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간 금요일]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5,12-17)

2016. 4. 29. 오전 5: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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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5주간 금요일]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5,12-17)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가타리나 성녀는 1347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시에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앞날을 짐작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완덕의 길을 걷고자 일찍이 소녀 때 도미니코 제3회에 들어갔다. 그녀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지역들 간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특히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자신의 신비 체험을 모아 책으로 남긴 그녀는 1380년에 선종하였고, 1461년에 시성되었다.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가타리나 성녀는 1970년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은 사람들을 뽑아 안티오키아로 보내며 편지를 전한다.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편지를 읽고 공동체는 기뻐한다.(사도행전15,22-31)
그 무렵 22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자기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뽑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뽑힌 사람들은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인 바르사빠스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스였다. 23 그들 편에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의 형제인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24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25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26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27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스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28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29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30 사람들이 이렇게 그들을 떠나보내자, 그들은 안티오키아로 내려가 공동체를 모아 놓고 편지를 전하였다. 31 공동체는 편지를 읽고 그 격려 말씀에 기뻐하였다.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다. (요한 15,12-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제1독서 (사도15,22-31)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8~29)

 

'성령과 우리는 ~ 결정하였습니다'

 

'결정하였습니다'로 번역된 '에독센'(edoksen)은 사도행전 15장 22절과 25절에도

그대로 나오는 단어이다.

 

이것은 '좋게 여겼다'(It seemed good to the Holy Spirit and to us~)

기본적인 뜻과 더불어 '결정했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방인에게 할례가 불필요하다는 결정은 사도들과 원로들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도 뜻을 함께한다는 사실이 본문에 나타나 있다.

 

특히 여기서 '성령'을 언급하는 것은 이 결정이 단순히 인간의 뜻이 아니라

성령 하느님의 인도로 된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지혜의 영이신 제3위 성령 하느님까지도 이방인에게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뜻을 나타냄으로써 사도들과 원로들은

그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원로들이 어떻게 성령의 뜻을 알았을까

하는 것은, 사도행전 15장 6~21절까지 기록된 회의 진행 과정에서 성령께서 나타나

그 뜻을 밝혔다는 진술은 보이지 않지만, 사도행전 저자가 기록하지 않았을 뿐,

사도들과 원로들은 성령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느님께 진지하게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몇 가지 필수 사항'으로 번역된 '에파낭케스'(epanangkes)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 밖에 쓰이지 않는 단어로 '부득이','불가피한' 등의 의미이다.

 

이것은 이방인이 지켜야 할 네 가지 기본적인 금기 사항(20절)을 불가피하게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쓰여진 단어이다.

 

이것은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유대인 출신 신자들과의

거리낌없는 친교와 이방인들 주변에 있는 디아스포라(Diaspora; 교포와

같은 의미로 흩어져 있는 유대인 공동체)를 복음으로 이끌어들이는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치였다.

 

그리고 네 가지 기본적인 금기 사항(20절)은 어제 독서의 말씀에서

이미 설명하였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네 가지 필수 금기 사항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짐'으로 번역된 '바로스'(baros)는 원래 '무게'(weight)를 의미하는 단어였는데,

'무거운 것', '짐'(burden) 또는 무거움 때문에 느끼는 '고통'(suffering)

이라는 단어로 발전하였다.

 

우상의 제물, 피,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심적 부담과 고통이 되지 않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행하고 모세 율법

전체를 지켜야만 하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요,

고통이라는 사실이 본문에 잘 드러나고 있다.

 

복음의 진수를 바로 깨닫고 있는 사람은 구원을 조건으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과

심적 부담을 주지 않으나, 하느님 은총의 복음의 진수와 그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구원을 조건으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큰 부담과 고통을 안겨 주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 신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가르쳐 주었지만

(갈라5,1~4), 콜로새 교회에 이단을 퍼뜨렸던 어떤 자들은 사람이 감당치도

못할 금기 사항을 주장해서 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것(콜로2,21)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삼간다'는 것은 이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번역된 '유 프락세테'(yu praksete)에서 '프락세테'

(praksete)'행하다'(do)는 의미를 지닌 '프랏소'(prasso)의 미래 능동형으로서

'행할 것이다'라는 의미이고, '유'(yu)'잘'(well)이라는 의미이다.

 

'잘 행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곧 제반 신앙 생활을 잘 수행하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열매를 맺어나갈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을 믿기 전에 행해 오던 악습을 버리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신앙의 성장을 이룰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금요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복음 (요한15,12-17)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6)


요한 복음 15장 16절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이유를 밝힌다.

그중에서 전반부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선택을 받은 자임을 밝힌다.


부정과 긍정으로 이루어진 문장 구조 및 '내가'로 번역된 '알르 에고'(all' ego; but I)

여기서는 강조적으로 쓰여, 그들이 제자가 된 것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예수님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뽑아'로 번역된 '엑셀렉사멘'(ekseleksamen; chose)

부정(不定) 과거 중간태이며, 그 뜻은 '내가 스스로를 위해서 뽑았다'이다.


중간태와 능동태의 차이점은 행동의 주체가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점인데,

동작의 주인공을 강조하며, 동작과 주격을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켜 준다.


따라서 '내가 뽑아'에 해당하는 '에고 엑셀렉사멘'(ego ekseleksamen; I chose)

'나 스스로를 위해 내가 선택했다'는 뜻으로서, 그 안에는 아주 강한 주체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70인역(LXX)에서는 거의 언제나 히브리어 '빠하르'(bahar)의 역어로 나오는데,

'빠하르'(bahar) 역시 구약에서 어떤 사람을 특별히 선택하는 의미로 쓰였다

(신명7,6; 1사무8,18; 시편33,12).


우리는 우리 안에 선택받을 만한 그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의 은총으로 선택받은 자임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한편, 주님께서는 우리를 뽑으셨을 뿐 아니라 세우셨다.

여기서 '세웠다'에 해당하는 '에테카'(etheka; appointed; ordained)

'놓다', '두다', '~로 임명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티테미'(tithemi)의

부정(不定) 과거 시제이다.


이것은 철저한 소명 의식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숨'(sum)이라는 단어도 '티테미'로 번역되는데,

그것의 중요한 의미가 '사람을 어떤 지위에 임명하다'는 것이다.


압살롬이  요압 대신에 아마사를 내세워 군대를 지휘하게 한 것(2사무17,25),

다윗이 브나야를 세워 호위대장으로 삼은 것(1역대11,25) 등을 이 단어로 나타냈다.


또한 '숨'(sum)'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따로 구별해 두다'는 뜻도 전달한다.

 

이러한 단어의 용례를 보면, 어떤 특별한 계획과 목적을 위해 많은 사람들

가운데 구별하여 세운다는 뜻이 여기에 들어 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아 일꾼으로 세우신 일차적인 목적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가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하여' 뽑으신 것이다.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면, '너희가 계속해서 목적지로 가서 계속해서 열매를 내게'

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가서'로 번역된 '휘파게테'(hypagete; go)'맺어'로 번역된 '페레테'(pherete;

bear; bring forth)는 모두 가정법으로서, 접속사 '히나'(hina; that)와 함께 목적

의미로 사용되었고, 또한 현재형으로서 계속적인 동작의 의미를 전달한다.


'가서'로 번역된 '휘파게테'(hypagete)의 원형 '휘파고'(hypago)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가다'이다.


요한 복음 15장 1~11절'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권고하신(요한15,5)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동일하게

열매를 맺을 것을 권고하시지만, 특히 '가서' 열매를 맺으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세상 가운데서 살면서 나타내 보이는 '선행'과 동시에 '복음 전파'

뜻한다고 볼 수 있다(로마1,14.15).


'내 이름으로 ~ 청하는 것을 ~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원문은 구하는 주체(너희)주는 주체(그분)를 구분하고, 끝에는 받는 대상을

'너희에게'로 번역된 '휘민'(hymin)으로 명기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주시게'에 해당하는 '도'(do; he may give it)가 부정(不定) 과거형으로

쓰여 받을 것이 너무나 확실함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자 뽑힘을 받은 자열매를 맺는 자이고,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자라는 자세한 언급이 있다.


사도 요한 복음사가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신 후

제자들과(믿는 이들) 통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기도뿐이기 때문이다.


A.D.1세기에 이 복음이 쓰여질 당시에 유대적인 율법주의, 희랍적인 영지주의,

황제 숭배와 관련된 박해와 시련, 탄압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기도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사도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다락방 이별 담화에서

기도를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요한14,13.14; 15,17; 16,23; 24,26).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 / 부활 제5주간 금요일 -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 는 것뿐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송영진 모세 신부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이 말씀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이미 하셨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중요한 계명이기 때문에 한 번 더 강조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원래 '섬김'이란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임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라면,
아랫사람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섬기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내려가지 않는다면, 즉 자기를 낮추지 않는다면 '섬기는 사랑'이 아닙니다.


'서로' 라는 말은 공동체 전체가 함께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예수님처럼 '섬기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 계명은 '내가 먼저' 실천해야 하는 계명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실천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거나 불평할 것 없이
'내가 먼저', 또 '나 혼자서라도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를 '계명'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만일에 '권고' 라면, 실천하면 좋고, 안 해도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계명'이기 때문에 신앙인이라면 당연히(무조건)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 되고,
그러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즉 신앙인의 자격을 잃게 됩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이 말씀에서 '친구들'('벗')은 전체 인류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우리의 형제이고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너희들끼리만 사랑하여라."가 결코 아니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입니다.


'목숨'을 내놓는다는 말은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목숨도 포함해서.)
사랑이란 원래 자기의 것을 남겨놓지 않고 모든 것을 주는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도 그렇고, 이웃 사랑도 그렇습니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는 말씀은
사랑을 '더 작은 사랑'과 '더 큰 사랑'으로 분류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것이 바로 참 사랑이다." 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보일 수도 있지만,
사랑은 모두 하나이고, 같은 사랑입니다.
(성체를 작게 쪼갠다고 해도 성체인 것처럼
'작은 사랑'처럼 보이든지 '큰 사랑'으로 보이든지 간에
그것이 '참 사랑'이라면 모두 같은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
앞의 13절에서 말한 '친구'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여기서 '나의 친구' 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실천한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예수님과 신앙인의 관계가 신랑과 신부로 표현되어 있는데(요한 3,29),
신부로 표현하든지 친구로 표현하든지 간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될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이 말씀은, 신앙생활이란 세속의 노예들이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과 같은
생활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은 사랑을 받는 생활이고,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 앞에서 자유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해방 선포'였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루카 4,18-19).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선 먼저 해방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세속에서도 주인이 정말로 노예를 사랑하는 경우에
그 노예를 해방시켜서 자유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만일에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유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일 뿐이고, 거짓 사랑입니다.)
노예 쪽에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인데,
정말로 주인을 사랑한다면 자유인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고,
자유인으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계속 노예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것은 주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또 사랑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세속의 노예는 그저 의무감으로 명령에 복종할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억지로 끌고 가시는 주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으로써' 그 나라로 인도해 주시는 친구(또는 연인, 신랑)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들은 것을 알려 주다.' 라는 말은 '받은 것을 나누어 주다.'로 생각해도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나누어 받으려는
'능동적인 노력'(충실한 신앙생활)입니다.


   오늘의 묵상

우리 가운데에는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막상 자신은 사랑을 등진 삶을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사랑을 실천하시고, 우리에게도 실행하도록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비록 온갖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우리 신앙인의 삶은 기쁨으로 넘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종이란 신분은 살아 있는 도구에 불과하였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일을 시키면서도, 그 일의 목적이나 결과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지요. 그저 명령과 복종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대해 주시며, 당신의 계획과 목적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동료로 받아 주신 것이지요.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택하셨듯이,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부르신 목적은, 우리가 이 땅에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당신 도구로 쓰시기 위함이지요. 이러한 신앙인의 사명에 대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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