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간 금요일]길 진리 생명 (요한 14,1-6)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의 회당에서, 우리에게 파견된 구원의 말씀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살리셨고 우리는 그 증인으로 이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말한다.(행전 13,26-33)
그 무렵 바오로가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 가 회당에서 말하였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28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29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 뒤에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32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시편 2,6-7.8-9.10-11(◎ 7ㄷ)
◎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또는 ◎ 알렐루야.)
○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내가 나의 임금을 세웠노라!”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
○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너는 그들을 쇠지팡이로 부수고, 옹기그릇 바수듯 바수어 버리리라. ◎
○ 임금들아, 이제는 깨달아라. 세상 통치자들아, 경고를 받아들여라. 경외하며 주님을 섬기고, 떨며 그분 발에 입 맞추어라. ◎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묻는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요한 14,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13,26-33)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히였습니다.(27) ~~~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29)
'예언자들의 말씀'에서 '말씀'으로 번역된 단어는 '로고스'(logos)가 아니라 '목소리'를 뜻하는 '포네'(phone)의 복수형 '포나스'(phonas)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대해 예언한 구약의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외우는 그 입을 통해서 현장감있게 생생하게 들려온다는 뉘앙스를 전달해 준다.
즉 사도 바오로가 '로고스'를 쓰지 않고 '포네'를 쓴 것은 유대인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현재 듣고 있는 것처럼 암송하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안식일마다 봉독되는'에서 '봉독되는'으로 번역된 '아나기노스코메나스'(anaginoskomenas)는 '암기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큰소리로 읽다', '낭독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나기노스코'(anaginosko; 루카4,16; 사도8,28)의 현재 수동태 분사형이다. 따라서 계속과 반복의 의미를 살려서 '읽혀지고 있는'이라고 번역하는게 좋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을 큰소리로 낭독했다.
'이루어지게 했습니다'로 번역된 '에플레로산'(eplerosan)는 '플레로오'(pleroo)의 부정(不定; indefinite) 과거 3인칭 복수형이므로, '그들은 이루었다'(they have fulfilled)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의미상의 목적어는 예언자들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된 예언자들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하며, 그들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단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오히려 그 예언자들의 말씀을 성취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찌기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배척받게 될 것을 예언한 바 있다(이사53,5.12).
유대인들이 생명의 주님을 죽인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사도 베드로도 사도행전 3장 17절에서 그렇게 말하였고, 사도 바오로도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에 자신이 훼방자요, 핍박자요, 학대자였던 것을 그가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1티모1,13). 이처럼 무지는 진리를 죽이고, 진리에 대하여 훼방하고 대항하는 죄악이다. 그러나 이 무지가 죄은 죄에 대한 면죄의 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다 이행한 뒤'에서 '성경에 기록된'으로 번역된 '게그람메나'(gegrammena)는 '기록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그라포'(grapho)의 완료 분사형으로서 '기록된'(was written)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한 죽음에 대한 예언을 말한다(시편22편; 이사53,3~12).
무죄한 예수님을 죽인 일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예언의 말씀이 인간의 자발적인 사악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성취한다는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자기들의 사악한 의지와 자발적인 동기로 행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나무'에 해당하는 '크쉴루'(ksilu)는 뿌리와 잎이 있는 살아있는 수목이 아니라 잘려서 가공된 목재를 뜻한다.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께서 달린 것을 십자가라고 하지 않고 나무라고 한 것은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라는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기 떄문일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심으로써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음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다(갈라3,13; 사도5,30; 10,39참조).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33)
사도 바오로는 시편 2장 7절의 말씀을 메시아의 부활에 관한 예언으로 해석하였다. 시편 저자가 시편 2장 7절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육화(강생)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다고 할 수 있으나, 여기에서 사도 바오로가 인용할 때는 문맥으로 보면,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이기심으로써 원수 사탄에 대하여 완전히 승리하고, 인류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으며, 그의 부활은 그의 두번째 탄생이었던 것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에 해당하는 '에고 세메론 게겐네카 세'(ego semeron gegenneka se)에서 '낳았다'에 해당하는 '게겐네카'(gegenneka)란 동사에 이미 인칭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사실상 1인칭 단수 대명사 '에고'(ego; 내가)가 없어도 된다. 그럼에도 '에고'가 쓰인 것은, 낳으신 주체 '하느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오늘'로 번역된 '세메론'(semeron)이라는 단어는 희랍어 구약 번역본인 70인역(LXX)에는 '오늘날'로 번역되어 있지만, 본문의 단어와 동일하다. 여기에서 '오늘'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켜 부활하게 하신 때를 의미한다. 이것을 굳이 '오늘'로 표현한 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하느님께 있어서는 모든 시간이 '오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앞날에 대한 불안, 세상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걱정이 태산 같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걱정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뿐만 아니라 사소한 일에까지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더욱이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걱정거리가 우리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즐거운 마음은 건강을 좋게 하고 기가 꺾인 정신은 뼈를 말린다”(잠언 17,22). 이처럼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을 잘 가꾸어 나가면 엄청난 결실을 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힘써야만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마음을 써야 할 일은 하늘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는 땅에 속한 것도 우리에게 다 주실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 내면은 더욱 정화되고 우리의 얼굴은 예수님의 얼굴을 닮아 평화와 여유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1-4)."
최후의 만찬
때,
아마도 제자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험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예수님께서 이별을 예고하시는 말씀과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말씀을 하셨으니(요한 13,21-38)
더욱 심란해졌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하느님을 믿어야 하고 또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상황에서 제자들이 믿어야
할 것은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라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이 말씀에서 '다시
와서' 라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승천과 부활 후의 '예수님의 현존'을 뜻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있는
것'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사실상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 때 잠깐 동안 제자들 곁을 떠나셨지만,
승천과 부활 후에는 '언제나 항상' 제자들(신앙인들)과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등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질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평소에도 해야 할
일이지만,
마음이 심란해질 때에는 더욱더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집'의 공간이 넓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다면 안 들어갈 텐데, 그 집에 못 들어가는
사람은
사실은 자기가 안 들어가서 못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니까
하느님(예수님)은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안 믿거나,
아니면
하느님(예수님)과 함께 살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이 스스로 하느님(예수님) 없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이
산란해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됩니다.
보호 받기를 바라지 않아서 보호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에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객지에서 굶주리다가 정신을 차린 작은아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루카
15,17-18)"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많다는 작은아들의 말은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아버지의 은총은 무한한 것이어서
누구든지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은
돌아온 작은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루카
15,28).
그는 그 잔치 음식은 자기를 위한 음식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는 그 잔치에는 자기가 먹을 음식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한 말을 보면, 그 잔치는 사실은
'잃었던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를 위한 잔치였습니다(루카
15,32).
(사실상 집안 전체의 잔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큰아들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고,
큰아들을 위한 음식도
준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일은 억지로 끌려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해서 들어갑니다.
또 하느님 나라의 음식은 누가 억지로 먹이는 음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먹기를 원해서 먹는 음식입니다.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그만인데, 그것은 못 먹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안
먹어서 못 먹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은,
"나를 따라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신다는 말씀을 이미
하셨고,
제자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신앙인들이) 할 일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입니다.
데리고 가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억지로 끌고 가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길을 알고 있다.' 라는 말은 '길을 알아야 한다.'로 해석되고,
다시
이 말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한다.',
즉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이 말씀은,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유일하고
참된 길이고,
이 길로 가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라는 뜻인데,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만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만 추구하면서,
예수님께서 가신 길만 걸어가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러 가지 환난과 박해와
인생살이의 어려움들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진다면,
더욱더 충실하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힘들다면 더욱더 열렬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부활 제4주간 금요일복음(요한14,1~6)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2)
'거처할 곳'으로 번역된 '모나이'(monai; mansions; rooms)는 '모네'(mone)의 복수형이다. '모네'(mone)는 목적격 단수로 여기와 요한 복음 14장 23절에서 쓰일 뿐,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단 한번도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모네'(mone)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이것은 여행중에 잠시 들러서 휴식을 하는 임시적 공간의 의미라기보다는, 제자들과 더 나아가서는 모든 믿는 이들의 희망을 견고히 하는 항구적 거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여기서 갑자기 하느님 나라의 거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가?
이것은 제자들에게 당신과 비록 헤어지더라도,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거처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킴으로서,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또한 있다가 없어질 이 땅에 희망을 두지 말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처소에 희망을 두게 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고, 성령강림 이후 성령충만을 체험한 후 하늘 처소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때, 이 세상의 일에 대해 근심하지 않았으며, 주님과 교회를 위해 순교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굳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요한 복음 14장 2절의 후반부에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중요한 이유에 대해 언급하신다.
'내가 ~간다'로 번역된 '포류오마이'(poreuomai; I go)는 '포류오'(poreuo)의 현재 시제 중간태로서 '내가 스스로 간다'는 뜻이다. 이것을 '미래적 현재'라고 하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내는 용법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죽음을 신적 통찰력과 예지력으로 미리 아셨고,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예고해 주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을 덧붙이셔서 그 처소를 마련하러 가시는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신다.
당신 자신의 죽음이 제자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며, 그들 뿐만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반드시 지불하셔야 될 대가임을 밝히고 계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영혼들이 영원히 거처할 처소를 마련하는 이 일은 오로지 십자가상 대속의 구속사업을 통해, 믿는 이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만 유보된 일인 것이다(사도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