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간 화요일] 영원한 생명 (마르 10,28-31)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구원의 시간을 생각하고 정신을 차려 모든 희망을 걸고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이른다. (베드로 1서 1,10-16)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의 10 구원에 관해서는 여러분이 받을 은총을 두고 예언한 예언자들이 탐구하고 연구하였습니다. 11 그들 안에서 작용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께 닥칠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증언하실 때에 가르쳐 주신 구원의 시간과 방법을 두고 연구하였던 것입니다. 12 예언자들은 그 일들이 자신들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일들이 하늘에서 파견된 성령의 도움으로 복음을 전한 이들을 통하여 이제 여러분에게 선포되었습니다. 그 일들은 천사들도 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13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14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15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1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98(97),1.2-3ㄱㄴ.3ㄷㄹ-4(◎ 2ㄱ)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고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마르코 10,28-31)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제1독서 (1베드1,10-16)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했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4~15)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14절에서 수신자들의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와 이후의
현재 신분을 대조하면서 과거를 단절하고 현재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한다.
그들은 복음을 받기 전에 무지하여 각종 더러운 욕망들을 추구하면서 살았었으나
이제는 하느님의 은총 아래에 있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순종하는 자녀로서 ~~해서는 안된다'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새 성경이 '~로서'로 번역한 접속사 '호스'(hos)는 자격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영어의 'as'의 의미이다.
그리고 '무지했던 때'에 해당하는 '엔 테 아그노이아'(en te agnoia)에서
'아그노이아'(agnoia)의 원형 '아그노이아'(agnoia)는 '무지'(ignorance)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희랍어 구약 성경 70인역(LXX)과 신약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이방인의 특성인
하느님께 대한 무지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시편79,6; 예레17,30; 갈라4,8; 에페4,18).
이러한 용례는 본 서신의 수신자들이 사욕들을 따라 산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었을 때에 행한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욕망'에 해당하는 '에피튀미아이스'(epithymiais)는 복수 명사로서
'사욕들'(lusts; evil desires)이란 의미이다.
원형 '에피튀미아'(epithymia)는 어떤 대상을 향한 욕구라는 의미로서
본래는 가치 중립적 단어이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대부분 도덕적, 영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여 버려야 할 욕망을
나타내는 용례로 쓰였고(요한8,44; 로마13,14; 에페4,22; 2티모2,22 등), 베드로 전서에서도
동일한 용례로 쓰였다(1베드2,11; 4,2).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는 욕망은 경계하여 엄격히 통제하지 않으면
사람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죄를 짓게 하며,
자연적인 본능의 충동대로 살게 하는 것들로서
주로 이방인들의 특성인 도덕적 죄악을 가리킨다
(마르4,19; 갈라5,16; 1베드2,11; 4,2; 1요한2,16).
사도 베드로는 지금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 갖추어야 할
실천적인 요구로서 그런 욕망들을 따르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베드로 전서 1장 13,14절을 통해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권고한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15~21절을 통해 이렇게 성도들을 향하여
거룩한 삶을 권고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특히 베드로 전서 1장 15~17절에서는 성도는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거룩'이라는 것은 어떤 예식이나 의식상(ritual)의 정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도 베드로는 지금 유다인들이 지키던 전통, 즉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부지런히 씻거나
장터에서 돌아와 반드시 몸을 씻고 음식을 먹거나 그외에도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관례(마르7,3.4) 등에 관하여 '거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느님과 통교함에 있어 필요 불가결한 영적, 도덕적 거룩한 정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 전서 1장 15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금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결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을 닮은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내면적이거나 '예수님의 구속사업의 공로의 은혜을 입어서
정결(거룩)하게 된' 존재론적인 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는 이 '거룩'을 일상의 구체적인 삶의 행동과 연관된
'행실'('anastrophe'; '아나스트로페'; manner of conversation)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세상 속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면을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10,28-31)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29~30)
마르코 복음 10장 29절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라고 기록되었지만,
마태오 복음 19장 29절에서는 '내 이름 때문에'라고 기록되어 있고,
루카 복음 18장 29절에서는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내 이름', '나와 복음', '하느님의 나라'는 다같은 의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며,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때문에', '~을 위하여'에 해당하는 '헤네켄'(heneken; for; for sake)은
전치사 '헤네카(heneka)의 소유격인데, 여기서 두 번 언급된 것은
이 전치사와 함께 쓰인 단어들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유가 아닌 바로 '예수님 당신과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족이나 집 등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는 것만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버린 사람'에 해당하는 '호스 아페켄'(hos apheken; one who has left)을
통해서 외적 및 내적 분리를 의미하는 포기를 가르치는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내어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갈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 속으로부터 진정으로 예수님을 가장 소중한 분으로 여기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되는 절대적인 기본 조건인 것이다.
한편, 마르코 복음 10장 30절의 '백 배'(a hundred times)는 반드시 산술적 의미의
백 배가 아니며,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내어버린 것의 백 배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많은 보상을 받게 됨을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이다.
그리고 그 보상도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그것보다 휠씬 더
소중한 영적인 축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그 보상이 현재와 이 세상의 삶이 끝 난 후 오는 세상인 내세
(미래)에 모두 받게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맛보며 살고,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한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 때문에 혈육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떄로는 핍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은 영적으로 더 많은 가족을
얻으며, 마음 속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와 기쁨을 주님 안에서
누리고 살기 때문에 이 말씀은 참된 내용인 것이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예수님을 위해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풍요'만이 아니라
'박해'도 겸해서 받는다는 내용이 여기 마르코 복음에만 나온다.
여기서 '박해'에 해당하는 '디오그몬'(diogmon; persecution)의 원형은
'디오그모스'(diogmos)이다.
신약에서 '디오그모스'(diogmos) 말고도 '박해'를 나타내는 단어가 하나 더 있는데,
코린토 1서 4장 12절에 나오는 '블라스페메오'(blasphemeo)라는 동사이다.
이 동사의 뜻은 '비난하다', '중상하다', '헐뜯다'이다.
이 두 단어는 의미상으로는 모두 '박해', '핍박'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세부적으로는 '블라스페메오'(blasphemeo)는 '말을 통한 박해'이고,
'디오그모스'(diogmos)는 '구체적인 행위로 가해지는 박해'를 가리킨다.
여기 본문에서는 '~중에', '~가운데', '~함께'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메타'
(meta; with)와 함께 쓰였는데, '메타 디오그몬'(meta diogmon;
with persecution)은 '박해 중에', '박해 가운데'라는 뜻이 된다.
이 말이 공관 복음서 중에 마르코 복음에만 기록된 것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자신의 일차적 독자인 로마 신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로마에 있는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 황제 네로의
극심한 박해 속에 있음을 알고, 그들이 겪고 있는 박해가 그리스도인이면
필연적으로 겪어야 되는 것임을 강조하며 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 내용을 부각시켰다(마태5,10~12).
<따름과 보상> 송영진 모세 신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베드로 사도가 한 이 말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
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놀라서
“그러면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른
저희는 바늘귀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
라는 뜻으로 한 질문으로 생각됩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라는 질문이 더 있는데(마태 19,27),
이 말도 역시 “저희는 바늘귀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을,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으니 합당한 보상을 주십시오.”
라고
요구하는 말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9-31).”
이 말씀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바늘귀로 빠져나가게 될 뿐만 아니라,
풍성한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약속하신 적이 없고,
사도들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있는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을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이라는 말 뒤로 옮겨서 읽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됩니다.
“...... 현세에서는 박해를 받을 때도 있겠지만
내세에서는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마태오복음 19장 28절-29절을 보면, 백 배로 받는 일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에서,
즉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을 보면,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30).” 라고 되어 있어서
마태오복음과
모순된다고 시비를 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예수님의 가르침 전체와 교리를 바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의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다.’ 라는 말은,
현세에서 실제로 물질적인 보상을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인 은혜를 받게
된다는 뜻으로,
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풍요를 누리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만일에 루카복음의 표현만
생각하고서,
예수님께서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보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은 그 약속을 한 번도 안 지키신
분이 되어버립니다.
사도들도 그렇고, 순교자들도 그렇고, 성인 성녀들도 그렇고,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사이비’이고 거짓
예언자입니다.)
‘백 배’ 라는 말은 풍성한
은총을 뜻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재산과 가족이 백 배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의
행복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뿐인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지상에서는 부자로
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는 없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는
것이 아니더라도,
또는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것이 아니더라도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재물에
대해서는 마음이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인간들의 지상에서의 처지와 하느님 나라에서의 처지가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온갖 호사를 누리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서는 관심도 사랑도 없이 부유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첫째였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꼴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모든 것을 풍성하게 받게 될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꼴찌였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많을 것이다.’ 라는 말은,
처지가 역전되는 일이 백 퍼센트는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겉으로는 잘 구분이 안
되지만,
예수님과 복음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마태 6,1) 한 일이라면,
즉 ‘위선’이라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버림’과 ‘따름’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마태 6,4).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주일 아침 늦잠을 포기하고 성당에 가서 미사를 합니다. 천주교 신앙을 반대하는 부모나 형제 친척을 뒤로하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어렵게 번 재물을 교회 유지나 자선 사업에 기부합니다. 신앙인이기에 사회에서 하지 말아야 할 행위와 선택의 고민이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들이 나의 구원을 보장해 주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대변하듯,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일이나 어떤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전체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만일 영원한 구원을 얻기에 방해가 된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선택입니다.
이러한 희생과 추종은 ‘고난 뒤에 따라올 불사불멸의 영광’,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낳게 합니다. 우리 마음에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걷는 신앙의 길에는 박해와 시련이 따르지만 아울러 넘치는 보상이 뒤따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가족을 멀리한 사람들은 백 배가 넘는 신앙의 형제자매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포기한 재물은 하늘 나라의 보물 창고에 저장되며, 우리가 베푼 자선은 하늘 나라의 상급으로 빛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보루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