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토요일]어린이 축복 (마르 10,13-16)

2016. 5. 21. 오전 5: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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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7주간 토요일]어린이 축복  (마르 10,13-16)

 

야고보 사도는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낸다며,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놓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야고보 5,13-20)
사랑하는 여러분, 13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14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15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비가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18 그리고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소출을 냈습니다.
19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진리를 벗어나 헤맬 때 누가 그 사람을 돌이켜 놓았다면, 20 이 사실을 알아 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놓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


시편 141(140),1-2.3과 8(◎ 2ㄱ 참조)
◎ 주님, 저의 기도 당신 앞의 분향으로 여기소서.
○ 주님,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어서 오소서.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의 기도 당신 앞의 분향으로 여기시고, 저의 두 손 올리오니 저녁 제사로 받으소서. ◎
○ 주님, 제 입에 파수꾼을 두시고, 제 입술에 문지기를 세우소서. 주 하느님, 저는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제 영혼을 내버리지 마소서. ◎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며 어린이들을 축복하신다. (마르코 10,13-16)
그때에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 (야고5,13-20)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 받을 것입니다."  (14-15) 

야고보는 5장 13절에서 고통 가운에서 기도할 것을 권면한 데 이어,5장 14-16절에서 특히 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를 위한 믿음의 기도를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앓는'으로 번역된 '아스테네이'(asthenei; sick)의 원형 '아스테네오'(astheneo)

부정 불변사 '아'(a)'든든하다', '강하다'(1베드5,10)라는 뜻의 동사 '스테노오'(stheno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문자적으로는 '강하지 않다'는 의미이지만, 대부분 '육체적으로 일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해진 상태' 즉 '병을 앓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용례로 쓰인다. 

질병은 사람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육체적, 정식적으로 쇠약해지게 만든다. 그래서 야고보는 질병에 시달려 지쳐 있는 자신이 교회로 가기보다는 교회의 원로들을 집으로 부르라고 권면하고 있다. 

'원로'에 해당하는 희랍어 '프레스뷔테로스'(presbytheros'; elder)'나이 많은'이란 뜻이 있는 '프레스뷔스'(presbys)의 비교급으로서, 문자적으로는 '연장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교회의 직책이나 직분에 대해 이 단어가 쓰이면, 단순히 연장자라는 의미를 넘어 가르침과 행정 등

중요한 역할을 맡은 교회의 대표자를 의미했다. 

신약 성경 중 특히 서간들에서 이 용어는 교회의 핵심 직분으로 나타나 있으며 (1티모5,17-19; 티토1,5; 1베드5,1; 2요한1,1), 또한 '감독'이라는 용어와 동의어로 알려져 있다(티토1,5.7; 사도20,17; 20,28). 이것을 통해 그들의 임무가 온 양떼를 돌보며 교회 공동체를 다스리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원로들은 앓는 성도가 자신들을 청한다면, 주님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서 당연히 가야 했다(마태8,14; 로카8,41.42.51참조). 한편 야고보서 5장 14절에서는 원로들이 앓는 성도의 청에 응하여 그를 찾아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해 주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여기서 '기름'에 해당하는 '엘라이오'(ellaio; with oil)'올리브 기름'을 의미한다. 고대 세계에서 병자의 차도를 위해 기름을 바르는 것은 일반적인 행위였다(이사1,6). 

요세푸스, 필로, 플라톤의 글에서도 이런 사실이 나오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응급 처치하는 과정에서 기름과 포도주를 사용하였고(루카10,46), 예수님의 제자들도 병자들을 고치는 과정에서 기름을 부어 준 것을 볼 수 있다(마르코6,13). 따라서 야고보서 5장 14절앓는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실제로 치료 행위도 하라는 권면으로 이해된다. 

성경 학자들은 기름 바르는 행위를 병자로 하여금 마음의 위안을 얻도록 하는 상징적 행위로 보기도 하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자로 구별해 놓는 상징적 행위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병자에게 기름바르고 기도하는 행위 모두가 '주님의 이름으로'('엔 토 오노마티 투 퀴리우'; en to onomati tu kyriu; in the name of the Lord)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구절이 병자 성사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다. 성주간의 성목요일의 성유 축성 미사때에 일년동안 사용할 성유(예비자 성유, 크리스마 성유, 병자 성유)를 교구장 주교님이 축성하면, 그 병자 성유를 가지고 사제들은 병자 성사를 집행하게 된다. 

주교님이 주님의 이름으로 축성한 병자 성유를 가지고 사제들은 병을 심하게 앓고 있거나  수술을 받기 전이나 죽을 위험이 있을 때 찾아가 병자 성사를 집전한다. 

병자 성유를 앓는 성도에게 바르는'알레입산테스'(alleipsantes; anointing) 도유 행위와 기도가 바로 치유자이신 성령의 권능을 부르는 것이며, 야고보는 여기서 하느님의 권능의 개입만이 앓는 성도의 병을 낫게 하는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야고보는 5장 14절에 이어 본 서간의 수신자들에게 '믿음의 기도'가 확실히 치유의 결과를 발생시킨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앓는 성도들을 위해 행하는 원로들의 믿음의 기도를 들으시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 원로들이 앓는 성도들을 위해 하는 기도'믿음의 기도' 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병자에게 치유의 은혜를 내려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말한다 

한편 '구원하고'로 번역된 '소세이'(sosei)의 원형 '소죠'(sozo) 신약 성경에서 종말론적인 구원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되었다 (요한12,47; 1코린1,21; 2티모1,9등). 

그러나 여기서는 '아픈'에 해당하는 '캄논타'(kamnonta; sick)육체적 질병과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의미보다는 육체적 질병의 치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더 적합하다 (야고1,21; 2,14; 4,12; 5,20). 

또한 주님께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로 번역된 '에게레이'(egerei; will raise up) 역시 죽은 이의 부활과 연관해서도 사용되었으나(로마4,24; 히브11,19; 1베드1,21) 여기서는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어 병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마태8,15; 루카5,23; 요한5,8).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질병이 범죄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개진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 분명히 나타내 있지 않는 주어는 '앓는 사람', '아픈 사람'이다. 즉 원로들의 기도의 결과가 '앓는 사람'이 죄사함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지었으면'으로 번역된 '페포이에코스'(pepoiekos)'행하다'(do)라는 의미를 지닌 '포이에오'(poieo)의 완료 분사로서, 과거의 범죄가 현재에도 계속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나타내므로 육체적 질병이 죄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리고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로 번역된 '아페테세타이'(aphethesetai; he will be forgiven)'놓아주다', '해방시키다', '용서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피에미'(aphiemi)의 미래 수동태로서, 믿음의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 죄의 용서를 받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구절이 질병과 죄가 일반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질병이 죄와 관계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2역대16,7-12; 26,19-21; 마르코2,1-12), 요한 복음 9장 1절 이하의 태생 소경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질병도 있는 것이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7성사 제도 안에서 죄가 있는 사람들이 받는 성사는 세례 성사와 고해 성사이며, 나머지 견진, 성체, 혼인, 신품, 병자 성사는 죄가 없는 은총 지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오늘 성경의 본문이 병자 성사를 계시한다면, 먼저 고해 성사를 보고 난 뒤에 병자 성사를 받고, 그 다음 성체 성사를 차례대로 모셔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볼 수 있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송영진 모세 신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3-16).”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제자들이 막은 것은
아마도 예수님을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시는 중이었다면, 예수님의 설교를 방해하지 말라고.
또는 예수님께서 쉬시는 중이었다면, 예수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언짢아하시며’는 ‘화를 내시며’로 바꿔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그랬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모든 사람은 예수님께 갈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부자와 가난한 자, 높은 자와 낮은 자... 누구라도...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가는 것을 막은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은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가난하고 힘없고 약한 소외계층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 당시에 실제로 어린이들은 그런 취급을 받았습니다.)
소외계층 사람들이라면 더욱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여유 있는 사람들이 친목을 도모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하느님의 집’이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서 쉴 수 있는 만인의 안식처입니다.


이 이야기와 비교해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비싼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이야기입니다(요한 12,3).
그때 유다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 12,5)” 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왔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라는 명분으로 그 어린이들을 막았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서’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 때,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 돈을 사용하지 않고
예수님만을 위해서 낭비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일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은 대립 관계인가?
대립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마리아의 경우,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변호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마리아가 가난한 이들에게 삼백 데나리온을 주고
그들이 만든 향유를 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부자들이 만든 향유를 샀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일은 예수님을 위해서 한 일도 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한 일도 됩니다.


어떻든 제자들이(신앙인들이) 할 일은,
어린이처럼 약하고 힘없는 소외 계층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잘 만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어린이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소외 계층 사람들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기득권층 사람들은 못 들어간다는 뜻은 아니지만,
가진 것 없는 사람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보다 더 하느님께 의지할 것이고,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 더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느님보다 더 믿고,
그것에만 의지하다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권력이나 재산이나 명예나 어떤 업적 같은 것들은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속에서 얻은 것들, 즉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은
영원한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니, 아무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지금 그런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우쭐한다면,
그게 바로 어리석음이고, 교만입니다.
교만은 어린이가 아닌 사람들의 대표적인 죄입니다.
반대로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인 사람들’의 대표적인 성덕은 겸손입니다.
따라서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을,
“교만한 자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매일미사(다해) 16-05-21] -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합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그 손, 죽은 사람을 살리는 그 손, 간음한 여인을 단죄하지 않고 땅에 무엇인가를 쓰던 그 손,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일으키던 그 손을 우리 모두 만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성가시게 나서서 예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복음 선포에 지장을 줄까 봐 제자들은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구약에서도 어머니들은 예언자들에게 아이들을 데려가서 축복해 줄 것을 청하곤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어머니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분께 축복을 청했을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예수님께서 아이들에게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으로 그분께 다가갔습니다. 아이들도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신뢰하고 예수님께 다가가 축복을 받고자 했습니다.
“곡예사의 도약은 오로지 상대편이 자신의 손을 잡아 주리라는 전적인 신뢰에 의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순수하고 전적인 신뢰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비결이라고 확인해 주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맑은 믿음을 우리 모두 가져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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