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간 화요일]아버지와 나는 하나 (요한 10,22-30)

박해로 흩어진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거기로 보내어 격려하고 사람들을 가르친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다.(사도행전11,19-26)
그 무렵 19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1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달라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고 말씀하신다.(요한 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All saints or Antioch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사도11,19-26)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2~24)
사도행전 11장 22절의 '그들에 대한 소문'은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방인 회심사건을 말한다.
예루살렘은 안티오키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 이방인이 주님께 돌아온 사안이기에, 예루살렘 교회는 그 소식에 관심을 갖고 들었던 것이다.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교회의 귀들에 소문(말)이 들렸다'이다.
원문에서는 '귀들'(the ears)에 해당하는 '타 오타'(ta ota)를 써서 예루살렘 교회보다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 개개인들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대한 소문에 큰 관심을 갖고 들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듣고'에 해당하는 '에쿠스테'(ekusthe)는 '아쿠오'(akuo)의 수동태로서 어떤 소문이 외부에서 들려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소문의 내용은 안티오키아에서 복음 선포자를 통하여 복음이 수많은 이방인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티오키아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게 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관심사에 대하여 점검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를 파견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중심이 된 모교회로서 다른 교회를 보살피려는 사랑과 관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사도8,14).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이미 베드로 사도를 통한 경험으로 이방인에 대한 편협한 편견을 버렸기에, 바르나바를 멀리 떨어져 있는 안티오키아에까지 보낼 수 있었다.
여기서 '보냈다'에 해당하는 '엑사페스테일란'(eksapesteilan)의 원형 '엑사포스텔로' (eksapostello)는 어떤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어 어떤 장소로 보낸다는 의미로 '파견하다', '파송하다'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바르나바를 선택하여 파견한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롭게 개종한 자에 대한 관심과 염려와 더불어 안티오키아에 있는 믿는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형제들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서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인 바르나바를 보냈던 것이다.
'바르나바'(Barnabas)는 '휘오스 파라클레세오스'(hyos parakleseos), 즉 '위로의 아들', '권면의 아들'이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권면과 위로의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사도4,36) 안티오키아 교회 파견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서 출중한 교사였고 선교사였으며, 사도 바오로의 협력자로서 초대 교회 복음 전파의 중심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사도9,27; 11,30; 12,25; 13~15장; 1코린9,6; 갈라2,1.9.13; 콜로4,10).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견된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도착해서 그곳의 회심한 이방인들과 몇몇 복음 전파자들을 함께 만나 보고, 그곳에 하느님의 은총, 곧 성령께서 임재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기뻐한다.
그리고는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한다.
여기서 '격려하였다'고 하는 '파레칼레이'(parekalei)는 여러 말로써 '권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파라칼레오'(parakaleo)의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희랍어에서 미완료 과거 시제는 반복과 계속을 나타내므로, 이러한 표현은 바르나바의 권고가 그들에게 계속되고 반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르나바의 따뜻하고 세심한 기질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는 뜻은 '마음에 분명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주님께 확고부동하게 늘 헌신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바르나바가 이렇게 권면하는 이유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에게 많은 박해와 시련들이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지속성을 갖는다는 것은 받은 축복과 은혜를 상실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다는 의미이며, 제자로서의 기본 자세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사도행전 11장 24절의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실한 사람'이라고 나온다.
여기서 '사실'로 번역된 '호티'(hoti)는 '왜냐하면', '~때문에', '~이므로'라는 뜻을 지닌 접속사이다.
이 단어는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 교우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가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착한'에 해당되는 단어 '아가토스'(agathos)는 '놀라다', '경탄하다', '높이 평가하다'의 '아가마이'(agamai)와 '감탄할 만한', '훌륭한'의 '아가스토스'(agasthos)의 같은 계열의 단어로서 주위 사람들이 경탄하고 높이 평가할 정도로 바르나바의 성품이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바르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원문은 '플레레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카이 피스테오스'(pleres pneumatos hagiu kai pisteos)인데, 여기서 '플레레스'(pleres)는 물이 가득 차서 넘치는 정도까지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이 단어는 바르나바에게 있는 성령과 믿음이 그의 언어, 표정, 사고, 삶을 통해 외적으로 넘치도록 표현이 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르나바는 영적으로 풍부한 은혜를 소유한 사람으로서 그의 삶 가운데서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여기서 '인도되었다'는 '프로세테테'(prosethete)의 원형은 '프로스티테미' (prostithemi)로서, 수효를 '더하다', '가입시키다', '부과하다'는 뜻이다.
루가에게 있어서 이 단어는 교회 성장을 의미하는 전문 용어로 쓰였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르나바로 말미암아 안티오키아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을 이루신 주체가 하느님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세테테'(prosetethe)가 수동형이라는 사실이 증명해준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가 성장했다고 해서, 지도자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그 배후에서 역사(役事)하시는 하느님을 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3-24)."
유대인들이 하는 말은 일종의
함정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나는 메시아다." 라고 말씀하시면
유대인들은 로마 당국에 예수님을 고발할 것입니다.
반대로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면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버리게 될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의
말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예수님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믿고 싶어도 당신이 명백하게 말을 안
하니까 못 믿겠다." 라고.
그런 유대인들의 태도는
사도들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라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을 때(요한
1,36),
그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갔고(요한 1,37),
그날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묵었습니다(요한
1,39).
그리고 그 두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안드레아는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증언했습니다(요한
1,41).
그날 예수님께서 그 두
제자에게 "나는 메시아다." 라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고,
"와서 보아라." 라고만 하셨습니다(요한 1,39).
그 두 사람은
유대인들이 보지 못한 무엇인가를 보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안 믿은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보았던 그것을 보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안 믿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의 일상적인 모습이었을 수도 있고,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모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보았던 그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안 믿었다."
라는 말을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어 한
것만 보았기 때문에 보이는 것도 보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안 믿었다."입니다.
안 보여서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보지 않아서
못 본 것입니다.
제자들은 보고 믿었는데, 다른 유대인들은 보고서도 안 믿었다는 것.
자기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은 예수님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성경 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
납득이 안 된다, 동의할 수 없다,
그래서 믿지 못하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리가 너무 어렵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라고 불평하면서
안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가르치셨는데,
그런데도 듣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으려는 마음이 없어서'입니다.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마태 13,15)."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회개하라는 말씀은 듣기
싫어하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5-26)."
예수님께서 명시적으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말씀하시거나, 암시하는 말씀을 하신 적은 많습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요한
8,23)."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요한 8,56)."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본다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면서도 안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도 있고,
'예수님의 일'을 보고 믿은 사람도 있는데,
듣고도 안 믿고 보고도 안
믿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안 믿었을까?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을,
"너희는 믿지 않기 때문에 내 양이 될 수 없다."로 해석할 수도 있고,
"너희는
내 양이 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장 그대로 생각하면,
원래부터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에 안 믿은 것이 되고,
그러면 안 믿은 것에 대한 책임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양이 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안 믿은 것으로 해석한다면,
안 믿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 즉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는 않고,
다른 것만, 즉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원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10,22-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30)
요한 복음 5장 17절에서 간접적으로 밝힌 예수님과 성부 하느님의 일체성이 여기서는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성부 하느님과 본질과 근본에서 일치됨을 밝히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로 번역된 '헨'(hen; one)은 중성이며, 여기서 중성이 사용된 것은 희랍어 어법을 잘 반영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에서 '토 헨'(to hen; the one)은 존재의 궁극적인 통일성, 영원성, 불변하고 파생되지 않는 단일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서, 구별이 없는 존재의 동일성(oneness)을 나타낸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배경을 지니는 '헨'(h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임을 밝히셨는데, 아버지와 아들은 협력자의 관계 이상이며, 본질상 본래 하나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존재의 통일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실은 '~이다'로 번역된 '에스멘'(esmen; are)이 '에이미'(eimi)의 현재 시제라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희랍어에서 현재 시제는 현재와 계속, 그리고 변함없음을 나타내므로,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심을 알게 한다.
예수님의 이같은 주장은 모여 있던 유대인들로 하여금 당장 돌을 집어들어 던지게 할 만큼 커다란 분노를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의 선언은 신성(神性) 모독의 극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실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실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한마디로 신뢰의 관계라 하겠습니다. 양들은 시력이 약해서 앞을 잘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대신 자신을 이끌어 주는 목자의 음성과 다른 사람의 음성은 정확히 구별하지요. 그러기에 양들은 자신을 이끄는 목자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만큼 목자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신뢰란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눈으로 보지는 않았어도, 손으로 확인해 보지 못했어도, 신뢰하는 상대방이기에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상대방도 신뢰하지 못한다면, 어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신앙의 계약을 맺은 하느님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안타깝게도 이런저런 이유로 신뢰가 많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신뢰를 회복하는 길을 다양하게 찾아야 합니다. 신뢰 회복을 위한 첫 번째 길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의 말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듣고 이해하고 있는지, 또 그런 노력을 어느 정도 기울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도 늘 생각하며, 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며, 그를 배려하는 습관도 길러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신뢰는 더욱 굳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