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간 화요일]평화 (요한 14,27-31ㄱ)
돌을 맞고 도시 밖에 버려진 바오로는 다시 일어나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며 제자들을 격려한다.(사도행전 14,19-28)
그 무렵 19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20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2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
시편 145(144),10-11.12-13ㄱㄴ.21(◎ 12 참조)
◎ 주님,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알리나이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 당신의 위업과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 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
○ 내 입은 주님을 노래하며 찬양하리라. 모든 육신은 그 거룩하신 이름 찬미하리라. 영영 세세에.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시고,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을 내지 말라고 이르시며, 아버지의 명령을 다했으니 미리 말한 대로 아버지께 갔다가 돌아오겠다고 하신다. (요한 14,27-31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사도바오로의 1차 선교 여행 지도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제1독서 (사도14,19-28)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타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1~23)
데르베에서 사도 바오로는 큰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으며 또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사도 바오로가 핍박을 당했다거나 반대에 부딪혔다는 기사가 없고, 오직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다는 가슴 벅찬 기사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여기서 '제자로 삼고'로 번역된 '마테튜산테스'(matheteusantes)는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마태28,19)이 원활하게 수행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태오 복음 28장 19절에는 '마테튜오'(matheteuo)의 명령형이 사용되었으며, 본문의 '마테튜산테스'는 분사형으로 같은 단어이다.
제자로 삼았다는 것은 데르베 사람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들어오게 하였을 뿐 아니라 세례를 주고 말씀대로 살게 하였다는 사실까지 포함한다.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22)
'힘을 북돋아 주고'로 번역된 '에피스테리존테스'(episterizontes)의 원형 '에피스테리조'(episterizo)는 더욱 굳게 하고 강화하며 확실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사도행전에서만 4회 쓰였는데(사도15,32.41; 18,23), 모든 사람의 마음과 교회의 신앙심을 확고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이 복음을 전해 얻은 리스트라와 이코니온과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의 제자들의 신앙이 행여나 유대인들의 핍박과 이전 삶의 유혹으로 흔들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의 마음으로 그들의 믿는 바를 더욱 확고하게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런 일에는 몇 마디의 격려보다는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없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22)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한 환난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수받고 믿기 시작한 성도들에게도 닥쳤을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점점 증가하는 핍박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버릴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믿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따르며, 그러한 환난을 믿음과 인내로 극복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굳게 서도록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원수인 사탄과 그 졸개들이 공중 권세를 잡고 있으며(에페2,1), 불신자들은 다 그러한 세력의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게 마련이고, 성도들은 그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환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거나, 그로 말미암아 신앙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환난이 두려워 신앙을 버리면, 하느님의 나라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로마8,17).
또 성도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과는 도무지 비교도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로마8,18).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23)
사도 바오로 일행은 자신들이 떠난 후에도 복음을 받은 지역의 제자들이 신앙 생활을 원활히 하며, 복음이 더욱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세운 뒤 교회를 굳건히 하기 위하여 그 교회의 구심점이 될 원로들을 임명한 것이다.
여기서 '임명하고'로 번역된 '케이로토네산테스'(cheirotonesantes)의 원형 '케이로토네오'(cheirotoneo)는 '손을 뻗는'을 뜻하는 '케이로토노스' (cheirotono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본래 '손을 내뻗어 투표하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본절과 코린토 후서 8장 19절에만 쓰였으며, 모두 '택하다'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한글 새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원로들을 택한 것으로 보이지만, 원어의 뜻에 의하면, 그 지역 교회의 성도들이 손을 들어 투표한 다음 사도 바오로나 바르나바가 뽑힌 그들을 원로로 세웠다는 의미가 된다.
그들이 '원로'에 해당하는 '프레스뷔테루스'(presbyterus)들을 세운 목적은 이방 지역의 한복판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를 조직적으로 잘 감독하고, 여러가지 환난과 핍박등 어려움 속에서도 신도들이 힘을 잃지 않고 든든히 서 가도록 위로와 격려의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영적으로 암흑의 땅이었던 소아시아 지역에도 복음의 밝은 빛이 지속적으로 비치는 교회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들이 믿게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3ㄷ)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새로 세워진 교회와 원로들을 주님께 의탁했다는 것은 그곳을 떠나면서 하느님께 그 교회들과 성도들을 전적으로 맡겼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제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떠난 그곳 교회들은 외형적으로는 원로들을 통해 이끌어질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교회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굳게 지켜 주실 것이다.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14,27-31ㄱ)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7)
요한 복음 14장 27절과 28절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날 것이지만, 이 세상에 남아있는 이들이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내는 일이 없어야 할 이유를 밝히신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시기 때문이다. 뭔문을 직역하면, '평화를 내가 너희에게 가게 한다'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즉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약속하신 위대한 선물이다.
여기서 '남기고 간다'로 번역된 '아피에미'(aphiemi; I leave)는 '남기다', '가게 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누리는 평화를 주시는 주체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나 권력을 가진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이 세상이 줄 수 없고, 이 세상이 알지도 못하는 완전한 평화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상의 평화이며, 영적인 평화이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맛볼 수 없고, 막강한 정치 권력자나 군사력을 동원해도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이다. '평화를'로 번역된 '에이레넨'(eirenen; peace)은 '에이레네'(eirene)의 단수 목적격이다.
고전 희랍어에서는 이 단어가 전쟁과 대립적인 개념,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기인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였다.
하지만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 '샬롬'(shalom)의 역어로 나오는데, '샬롬'은 전쟁에 반대되는 상태라기보다는, 불안이나 갈등이 없는 완전한 정의가 실현된 상태를 말한다. 이같은 평화는 주님에게서만 나오며, 오로지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미디안과의 전투를 앞두고, 기드온이 자신이 주님을 위해 쌓은 제단의 이름을 '예호와 샬롬'
판관6,24>이라고 한 것은 평화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잘 알게 한다.
말하자면, '예호와 샬롬'은 '주님의 평화'라는 뜻이며, 악(惡)이 득세하는 상황 가운데서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소망의 의미가 있으며, 이 문제의 해답과 열쇠가 주님께 있음을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평화도 어떠한 분쟁이나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절대 평화의 상태를 말한다.
믿는 이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동안에(2티모 2,3.4) 분쟁과 문제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 평화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도 많은 분쟁에 휩싸이셨고, 심각한 문제들을 만나셨다. 하지만 어떤 분쟁이나 문제들도 주님의 길을 막지 못했으며, 그분께서 하시려는 일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평화이며, 최악의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실현된다는 굳건한 믿음의 모습이다. 감옥 속의 베드로(사도12,6.7)나 바오로(사도16,25)가 보여 준 태도에서 이 평화의 실체가 잘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평화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불안한 사회 현실에 대한 두려움,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평화를 얻는 길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하는 것임을 일러 주십니다.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려면 먼저 용서를 청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용서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집착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가 어두운 여인이었지만,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데 장애가 되었습니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그녀에게 나타나셨지요.
이렇게 볼 때, 어느 누군가의 과거가 어둡고 죄스럽다 하여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단지 지금 이 순간, 회개하고 하느님께 되돌아가겠다는 결단만 있으면 되지요. 이렇게 볼 때 평화를 얻기 위한 조건은 회개라 하겠습니다.
회개란 하느님을 자기 중심에 두지 않는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곳을 향하던 자신의 마음과 실제 생활을 바꾸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을 뜻하지요.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늘 용서받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며, 상대방을 용서해 줌으로써 평화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평화 송영진 모세 신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준다고 말씀하셨으니
제자들이 평화를 받은 것이 되는데, 즉 평화로운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 수난 때에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하나도 평화롭지 않은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는 어디로 갔을까?
원래 은총은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평화도 은총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도 받으려고 노력하고,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그 평화를 얻게 됩니다.
열두 사도를 파견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평화를 준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평화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도대체 무엇이
필요할까?
평화를 받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1)
믿음
평화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가 되려면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믿음이 없으면 불안해지고 평화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가지고 있던
평화도 잃게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 때 큰 풍랑이 일어서
위태롭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마르 4,37).
그때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라고 말합니다(마르 4,38).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호수를
고요하게 만드신 다음에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풍랑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겁을 내는 것은 평화를 잃은 모습입니다.
그럴 때에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2)
희망.
루카복음에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루카
10,5-6.공동번역)."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라는 말이
새번역 성경에는 '평화를 받을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세속에서도, 또 국가
간의 문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평화를 희망해야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게 되고,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평화를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전쟁을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것은 결코 평화가 아닙니다.
3)
사랑.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로마 12,17-18)."
이 말에서 '좋은 일'이라는 말은 '사랑, 선행'으로
해석됩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려면,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면 됩니다.
사실 마음속에 '미움'이 있으면 평화를
잃게 된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입니다.
정말로 평화를 원한다면,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버리고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바로 그 점이 '예수님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가 다른 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예수님의 평화, 즉 하느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평화는
순수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은총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평화'는(세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자기 혼자서만 잘 지내는 편안함일 뿐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힘으로 억압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 상대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 혼자만의 편안함을
누릴 수는 있겠지만,
그런 것을 평화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미움을 뿌린 곳에는 미움만 자랍니다.
다른 사람의 평화를 빼앗으면
자기 자신도 평화를 잃게 됩니다.
사랑을 뿌린 곳에는 사랑이
자라고, 평화를 심으면 평화를 얻게 됩니다.
전쟁으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평화는 평화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가 순교하는 장면을
보면,
박해자들은 '마음에 화가 치밀어' 스테파노에게 이를 갈고 있습니다(사도 7,54).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사도 7,55).
박해자들은 평화를 완전히 잃은 상태가 되었지만,
스테파노는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