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마르코. 16,15-20)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선교 여행을 할 때 동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사도 12,25; 13,5.13; 15,37-39; 콜로 4,10 참조). 본디 이름이 ‘요한 마르코’(사도 12,12.25 참조)인 그는 또한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 일했으며(1베드 5,13), 주로 안티오키아와 키프로스,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기원후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고 난 뒤인 65년에서 70년 사이에 주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로마에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이 복음서가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저술된 것이다.
베드로는 실바누스의 손을 빌려 쓴 편지를 보내며, 모든 걱정을 하느님께 맡기라고 신자들을 격려하면서 아들로 여기는 마르코의 인사도 전한다.(베드로 1서 5,5ㄴ-14)
사랑하는 여러분, 5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6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7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9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10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11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아멘.
12 나는 성실한 형제로 여기는 실바누스의 손을 빌려 여러분에게 간략히 이 글을 썼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격려하고, 또 하느님의 참된 은총임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그 은총 안에 굳건히 서 있도록 하십시오.
13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14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시편 89(88),2-3.6-7.16-17(◎ 2ㄱ 참조)
◎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제가 아뢰나이다. “주님은 자애를 영원히 세우시고, 진실을 하늘에 굳히셨나이다.” ◎
○ 주님, 하늘은 당신 기적을 찬양하고, 거룩한 모임은 당신 진실을 찬송하나이다. 구름 위에서 누가 주님과 견줄 수 있으며, 신들 가운데 누가 주님과 같으리이까? ◎
○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 그들은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서나이다. ◎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이르시며,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이는 단죄를 받을 것이라고 하시고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신다.( 마르코. 16,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1베드5,5ㄴ-14)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5ㄷ)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닦아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덕인 겸손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다.
아마도 베드로는 최후 만찬 전 예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무릎을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던 장면(요한13장)을 연상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겸손을 앞치마처럼 두르고 서로 섬기라는 의미의 권면(5ㄴ)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하느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본문에서 '교만한 자'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노이스'(hypereoanois)의 원형 '휘페레파노스'(hyperepanos)는 '~위에, 너머에' 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빛이 비추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이노'(pai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남들 위에 자기 모습을 나타내는' 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만은 인간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데까지 이르게 되는데(창세3,5 ;이사14,13.14), 이것이 바로 교만의 극치이다. 하느님은 그런 자들을 대적하신다.
여기서 '대적하시고'로 번역된 '안티탓세타이'는 '안티탓소마이'(antitassomai)의 현재 직설법이다. 이것은 '~반대하여', '~에 대항하여'란 의미의 전치사 '안티'(anti)와 '놓다', '두다'란 의미의 동사 '탓소'(tass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대적하다'(사도18,6)뿐 아니라 '물리치다'(야고4,6)란 의미까지 지닌다. 이것은 적을 궤멸시키기 위한 군사 작전이나 그 결과를 나타내는 군사 용어로서, 매우 강렬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다.
본문에서는 교만한 자들이 철저히 패망하게 된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에는 "파멸에 앞서 교만이 있고, 멸망에 앞서 오만한 정신이 있다." 라고 했다. 반면에 하느님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겸손하게 섬기를 자를 높여 주시는 분이다.
본문에서는 '대적하시고'에 해당하는 '안티탓세타이'(antitassetai)와 더불어 '(은총을)베푸십니다'에 해당하는 '디도신'(didosin)역시 모두 현재 직설법인데, 이것은 교만한 자에게 임하는 화와 겸손한 자에게 임하는 복이 상황과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절대 불변하는 진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6)
여기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손'이라고 번역된 '케이라'(cheira)의 원형 '케이르'(cheir)는 일반 명사로서 신체의 일부인 '손'을 의미하는 것과 더불어 때때로 권한, 소유등의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할 때도 있다.
예를들어, 십자가상에서 죽어 가는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의 손에 위탁한다고 했을때에 그것은 곧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의 권한에 맡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루카23,46)
또한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 속한 것을 빼앗을 자가 없다는 표현에서도 '케이르'는 추상적인 의미를 가진다.(요한10,29). 이 단어는 아버지께서 만물을 아들의 권위에 복종시켰다는 표현에서도 사용되었다.(요한3,35 ;13,3)
이상에서 '케이르'라는 단어가 추상적으로는 소유, 권리, 권위, 능력, 주권 등의 의미를 지니는 것을 보게된다. 더구나 본절에서 '손'이란 명사앞에 '강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것으로 보아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라는 말은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 혹은 통치 아래에서' 라는 의미를 가진다.
결국 본문은 '하느님의 권위 아래 자신을 낮추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이러한 권고를 따를 때에 뒤따르는 보상이 언급되는데, 그것은 바로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이다.'는 것이다.
'여러분을'로 번역된 인칭대명사 '휘마스'(hymas)는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즉 하느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높이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태도를 가진 자만을 높이시는 것이다.
'때'에 해당하는 '카이로'(kairo)의 원형 '카이로스'는 하느님의 주권하에서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결정적인 때, 또는 하느님이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때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때'는 그리스도인이 알 수 없지만, 하느님의 경륜 안에 있으며 하느님 아래에서 겸손한 자가 높여지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보증한다.
그때가 이 세상의 어느 한 때인지, 아니면 재림 후 심판 때인지 알 수 없으나 두가지 모두 가능하다고 보아도 된다. 그러나 전반적인 성경의 흐름속에서 본문의 '때'는 종말론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7)
본절에서 11절까지는 고난 중에 굳게 설 것에 대한 권면이다. 그리고 12-14절까지는 본 서신의 결말 부분으로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이 담겨 있다. A.D.64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본서는, 기록된 지 얼마 후 로마 대화재 사건이 있었고 당시 로마 황제 네로가 이를 그리스도인의 고의적 방화로 그 누명을 덮어씌움으로써, 정말 피비린내 나는 대박해가 있었다.
본서의 저자 베드로는 이제 스스로의 죽음도 얼마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면서 또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이 엄청난 고난을 어떻게든 잘 극복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마치 유언하는 심정으로 고난 중에 굳세기를 다시 한번 간곡히 권면하고 있다.
베드로는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모든 걱정을 주님께 내맡기는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권면한다.
여기서 '걱정'(염려)으로 번역된 '메리므난'(merimnan)의 원형 '메리므나'(merimna)는 본래 '여러 조각으로 나누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메리죠'(meriz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마음이 나누어 지는 것, 상이한 방향들로 분산되는 것을 뜻한다.
즉 한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걱정'(염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 걱정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긍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런 걱정의 자세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걱정을 주님께 온전히 내맡겨야 한다.
예수님은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걱정하는 자들에게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마태오 복음 6장 25-33절에서 하셨고, 루카복음 10장 38-42절에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간섭하면서 마음이 나누어진 마르타의 행동을 지적하며 꾸중하시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필리피 서간 4장 6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무 일에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뢴다면, 우리는 모든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내맡기십시오'에 해당하는 '에피립산테스'(epiripsantes)는 '~의 위에' 혹은 '위를 향하여'란 뜻의 전치사 '에피'(epi)와 '던지다'(루카17,2)란 뜻의 동사 '립토'(ript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위에 던져버리다' 혹은 '위를 향하여 던져 버리다' 라는 의미를 가진 '에피립토'(epiripto)의 명령의 의미를 지닌 분사로서, 6절 상반절의 명령법과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
종합하면, 우리들 마음의 관심사들을 독점하는 것이 결국 걱정(염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들을 모두 하느님께 맡겨버리고 주님의 주권적 경륜 아래에서 겸손하게 살라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심시오. 여러분이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8-9ㄱ)
'정신을 차리다'에 해당하는 '넵사테(nepsate)는 '근신하다',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의미이다. 또한 '깨어 있으라'로 번역된 '그레고레사테'(gregoresate)는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는 단순히 잠에서 깨어 있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 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권고나 요청에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영적 경각심에 대한 이러한 권고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완벽한 헌신이 흔들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결국 이 권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이 영적 경각심을 갖고 하느님을 신뢰할 것을 촉구한다.(1코린16,13)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할 이유를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다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사도 베드로는 과거 겟세마니 동산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놓고 있다가 마귀에게 삼키어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이러한 호소는 자기 체험에서 우러 나오는 것으로, 자신과 동일한 과오를 범하지 말라는 가슴 절절한 권면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적대자'에 해당하는'안티디코스'(antidikos)는 법정 용어로서, '소송의 상대'를 지칭하는 단어이다.(잠언18,17) 이 단어가 마태오 복음 5장 25절과 루카복음 12장 58절에서는 '고소한 자'로 번역되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꼐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베드로 사도가 마귀(악마)를 '안티디코스'로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인을 고발하고 참소하는 마귀의 특성(욥기1,6-2,7 ; 묵시록12,10)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으면, 마귀는 그 틈을 이용해서(에페4,27) 하느님께 참소한다.(묵시록12,10)
이러한 사실을 '마귀'(악마)에 해당하는 '디아블로스'(diablos)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디아블로스'는 '디아'(dia)와 '블로스'(blos)의 합성어인데, '디아'는 '관통하는(through)', '쪼개고 들어오는'의 뜻을 가진 전치사이고, '블로스'는 '(낚아채서)반대 방향으로 던져 버리다' (throw down)라는 뜻을 가진 '발로'(ballo)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마귀(악마)는 죄와 유혹을 통해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쪼개고 파고 들어와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이간질시켜서 인간을 하느님 반대편으로 던져 버리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디아블로스'는 '비방하다', '중상 모략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디아발로'(diabalo)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방자', '참소자', ' 중상 모략자'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본문에서는 참소하는 자의 특성 및 그리스도인을 넘어지게 하는 자의 특성을 지닌 마귀 (악마 ; devil)라는 의미로 쓰였다.
'으르렁거리는 사자'로 번역된 '레온 오뤼오메노스'(leon oryomenos)는 '우는 사자'(a roarling lion)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배가 고파서 으르렁 거리는 사자의 모습이나 혹은 먹이를 잡아 두고서 승리의 환호의 표현으로,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을 반영한다.
구약의 에제키엘 22장 25절과 시편 22장 13절을 참조하면 된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볼 때, 우는 사자의 이미지는 먹이감을 움키고 찢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두렵고 진인한 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베드로는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마귀를 대적하라고 명한다. 이와같은 사상은 야고보서 4장 7절에도 나온다.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그리스도인을 피해 달아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힘과 지혜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해야 한다.
여기서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테이'(pistei)는 '신앙', '신뢰', '신실함'이라는 의미를 가진 명사 '피스티스'(pistis)의 여격이다. 이 용어는 특별히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나타내는 그리스도교의 신학적인 중심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라'고 베드로는 권고하는데, 여기서 '굳건히 하여'로 번역된 '스테레오이'(stereoi)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같은 단단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박해를 틈타 마귀가 행하는 위협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흔들리게 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죽음의 위협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저버리지 말고 죽기를 각오하고 적극적으로 싸우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14ㄴ)
여기서 '평화', 즉 '에이레네'(eirene)는 '광야'를 의미하는 '에레모스'(eremos)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는 단어로서, 문자적으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적막한 광야의 분위기와 같은 평온함'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평온함은 외부에서 밀어 닥치는 소란과 위협 등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견고한 마음이며 모든 근심과 염려(걱정)와 두려움을 초월한 평정한 마음이다.
이런 '에이레네'는 그 평화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서만 주시는 것으로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만 얻을 수 있는 선물이요 열매이다.(갈라5,22).
4월 25일 월요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복음 (요한16,15-20)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6~17)
마르코 복음 16장 16절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이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외적 표시요, 그리스도교의 입문 성사인 세례를 언급하셨다.
'세례를 받는'으로 번역된 '밥티스테이스'(baptistheis; is baptized)는 '밥티조'(baptizo)의 과거분사이다. '밥티조'(baptizo)는 '반복하여 담그다', '담가서 물로 깨끗히 하다'는 뜻을 가지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되었음을
(로마6,3) 공적으로 드러내는 그리스도교의 입문 성사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라는 거룩한 예식을 통해 이 땅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다. 요한 복음 3장 5절에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친히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루카3,21~22;마르1,9~11; 마태3,13~17). 이것은 단순히 겸손의 모범으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며, 자연수를 축복하기 위해서만 요르단 강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것이다.
한편,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에서 '단죄를 받을 것이다'로 번역된 '카타크리테세타이'(katakrithesetai; will be condemned)는 '카타크리노'(katakrino)의 미래 수동태이다. '카타크리노'는 보통 재판 때 사용되는 법적 용어로서 '판결을 받다', '죄에 해당하는 벌을 내리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로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지 않는 자들은 마지막 심판대에서 그에 대한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됨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믿는 이들에게 맡길 때에 일방적으로 선교의 의무만을 강요하지 않으셨다. 먼저 복음을 능력껏 전파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을 주시면서 사명을 맡기셨다.
'표징'으로 번역된 '세메이아'(semeia; signs)는 '세메이온'(semeion)의 복수 주격이므로 여러가지 다양한 표징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세메이온'(semeion)은 '표적', '징조'라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보낸 사람들을 보증하기 위해 행하시는 기적과 놀라운 사건을 뜻한다.
즉 표징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도구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 내려오는 하느님의 능력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능력은 새로운 것이 아닌데, 이미 12제자의 파견(마태10,1; 마르3,15)때와 일흔 두제자의 파견(루카10,17) 때도 주어지고 나타났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로 사도들과 제자들을 대상으로 제한되었던 능력이 복음을 믿고 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확대되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복음을 믿고 전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표징으로 구마와 신령한 언어가 있을 것이 예언된다. 구마는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에페2,2)들의 능력을 제어하신 하느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마귀에게 종되었던 이가 복음이 전파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어 자유롭게됨을 보여 주는 표징이다.
여기서 '쫓아내고'로 번역된 '에크발루신'(ekbalousin; they will cast out; they will drive out)은 '에크발로'(ekbalo)의 현재형이다. '에크발로'는 어떤 이가 행하는 권세를 빼앗고 다른 장소로 쫓아낼 때 사용되는 단어이며, 여기서는 세상 권세를 잡고 있던 마귀의 세력들을 쫓아내는 것을 뜻한다.
즉 복음 전파시 이것을 방해하는 악한 영들의 세력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칠 수 있음을 약속하시는 말씀이다.
특히 현재형으로 기록된 이유는 이러한 표징이 오고가는 세대에 항상 현재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들'에 해당하는 '글롯사이스~카이나이스'(glossais~kainais; new tongues)는 오순절날 이후에 내려질 이적에 대한 암시이다(사도2,4; 10,46; 19,6).
'새로운 언어들'이라는 단어는 다른 복음서에는 언급이 안되는 마르코 복음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새로운 언어들'에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외국어 방언(사도2,4)과 개인의 깊은 경건한 신심 생활을 돕고, 교회의 선익을 위해 잘 봉사하기 위한 하느님의 은사로서 천상의 방언이 있다(1코린12,10; 14,4).
아마도 여기서 나타난 '새로운 언어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던 지역의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새로운 언어들'로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사도2,4).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예수님의 이러한 약속은 몰타(Molta) 섬에 있었던 바오로에게 일어났으며(사도28,3~6), 독을 마셨지만 해를 입지 않은 경우는 성경에는 없지만,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 (Eusebius, 교회사,Ⅲ, 39)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누리게 될 놀라운 권능과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상징하는 표현이지,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거나 개인의 공명심을 위해 이러한 시험을 해 보라는 뜻이 아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에게 일어났던 것이 일치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이 정확하게 바오로에게서 성취되는 것을 보여 주어서, 하느님의 약속의 엄정성과 더불어 바오로가 진실한 복음의 사도임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중에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행하셨던 대표적인 표징이었다(마르6,5; 7,32; 루카4,40).
예수님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러한 표징을 행했으며, 이러한 표징을 행한 대표적인 제자는 바오로이다(사도28,8). 여기서 '손을 얹으면'에 해당하는 원문은 '케이라스 에피테수신'(cheiras epithesousin; they will place their hands on; they will lay on by hands)이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명령이지만,
사도들에게만 하신 명령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오라고 사람들을 초대하는 활동이기도 하고,
그 나라를 완성시키는
일에 동참하는 일꾼이 되라고 초대하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오라는 초대에 응답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일꾼이 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일꾼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다음에는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선교활동은 모든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글자 그대로 '전체 인류'입니다.
인종, 민족, 국적, 종교, 이념 등과 상관없이
모든 곳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장벽에 막혀서 선교활동을 못하는 곳이 많은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 마음대로 선교활동에서 제외시켜도 되는 지역은
없고,
또 제외시켜도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
그분은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다는 것,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 등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
라는 말씀은 '복음'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서약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그런 사람은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는
'심판 선포'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해 주어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아서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
이 말씀은 믿기만 하면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초능력이) 생길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 말은
'믿는 이들'이 표징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키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을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그런 기적들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일들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하신 일들입니다.
사도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한 일이 아니라.
이 말씀은 뒤의 20절의
말씀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이 말은, '표징'이란 '말씀'을 확증하는,
즉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보조 수단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보조 수단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기적을 일으킬 것인지는
예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말씀'을 확증하는 보조
수단이기 때문에,
표징, 또는 기적은 안 믿는 사람들을 굴복시켜서 믿게 만들기 위한 일도 아니고,
믿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일도 아니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고 실천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
그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사는 동안 한 번도 표징(기적)을 체험하지 않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어떻든 우리는 사도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말씀'을 확증하는 표징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요즘에는 옛날과는 다르게
기적이 별로 안 일어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들의 믿음이 옛날보다 약해졌고,
의심은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부족해서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도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거나,
'뜻밖의 행운'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했고, 기도한 다음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을 표징으로, 또 기적으로 믿는 것이
옳습니다.
표징이나 기적을 과학이
발달하기 전의 옛날이야기로만,
또 성경을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옛날이야기 책'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이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과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을 제대로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과학이 옛날보다는 많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피조물인 인간의 학문일 뿐입니다.
물론 과학의 발달은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의 학문이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가장 큰 사명입니다.
우리는 왜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해야 합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를 판단하도록 도와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과 가치관을 따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 기준에 따라 행동하기에 저마다 자기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지요. 과연 그렇습니까? 악을 행하는 자도, 또는 사이비 종교인도 자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악의 세력이나 사이비 종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자들 역시 자신들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이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알려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널리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판단과 가치관의 기준으로 삼도록,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본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