)
◎ 하느님, 시온에서 당신을 찬양함이 마땅하옵니다.
○ 당신은 이 땅에 찾아오시어, 넘치는 물로 풍요롭게 하시나이다. 하느님의 강은 물로 가득하고, 당신은 곡식을 영글게 하시나이다. ◎
○ 정녕 당신이 장만해 주시나이다. 고랑에 물 대시고 이랑을 고르시며, 비를 내려 부드럽게 하시어, 새싹들에게 복을 내리시나이다. ◎
○ 한 해를 은혜로 풍요롭게 하시니, 당신이 가시는 길마다 기름진 땅이 되나이다. 사막의 풀밭에도 윤기가 흐르고, 언덕들도 기쁨의 띠를 두르나이다. ◎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의로워야 한다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니, 예물을 바치려 할 때에도 원망 품은 형제가 생각나면 그 형제와 먼저 화해하라고 하신다. (마태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제1독서 (1열왕18,41-46)

그 무렵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아합이 음식을 들려고 올라가자, 엘리야도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었다.(41~42) 

열왕기 상권 18장의 마지막 부분인 41절에서 46절까지는, 그 동안 방관자로만 있었던 아합 왕과 엘리야가 대화를 나누며,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북부 이스라엘의 가뭄 심판이 종결된 사실이 다루어진다. 

본문의 '올라가셔서'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아합은 바알의 예언자들을 처형하는 키손 천에 까지 엘리야와 함께 내려왔었다. 

그리고 이제 바알 예언자들에 대한 처형이 끝나자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카르멜산 어디 쯤인가 있는 왕의 장막으로 다시 이동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장막으로 돌아가 먹고 마시라고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들이 대결을 벌이는 동안 아무도 점심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 먹고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야의 이 말은 단순히 먹고 마시며 휴식을 취하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있음이 분명하다.

'먹고 마시는'행위는 기쁨에 의해 초래된 '기아와 갈증'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본문에서는 북부 이스라엘에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가뭄의 재앙이 완전히 종결될 것임을  암시한다. 즉 이제는 모든 근심의 원인이 제거되었으니 안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엘리야가 아합을 만났을 때엘리야와 아합 사이의 긴장감은 아합의 바알 숭배에서 비롯 것이었다(1열왕16,31~33; 17,1). 

그런데 이제 바알의 거짓됨이 만천하게 드러났고, 백성들도 하느님을 참 하느님으로 고백하였으며,

바알 예언자들도 몰살시켰기 때문에 이러한 긴장의 원인이 제거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엘리야는 바알 숭배로 인해 생긴 가뭄 재앙이 곧 끝나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아합의 괴로움도 곧 끝날 것이기 때문에, 아합에게 안심하고  음식을 즐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본문은 엘리야가 아합이 지적한 대로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는 자' (17절)가 아니라 왕과 백성들을 위하는 자임을 드러낸다.  

이것은 풍요와 농경의 신으로 알려졌던 바알이 비를 주관함으로써 양식을 공급하는 주체가 아니라 오직 엘리야를 예언자로 세우신 주 하느님만이 그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니' 

아합이 이제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원문을 보면, 본문의 핵심 단어가 '비'가 아니라 '소리'이다. 엘리야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직 구름 한 점 없는(43절) 맑은 날씨 속에서도 그가 '비가 쏟아지는 소리' 를 들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느님의 약속(1절; "가서 아합을 만나라. 내가 땅 위에 비를 내리겠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엘리야가 구름 한 점 없는 상황에서 아합에게 앞으로 쏟아질 비로 말미암아 미리 즐거워 하도록 명령하는 모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전에 폭우 때문에 길이 막혀 통행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아합에게 어서 피하라고 지시한 내용과 대조를 이룬다(44절). 

이러한 사건 전개는 하느님을 섬기는 엘리야가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능력있는 존재인 반면에, 바알을 숭배했던 아합은 왕이었지만 엘리야의 지시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무능한 존재임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엘리야도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었다.'(42) 

아합은 엘리야의 지시에 따라 먹고 마시기 위해 자신의 거처로 '올라간' 반면에, 엘리야기도하기 위해 카르멜 산 정상으로 '올라가' 땅에 꿇어 엎드렸다. 

저자는 '올라가다' 란 의미를 지니는 '알라'(alah) 란 동일한 동사를  반복하여 사용했지만 그 목적지를 다르게 밝힘으로써, 아합의 삶의 방향  내지는 신앙이 엘리야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몸을 수그리고'에 해당하는 '와이그하르'(waighar)의 원형 '가하르'(gahar)기도하기 위해 드리는 자세를 표현하는 동사로서 성경 전체에서 오직 열왕기에만 등장하며, 그것도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건에서만 등장한다(2열왕4,34.35). 

엘리야는 기도하기 위해 이와같은 자세를 취했고, 엘리사는 수넴 여자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이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는 점만 다를 뿐, 이 동사는 양자 모두 하느님께서 주시는 예언자적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기도에 몰두 했음을 나타낸다. 

엘리야는 땅에 꿇어 엎드리는 것(be cast himself down)에서 그치지 않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엘리야의 이러한 기도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열망하며 취하는 겸손한 기도 자세의 극치이며, 기도에 완전히 몰두하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2014. 6. 12 연중 제10주간 목요일(마태 5,20ㄴ-26)/<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누군가를 미워할 때>

<화해하여라.>송영진 모세 신부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1) 이 말씀은, “형제와 일치를 이룬 상태에서 하느님을 섬겨야 진정한 ‘섬김’이 된다.” 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너희가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싸우면, 너희는 내 제자라고 말할 수 없다.”가 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섬기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형제와 화해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려거든 먼저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여라.” 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나의 어떤 잘못 때문이라면, 내가 먼저 찾아가서, 내가 먼저 용서를 청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형제가 나를 용서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회개’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만일에 고해성사만 보고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대로 회개한 것이 아니고, 고해성사의 진실성을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면?
그래도 먼저 찾아가서, 먼저 화해를 청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먼저 가야 하는가?” 라고 말하지 말고...
그의 오해를 풀어 주고, 그가 원망하는 마음과 미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도 중요한 이웃 사랑 실천입니다.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이웃을 용서하여라.”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그래서 우리는 형제를 용서해야 할 일은 잘 생각하긴 하는데,
형제에게 용서를 청해야 할 일은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형제를 미워하는 일은 잘 의식하면서도
형제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은 모르거나 의식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신앙인으로서 형제를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형제가 나를 미워하게 만드는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악의 없는 가벼운 농담이라고 해도 형제가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을 수 있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말씀을,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12,7).” 라는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면서 형제의 사정에는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형제도(이웃도) 사랑해야 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형제도(이웃도) 섬겨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거짓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여기서 ‘형제’ 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 안의 신앙인들만 형제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도 형제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복음 선포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랑 실천의 대상은 당연히 ‘모든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 준다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사랑과 자비 없이 교리만 전한다면, 그것은 복음 선포를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라는 말씀을, “주님께 은총을 청하려면 먼저 형제와 화해와 일치를 이루어라. 그런 다음에 청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미사 순서를 보면,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평화의 인사’를 한 다음에 영성체를 합니다.
이것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일치를 이룬 다음에 영성체를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미사 때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용서’한다는 뜻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게 되는 ‘평화의 인사’는 화해와 일치의 표시입니다.


만일에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또는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게 만든 채로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면, 그것은 입술로만 바치는 기도가 되어버립니다.
또 그 상태에서 나누는 평화의 인사는 거짓 인사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영성체를 한다면, 바로 ‘모령성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고 싶다면, 받기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5,20ㄴ-26)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2)

 

한글 새 성경에는 단순히 '형제'로 번역되어 나오지만, 원문에는 인칭대명사와 정관사가 붙어 '토 아델포 아우토'(to adelpho autou; to his brother)에 해당하는 '(바로)그의 형제에게'가 된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형제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형제'는 혈육이나 같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들 뿐만 아니라 비신앙인이나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던 사람까지 포함할 수 있다(루카10,29~37). 그러니까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사랑으로 감싸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누구나'에 해당하는 '파스'(pas; whosoever)라는 단어는 '전체'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사람은 그 누구나 빠짐없이 모두'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을 자구적으로 해석하면,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예외없이 모두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의로운 분노(의노)는 여기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것은 과거 예수님이나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 바오로도 악한 자들에게 대해 거룩한 분노를 발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보여진다(마태3,17; 마르3,5; 사도10,16). 

마태오 복음 5장 22절의 '성을 내는 자'에 해당하는 '오르기조메노스'(orgizomenos; who is angry with-without a course)가 일시적인 흥분을 나타내는 '튀모스'(thymos)와 달리, 주로 악한 뜻을 가지고 남을 해치고자 하는 지속적인 분노를 가리킨다. 

더욱이 표준 원문에 삽입된 '까닭없이'에 해당하는 '에이케'(eike)는 정당한 사유없이 자신의 감정이나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분노를 가리켜준다.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악한 뜻(악의)을 가지고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을 살인하는 죄로 규정하시는 이유는 많은 경우의 살인이 바로 성을 내고 미워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죽이는 실제적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인 동인(動因)인 그 마음에까지 살인하는 죄를 확대 적용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바보'에 해당하는 '라카'(Raca)는 히브리어 '레크'(req)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레크'(req)는 또한 '황폐하다', '비다'는 뜻을 지닌 '루크'(ruq)에서 유래하여 '빈말', '허사', '헛것'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 '(머리가 텅 빈) 모자란 자'나 도덕적인 정도가 낮은 '사악한 자'를 가리킨다. 

성경에서는 '잡류', '건달'(판관11,3), '무뢰한'(2역대13,7)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상대방에 대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고 인격을 모욕하는 심한 욕설이다. 

그리고 '멍청이'로 번역된 '모레'(More; You fool)는 '모로스'(moros)의 호격이다. '모로스'(moros)는 '입을 다물다'는 뜻이 있는 '뮈오'(myo)에서 유래하여 '말하지 않는 자', '우매한 자'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집회서 22장 11절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자'라는 의미로도 쓰여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단죄를 넘어선 종교적인 단죄이며, 멸망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라카'(Raca)보다 더 심한 욕설이 된다. 

이러한 의미의 욕설을 하는 자는 바로 하느님의 고유 영역인 심판권을 남용한 죄를 범한 것이며, 영혼의 살인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 죄를 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의 육체적 목숨을 해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격을 모독하여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것까지 살인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새로운 기준이요 동인인 내적인 분노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그러한 자가 받게 될 형벌이 재판 받음, 최고 의회에 넘겨짐, 불붙는 지옥에 넘겨짐으로 묘사하신다. 이것은 그 형벌의 정도가 점차 심해지는 삼중 점층법적 묘사가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된 '게엔난'(geennan; hell)의 원형 '게엔나'(geenna)'골짜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까이'(gai)와 예루살렘의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힌놈'(hinnom)이 결합되어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갖는 '까이힌놈'(gaihinnom)의 음역(소리나는 데로의 번역)이다. 

'힌놈의 골짜기'(Valley of Hinnom)는 예루살렘 남쪽과 남서쪽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인데, 역사적으로 이곳에서 가나안의 우상인 몰록에게 바치는 인신제사가 행하여졌으므로(2열왕23,10) '살육의 골짜기'로도 불리워졌다(예레19,6). 

이처럼 이곳은 사람을 불태워 우상에게 제사지냈던 끔찍한 범죄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쓰레기들이 태워져서 늘 연기가 나며 불이 타오르는 더럽고 공포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범죄한 자가 죽은 후 들어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인 '지옥'을 '힌놈 골짜기'에 비유하였다. '힌놈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희랍어 '게엔나'(geenna)가 '지옥'으로 번역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6. 11.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선교 (마태 10,7-13)16.06.11조회 148[연중 제10주간 금요일] 간음 죄 (마태 5,27-32)16.06.10조회 50[연중 제10주간 목요일]화해하여라 (마태5,20ㄴ-26)16.06.09조회 94[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율법의 완성 (마태 5,17-19)16.06.08조회 147[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세상의 소금과 빛 (마태 5,13-16)16.06.07조회 94[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참 행복 (마태 5,1-12)16.06.05조회 247[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루카 2,41-51)16.06.04조회 476.3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루카 15,3-7)16.06.04조회 49[연중9주 수요일] 6월 1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마르12,18-27)16.06.01조회 201[연중 제9주간 화요일] 5. 31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루카1,39-56)16.05.31조회 165연중 제9주간 월요일]포도원소작인의 비유 (마르 12,1-12)16.05.29조회 189[연중 제8주간 토요일] 권한 (마르 11,27-33)16.05.27조회 168[연중 제8주간 금요일] 무화가 나무 저주 (마르 11,11-25)16.05.27조회 52[연중 제8주간 목요일]예리코 눈먼 이 (마르 10,46ㄴ-52)16.05.26조회 52[연중 제8주간 수요일] 출세와 섬김 (마르 10,32-45)16.05.25조회 57[연중 제8주간 화요일] 영원한 생명 (마르 10,28-31)16.05.24조회 69[연중 제8주간 월요일] 낙타와 바늘귀 (마르 10,17-27)16.05.23조회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