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금요일] 한몸이다 (마르 10,1-12)
야고보 사도는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시니, 서로 원망하지 말고, 예언자들의 고난과 끈기를 본받고, 맹세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야고보서 5,9-12)
9 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10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11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12 나의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의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103(102),1-2.3-4.8-9.11-12(◎ 8ㄱ)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
○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
예수님께서는 아내를 버려도 되냐는 바리사이들의 물음에,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마르코 10,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1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2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제1독서 (야고5,9-12)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11)
'사실'로 번역된 '이두'(idu; '보라')는 야고보서 5장 10절과 연관성을 가지면서
야고보서 5장 4절의 경우와 동일하게 수신자들의 관심을 인내의 두번째 모범인
욥에게로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끝까지 견디어 낸'으로 번역된 '휘포메이난타스'(hypomeinantas)의
원형 '휘포메노'(hypomeno)는 '~아래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포'(hypo)와
'머무르다'(마태10,11)라는 의미의 '메노'(meno)의 합성어로서
어떤 상황 아래에서 피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 무거운 짐 아래에서
버티고 견디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며, 여기서는 과거 분사형으로 쓰여
시련 가운데 흔들림없이 자신의 믿음을 고수한 자들을 가리킨다.
고난이 엄습해 올지라도 도망가지 않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인내하는 자들을
야고보 당시의 성도들이 행복하다고 칭송한 사실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는 행복하다고 합니다'에 해당하는 '마카리죠멘'(makarizomen;
we count them happy; we consider blessed those who)이
현재 직설법으로 쓰였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설교에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마태5,11.12)라고 말씀하셨다.
또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고 말씀하셨다.
고통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끝까지 온전히 인내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축복이 뒤따른다.
이것은 신실한 주님의 약속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고통 가운데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인내한다면,
구약의 예언자들과 동일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구약의 예언자들에 이어 인내의 가장 대표적 인물로 당시 '욥'을 들고 있다.
그러나 '욥'은 야고보서 5장 9절의 '원망하지 마십시오'라는
야고보의 진술에 위배되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욥'은 자신이 처한 비참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불평을
과도하게 늘어 놓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욥기7,11-16; 10,18; 23,2; 30,20-23).
그러한 '욥'을 어떻게 인내의 좋은 예로 들 수 있는가?
야고보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야고보는 비록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믿음으로
자신의 고통스러운 환경을 잘 인내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도들에게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 '욥'보다 더 극심한 고난을 겪은 자도 없고, 그 극심한 고난을 이겨낸 후
그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은 자도 없다.
따라서 '욥'은 고난 중에 인내한 모범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한편 야고보는 수신자들이 주님께서 '욥'에게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에이데테'(eidete; have seen)는 '너희가 보았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두 눈으로 본 것처럼 뚜렷이 알고 있다는 표현이다.
사실 '욥'에게 주어진 결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고난을 인내로 이겨낸 후 잃어버린 물질을 두 배로 돌려받았고,
또 열 자녀를 다시 새롭게 얻었으며(욥기42,12-17),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더 깊이 알고 그분과 더 친밀하게 통교하게 되었다(욥기42,5).
'욥'에게 회복된 가시적인 물질적 축복이나 비가시적이지만
하느님과의 친밀한 통교의 축복은 궁극적으로 주님의 강생 후
고난을 인내한 성도들이 받게 된 축복의 예표가 되는 것이다.
비록 고통을 믿음으로 인내한 것에 대한 보상이
욥과 같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나타나지 않고,
스테파노 부제처럼 순교로 끝난다고 할지라도(사도7,55.56)
궁극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축복을 하늘에서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믿음으로 인내한 자에게 궁극적으로 축복을 내리신다는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데에 있어 너무나 큰 힘이 된다.
하느님의 심판과 보상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무고한 고통을
기쁘게 인내할 이유가 전혀 없다(히브12,2; 로마8,18.25; 묵시21,4).
그리스도교는 현세적 기복 신앙을 조장하지는 않지만,
내세의 삶을 약속하는 희망의 종교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야고보가 제시한 예언자들과 욥의 예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며 믿음에 굳게 서서 고난 중에 인내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동기 부여가 되는 것이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야고보는 '욥'에게 주신 하느님의 축복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규명한다.
이 구문을 이끄는 접속사 '호티'(hoti)는 이유를 나타낸다.
주님께서 '욥'에게 주신 결말이 축복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분이
동정심이 크고 너그러우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여기서 '동정심이 크고'라는 의미로 번역된 '폴뤼스플랑크노스'(pollyspllangchnos;
very pitiful)은 '많은', '큰'을 의미하는 '폴뤼스'(pollys)와 '창자', '자비심',
'동정심'을 의미하는 '스플랑크논'(spllangchnon)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형용사로서
'자비심이 흘러넘치는', '동정심이 많은'이라는 의미이다.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에 해당하는 '오익티르몬'(oiktirmon;
of tender mercy)도 비슷한 의미를 전달한다.
하느님께 대한 이와 같은 진술은 구약 성경의 일관된 사상이다.
탈출기 34장 6절에는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라고 시나이 산에 현현하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으며, 다윗 역시 시편 103장 8절에서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고 노래하였다
<혼인과 이혼> 송영진 모세 신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
이 말씀은 이혼하면 안 된다는 예수님의 결정적인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선언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 말씀을 폐기하거나 변경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라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연상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일’이니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혼’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는 일이니 ‘사람의 일’입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이혼해도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고 ‘사람의 일’만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이혼은 사탄의
일이다.’ 라는 뜻도 아니고,
이혼한 사람은 모두 사탄의 유혹에 빠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말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예수님)의 말씀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또 혼인 서약은 하느님 앞에서 한 서약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하느님(예수님)의 말씀도 안 믿기 때문에
‘혼인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도 ‘혼인은 인륜대사’ 라는 말을 합니다.
‘인륜’이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그러니 혼인과 이혼은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혼하면 안 된다는 말만 하고 그치면 그만인가?
자기 탓이 아닌 이유로 억울하게 이혼을 당한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또는 정말로 많이 노력하고 있는데도 뜻대로 되지 않고,
현실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지금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그 건강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질병 예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옳지만,
이미 건강을 잃은 사람들에게 건강의 중요성만
이야기하고 그치는 것은,
또는 왜 건강을 잃었느냐고 꾸짖기만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해 주어야 하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랑’입니다.
혼인 조당에 걸려서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사랑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함께 실천해야 할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혼하면 안
된다는 예수님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혼인 조당에 걸려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해서 구원을
받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이 결혼한 사람이라면?
그러면 그가 집을 나간 일은 아내를 버려두고 나간 일이 될 것입니다.
그 경우에도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꾸짖지 않고 받아들이고,
기뻐하면서 잔치를 벌인다는 비유의 내용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며느리가, 즉
작은아들의 아내가 큰아들처럼 화를 낸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아버지는 큰아들을 타이른 것처럼 며느리를 타이를 것입니다.
“너의
남편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우리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물론 당사자인 아내의
심정으로는 즐기고 기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용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습니다.
만일에 아버지든지 아내든지 간에
작은아들을 용서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아들은 ‘되찾은 아들’이 아니라 ‘영영 잃어버린 아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 아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다시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병에 걸려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혼인
조당을 푸는 방법이 있다고 해서 이혼 금지 규정이 완화된 것은 아니라는 것.
다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예로 들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가 무조건 사랑으로 받아줄 것이라고 믿고,
그래서 그 아들이 방심하고
자만하면서
또다시 집을 나가서 방탕하게 산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회개했다고 말한다면?
그 경우에 그의
회개는 거짓 회개가 될 뿐이고,
아버지의 사랑을 악용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하고
영원하다고 표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은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분이니
내가 죄를 지어도 당연히 용서해 주시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막 사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이고,
하느님을 시험하는 죄입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의무가 아닙니다.
권한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청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일입니다.
혼인 조당을
푸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이혼해도 되느냐고 물었지만(마르 10,2),
우리는 예수님께 혼인과 가정을 지키는 방법을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법을 안
지켜도 되는 경우가 있는지 묻지 말고,
그 법을 잘 지킬 수 있는 방법만 물어야 합니다.)
세속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든지 간에 신앙인들은 그런 것에 흔들리지 말고 신앙인답게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 사이에 혼인과 이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늘어난다고 해도 신앙인들까지 그런 사고방식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두고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허락한 임시방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창조 때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이유는, 결혼을 통해 ‘둘이 한 몸이 되기 위해서’라는 근본적인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대 사회 안에서 실천하기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가르침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도 제자들은 이렇게 항변하였습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마태 19,1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혼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생각보다 심오한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이 하나인 것처럼 인간은 결혼을 통해서 그 일치의 신비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지 ‘에로스적인 살의 결합’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두 사람을 한 몸으로 결합시키시는 것을 말합니다.
신자의 결혼은 ‘하느님의 성전인 거룩한 몸의 결합’을 뜻합니다(1코린 6,15-19 참조). 그리스도인은 이 혼인성사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이 혼인 성소에 응답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며 선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