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간 월요일] 낙타와 바늘귀 (마르 10,17-27)
베드로 사도는 지금은 시련을 겪고 있지만 단련을 받는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주신 구원의 희망을 생각하며 기뻐하라고 가르친다. ( 베드전 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4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9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11(110),1ㄴㄷㄹ-2.5-6.9와 10ㄷ(◎ 5ㄴ 참조)
◎ 주님은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 그 집회에서, 내 마음 다하여 찬송하리라.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그 일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치네. ◎
○ 당신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시네. 위대하신 그 일들 당신 백성에게 알리시고, 민족들의 소유를 그들에게 주셨네. ◎
○ 당신 백성에게 구원을 보내시고, 당신 계약을 영원히 세우셨네. 그 이름 거룩하고 경외로우시다. 주님 찬양 영원히 이어지네. ◎
예수님께서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다며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따르라고 하신다. (마르코 10,17-27)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제1독서 (1베드1,3-9)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와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7)
베드로 전서 1장 7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관찰할 필요가 있는 단어는 '순수성'으로 번역된 명사 '도미키온'(dokimion)과 '단련을 받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동사의 분사형 '도키마조메누'(dolimazomenu)이다.
여기서 이 명사와 분사의 어근은 동일하며, 금, 은 등의 광석이나 동전 등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불로 단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어근에는 불에 집어넣는 단련과 그 단련 속에서 순수성(가치)이 입증되었다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성도들의 믿음을 금에 비유하고 있다. 금은 원래 자연 상태에서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돌 속에 소량 섞여 존재한다. 금광에서 채굴된 금이 섞인 돌을 용광로에 집어 넣게 되면, 거기에서 순금이 분리되어 나온다.
즉 자연 상태의 금광석에서 순금을 채취해 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뜨거운 용광로에서의 제련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그들을 불 같은 단련의 도가니에 집어넣으신다.
생명도 없고 또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금도 순금으로 나오기 위해 불로 단련을 받아야 한다면, 하느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정금같이 나오기 위해 불 같은 단련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단련은 믿음의 순수성을 입증해 주는 참으로 고귀한 시련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련을 통과해서 깨끗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단련된 성도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하느님의 시험의 목적을 언급하면서 수신자들에게 모든 시험들을 이겨나갈 것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8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10,17-27)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1)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여기서 '부족한 것이 있다'에 해당하는 '휘스테레이'(hysterei; lack)는 '휘스테레오'(hystereo) 동사의 현재형이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계명을 다 지켜 왔기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예수님께 자신있는 말투로 대답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계명들을 다 지켰다 하더라도, 지금 현재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현재형 동사로 사용해서 지적한 것이다.
동사 '휘스테레오'(hystereo)는 생활 형편과 관련해서 '부족하다', '모자라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부자 청년은 물질적인 부족이 없었기에, 이 '부족'이라는 단어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생소한 단어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물질로는 풍요로와도 그것은 진정한 풍유로움이 아니며, 오히려 부족함이라는 사실을 그의 허점을 찔러 지적한 것이다.
마르코 복음 10장 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4~10계명만을 언급하셨다. 이 계명들은 모두 인간 사랑과 관련된 것으로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가야 할 수평적 사랑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형적으로는 율법을 준수한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 내면적 순종에 따른 진실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특히 부자 청년이 집착하고 있었던 물질과 관계된 표현을 사용해서, 그의 부족한 것이 내적 순종에서 비롯되는 진실된 사랑과 자기 희생임을 깨우치시는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여기서 '바늘귀'에 해당하는 '트뤼페마토스 라피도스'(trypematos raphidos; the eye of a needle)를 예루살렘 성(城)에서 주로 밤에 이용되던 속칭 '바늘귀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문은 입구가 너무 좁고 낮아서 낙타가 걸어서는 통과할 수 없으며, 짐을 지고 있을 때에는 더 그러했다.
따라서 낙타는 모든 짐을 내려 놓고, 무릎을 꿇은 채 이 문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워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우리가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부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통을 감수하며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두번째로 '낙타'에 해당하는 '카멜로스'(kamelos; a carmel)을 '밧줄'을 의미하는 '카밀론'(kamilon)으로 이해하는 입장인데,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더 쉽다'에 해당하는 '유코포테론'(eukopoteron; easier)은 비교급인데, 이 비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송영진 모세 신부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십니다(마르 10,17-19).
사실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다른 계명은 필요 없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대답합니다(마르 10,20).
그의 대답은 과장이나 자랑이나 교만이 아니라,진실을 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마르 10,21).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는 것은 그가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려고 노력한 것과 그의 지향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는 십계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물은 것은,
십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더 특별한 방법이 있는지
물은 것이고,
이것은 그가 십계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의
‘부족함’은 그가 느낀 ‘부족함’과는 다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라는 말씀은,
십계명을 잘 지키려고 한 그의
노력과 지향은 인정하지만,
그 실천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의 ‘부족함’은 바로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은,
그 ‘애착’을 버리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지침입니다.
아마도 그는 평소에 불우이웃 돕기를(자선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십계명을 잘 지키려고
애쓴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불우이웃 돕기도 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재산이 축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유함은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왔을 것입니다.)
그의 자선이 그런
것이었다면,
만일에 자기가 가난해질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불우이웃 돕기를,
즉 이웃 사랑 실천을 중단하거나 미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그동안 실천한 자선은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이 됩니다.
사랑이란, 나를 기준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상대방을 기준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에서
강조점은,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이 아니라
‘가진 것을 팔아’ 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스스로 가난해져서, 가난한 이들 위치로 내려갈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네가 바라는 대로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임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3-54).”
예수님의 말씀에서 ‘가서’
라는 말과 ‘와서’ 라는 말도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그가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일은 ‘가서’ 해야 할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와서’ 해야 할 일입니다.
‘가서, 와서’ 라는 말은,
그 일들을 아무도 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자기가 스스로,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가서’ 라는 말에는
‘먼저’ 라는 뜻이 들어 있고,
‘와서’ 라는 말에는 ‘그 다음에’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순서는 그렇게 되지만, 이 두 가지
일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잘 따르려면 먼저 재산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 애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또 재산에 대한 애착을
버렸다면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애착을 버렸다고 해도, 예수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무엇인가를) 따라간다면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청빈과
무소유는
예수님을 잘 따르기 위한 방법으로 실천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은 잊어버리고 청빈과 무소유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 부자는 재산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슬퍼하면서 떠나갔습니다(마르 10,22).
그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했는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고 계속 부자로 사는 것을
선택했는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 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부자’는 재산에 대한 애착과 집착에 사로잡힌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라는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하느님만’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