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 부활 제7주간 수요일]말씀이 진리 (요한 17,11ㄷ-19)

2016. 5. 10. 오후 5:57:05

글자

[5.11 부활 제7주간 수요일]말씀이 진리 (요한 17,11ㄷ-19)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원로들에게 이별을 알리며 기도하자, 그들은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에게 입을 맞추고 배 안까지 배웅한다. (사도행전 20,28-38)
그 무렵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28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 떼의 감독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의 교회 곧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얻으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29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30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31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32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33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34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35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36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37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38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가시기 전에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또한 제자들을 세상의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요한 17,11ㄷ-19)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11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12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13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16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17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19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도20,28-38)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33~35)

사도행전 20장 33절에서 35절까지의 이르는 고별 설교 말미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 변호하면서 남에게 주는 삶이 복됨을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깨우치고자 한다. 

당시 사도 바오로를 비방하던 자들의 비방 중 하나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거둔 구제(자선)헌금 중 일부를 사도 바오로가 자신을 위해서 유용했다는 것이었다(2코린12,17).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분명히 에페소에서 자신의 직업, 천막 만드는 일을 통해 자신의 필요를 충당했음을 밝혔다(사도18,3; 1코린4,12; 1테살2,9). 

사도 바오로는 낮에는 천막만드는 일에 종사하였고, 다른 사람이 쉬는 시간에는 티란노스(두란노; 개신교에서는 이렇게 부름)학원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쳤던 것이다(사도20,31; 사도19,9.10).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복음의 일꾼으로서 경제적 필요를 자신의 양떼들로부터 채움받을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권리마저 포기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에페튀메사'(ephethimesa)의 원형 '에피튀메오'(ephithimeo)금지된 것을 '갈망하다','탐내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과거의 일회적 사건을 뜻하는 부정(不定; Indefinit)과거형으로 사용되어 과거에 단 한번도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내 본 적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은','금','옷'으로 일반적 재물의 종류를 나열하며 자신이 그 어떤 것 하나도 탐내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주어진 환경에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모든 욕심과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1티모6,5~10).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절에서 자비(自費)로 자신의 필요를 채웠을 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의 필요도 채웠다는 사실을 회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여러분 자신이'에 해당하며 주어를 강조할 경우에 사용하는 재귀 대명사 '아우토이'(autoi)를 문장 서두에 쓴 것은, 이 말을 듣고 있는 에페소 교회 원로들이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두 손으로' 해당하는 '하이 케이레스 하우타이'(hai cheires hautai)주격으로 사용되어 사도 바오로 자신이 직접 노동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뿐만 아니라 테살로니카나 코린토에서도 자신 및 자신의 동료들을 위해 육체 노동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1코린4,12). 

여기서 '장만하였다'로 번역된 '휘페레테산'(hypheretesan)원형 '휘페레테오' (hyphereteo)는 일차적으로 선박의 맨 아래층에서 '노를 젓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비유적으로 '섬기다','봉사하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된다(사도13,36; 24,23). 당시 선박의 맨 아래층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은 노예들이었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자신을 철저하게 하느님의 종으로 여겼음을 잘 보여준다. 

즉 사도 바오로는 배 맨 아래층에서 배의 진행을 위해 수고하는 지극히 비천한 노예처럼 자신도 선교 여행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재정을 자신이 스스로 섬기는 자세로 감당했다는 뜻이다. 

사도 바오로는 자비로 복음 전파 활동을 감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물질들을 기쁨으로 봉헌하며 섬겼던 것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절에서 자신의 삶을 에페소 원로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로 다시 한 번 더 자신있게 소개하고 있다. 

'휘페데익사'(hypdediksa)의 원형 '휘포데익뉘미'(hypodeiknimi)는  '눈앞에서 직접 보여 주다', '실물 교육을 하다'는 뜻이다. 

사도행전 20장 33절과 34절의 사도 바오로의 행동은 에페소 원로들이 지난 3년간 친히 그들의 두 눈으로 목격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원로들에게 물질에 대한 탐욕없이 동료와 교회의 필요를 채우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던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한다.

사도 바오로의 삶은 자신과 함께 일한 동역자들에게 본으로 제시될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느님의 비밀인 복음을 깨달은 사도 바오로는 그들에게 입으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직접 삶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하느님의 봉사자들은 말씀을 입으로만 전할 것이 아니라 늘 자신의 행동과 삶으로 가르쳐야 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사도 바오로는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물질관의 원리가 되는 말씀이며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이 말씀을 에페소 원로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이 말씀은 복음서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구전(口傳)되어 오는 예수님의 말씀이거나 사도 바오로가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으로서 사도 바오로가 간직해오다가 에페소 원로들에게 들려 준 것으로 본다.

당시 속담 중에 '받을 때에는 손을 내밀고, 줄 때에는 주먹을 쥐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 비슷한 말이 있다. 이것은 받기를 좋아하면서 주기는 싫어하는 탐욕스러운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격언이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당시의 속담 대신에 자신이 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으로 에페소 원로들을 권면한 것이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36) 

사도행전 20장 36절부터 38절까지는 사도 바오로가 고별 설교를 마친 뒤 원로들과 이별하는 장면이다. 루카는 사도 바오로와 에페소 원로들의 이별을 세 단계로 묘사했다. 

첫째 그들은 함께 기도했고(36절) 둘째는 이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다 울었으며(37절) 마지막으로 배에 까지 사도 바오로를 전송했다.(38절) 이러한 이별은 사도 바오로에 대한 원로들의 사랑과 염려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아시아 교회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사랑과 염려를 보여준다(38절). 

본절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고별 설교를 마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 내용이 나온다.

'theis ta gonata autu ~ proseyiksato' (테이스 타 고나타 아우투~프로세익사토; he knelt down~and prayed )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당시 일반적인 기도의 모습은 아니었다. 많은 유다인들은 손을 하늘을 향해 들고 기도했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서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새로운 기도의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고(루카22,41)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마지막 기도를 무릎을 꿇고 했으며(사도7,60), 사도 베드로가 죽은 타미타를 살릴 때 간절히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사도9,40). 

이렇듯 신약성경에서 무릎을 꿇고 드리는 기도는 아주 어려운 곤경을 만났을 때 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문맥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것은 앞으로 당할 교회의 어려움들의 무게를 생각하고 그들과 맺을 사랑의 끈을 놓으려 할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슬픔을 간절한 기도로 하느님께 아뢰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록 몸은 서로 떠나 있지만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친교를 지속해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도 바오로의 마음이 잘 느껴진다.

               


부활 제7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17,11ㄷ-19)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11)

요한 복음 17장 11절의 기도에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떠난 뒤 세상에 남게 될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향한 당신의 특별한 관심이 잘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예전처럼 제자들과 함께 육체로 머무시며 그들을 지켜주실 수 없기 때문에, 성부 하느님께 그들에 대한 보호를 요청하시는 기도이다. 특히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그들의 보호를 요청하시는 기도이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히나'(hina; that) 가정법으로서 '~하도록'(so as to; so that~may)이라는 목적의 의미를 나타내는데, 제자들이 지켜져야 하는 이유이들이 하나되어야 하는 목적 때문이다.

여기서 '지키시어'로 번역된 '테레손'(tereson; keep; protect)은  '굳게 붙잡다', '보살피다'는 뜻을 지니는 '테레오'(tereo)부정(不定) 과거 명령으로서 굳게 붙잡아 완전하게 지켜 달라는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안전하게 지키는 수단이  예수님께 주신 '하느님의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이름'은 좁게는 '하느님의 능력'을 의미하는데(시편20,20; 54,3; 잠언18,10),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성부 하느님께서 당신께 주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제자들을 보호해 오셨지만, 이제 그 일을 성부 하느님께 직접 의탁하시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이름'은 넓게는 '하느님의 완전하신 신적 위격'을 의미하는데, 천주 성부의 신적 위격 하느님의 능력과 더불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가르치시는 교훈과 지식을 포함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성부 하느님께 그런 보호를 요청하신 궁극적인 목적이들의 하나됨을 위해서이다.

여기서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히나 오신 헨 카토스 헤메이스'(hina osin hen kahos hemeis; so that they may be one as we are one)에서 '히나 오신 헨'(hina osin hen)'이들이 계속해서 하나가 되도록'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불일치와 불화를 염려하셨다는 것이 분명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됨'모델은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 사이의 하나됨이다.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의 뜻과 목적이 하나인 것처럼(요한10,30; 14,9~11), 제자들도 한 뜻과 한 목적을 가지고 일치하기를 원하신 것이다(요한17,21.23).

'하나됨'으로써 이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악한 세상에서도 능력있게 이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요한13,34.35)과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사실(요한17,21)를 세상에 증거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 모두는 한 사람한 사람이 그 몸의 지체들이다(1코린12,27). 

서로 떨어질 수 없도록 잘 결합되고 연결되어 있는 우리의 몸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유기적인 조직체이다(에페4,16).

따라서 크든 작든 분열과 분쟁을 일으킬만한 소지들을 철저히 없애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5월15일미사, 요한복음 17,11ㄷ-19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송영진 모세 신부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한 17,15-16)."


신앙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즉 세상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은 신앙인들을 미워합니다(요한 15,18-19).
(신앙인들이 세상과 다르게 살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 미움은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막는 박해로 이어집니다.
세상의 미움과 박해는 '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을 악에서 지켜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그 미움과 박해를 이겨내는 것은
신앙인들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힘든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라는 말씀에는
'악'을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맞서 싸워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또 나중에 때가 되면 세상에서 데려가시겠지만,
아직은 신앙인들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 구원해야 할 '잃은 양'입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거부하지 않는 한.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라는 말씀은,
"이들이 신앙을 잃지 않도록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목숨을 지켜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순교라고 부릅니다.
순교자들은 지상에서는 목숨을 잃었어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분들입니다.


육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신앙을 버리는 것은
영원한 생명도 함께 버리는 일이 됩니다.
신앙을 버려서 육신의 목숨을 지킨다고 해도, 사실 그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 동안 지키는 것이 될 뿐입니다.
누구나 죽을 때가 되면 죽어서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면,
자신이 신앙을 버린 것이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를
공동번역 성서처럼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다."는 "성별해서 봉헌하다."이고,
봉헌은 제물을 바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몸을 바친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거룩한 제물로 바친다는 뜻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것, 또는 진리를 위해서 자신을 바치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신앙인들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단순하게 생각해서, 이리 떼 가운데에 놓여 있는 양들이 살아남으려면,
양들이 이리 떼로 변하든지, 아니면 이리 떼에게 굴복하든지,
아니면 이리 떼를 양 떼로 변화시키면 됩니다.
그런데 양들이 이리 떼로 변하거나 이리 떼에게 굴복하는 것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죽는 것입니다.
양으로서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하거나 세상에 굴복하는 것은 신앙을 버리는 것이고,
그러면 잠깐 동안 육신의 목숨은 지켜도 영원한 생명은 잃게 됩니다.


그래서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이리 떼를 양 떼로 변화시키는 것.
그것은 바로 복음 선포입니다.
말로만 하는 선포가 아니라 '삶'으로 하는 선포.
복음 선포를 '삶'으로 하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들의 거룩한 삶을 보고 감화되어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의 양이 됩니다.
(이리에서 양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답게 살면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사람이 되고,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신앙인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은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신앙인들은 하찮게 여기고,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들을 신앙인들은 목숨 걸고 지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라는 말씀은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고,
거룩해지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헌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신 말씀"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요한 14,10).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대로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주시는 것도 못 받게 됩니다.
안 주셔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2012년 5월23(수) 오늘의 묵상,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요한 17장 11ㄷ절-19절 오늘의 묵상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로 자신이 세상 창조 전부터 하느님 아버지와 언제나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말씀’이요 ‘하느님의 외아들’이심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관계가 우리에게도 적용됨을 알려 주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와 친밀성’을 가질 수 있으며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로 불립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신적 진리와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중재 기도로 하느님 아버지에게 속하게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므로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아 이 지상의 험난한 길을 무사히 걷게 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삶의 기쁨을 깨닫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랍니다. 하물며 ‘거룩하신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더 우리를 염려하시고 격려하시겠습니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다가와 우리를 돌보아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화두는 우리의 전 삶을 끌어가는 견인차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선민의식은 신자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원동력,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시금석입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부활 제7주간 금요일]나를 따라라 (요한 21,15-19)16.05.13조회 54[부활 제7주간 목요일]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0-26)16.05.12조회 68[5.11 부활 제7주간 수요일]말씀이 진리 (요한 17,11ㄷ-19)16.05.10조회 95[부활 제7주간 화요일] 영원한 생명 (요한 17,1-11ㄴ)16.05.10조회 127[부활 제7주간 월요일] 승리 (요한16,29-33)16.05.09조회 181[부활 제6주간 토요일] 내 이름 (요한 16,23ㄴ-28)16.05.07조회 346[부활 제6주간 금요일]한국 103위 순교 성인 시성일 (요한16,20-23ㄱ)16.05.06조회 49[부활 제6주간 목요일]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 (요한 16,16-20)16.05.05조회 51[부활 제6주간 수요일] 진리의 성령 (요한 16,12-15)16.05.04조회 52[5. 3.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요한 14,6-14)16.05.03조회 49[부활 제6주간 월요일]5. 2.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요한 15,26-16,4ㄱ.)16.05.02조회 49[부활 제5주간 토요일](2016. 4. 30. 토)(요한 15,18-21)16.04.30조회 48[부활 제5주간 금요일]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5,12-17)16.04.29조회 52[부활 제5주간 목요일] 내 사랑 안에 (요한15,9-11)16.04.28조회 50[부활 제5주간 수요일] 참포도나무요 (요한 15,1-8)16.04.27조회 295[부활 제5주간 화요일]평화 (요한 14,27-31ㄱ)16.04.26조회 269[(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마르코. 16,15-20)16.04.25조회 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