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간 금요일]한국 103위 순교 성인 시성일 (요한16,20-23ㄱ)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유다인들의 고발로 재판을 받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코린토를 떠나기 전에 머리를 깎는다. (사도행전 18,9-18)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9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11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2 그러나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합심하여 들고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13 “이자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바오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 여러분, 무슨 범죄나 악행이라면 여러분의 고발을 당연히 들어 주겠소. 15 그러나 말이라든지 명칭이라든지 여러분의 율법과 관련된 시비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그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16 그러고 나서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내었다. 17 그러자 모두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매질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18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지만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을 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요한 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부활 제6주간 금요일(한국 103위 순교 성인 시성일) 제1독서 (사도18,9-18)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9~11)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코린토에서 유대인들의 많은 저항과 반대가 있던 상황에 맞추어 주께서
환시 가운데에서 바오로에게 나타나 용기를 주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잠자코 있지'로 번역된 '시오페네스'(siopenes)는 '조용하다',
'조용하게 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시오파오'(siopao)의 단수 2인칭
과거 명령법 동사이다.
예수님께서 폭풍우 치는 바다를 향해 명령을 내리실 때나(마르4,29),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시 바리사인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도 본 동사가 사용되었다(루카19,39.40).
바리사이인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시 그의 제자들에게 가했던 위협과 같은
종류의 것을 이때 바오로도 코린토에서 유대인들에게 받았던 것 같다.
아마 회당장 크리스토포스와 같은 유력한 유대인이 개종하고(사도18,8), 또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자, 유대인들은 당황하여 바오로의 신변에
위협을 가했거나 협박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핍박 속에서 바오로는 과거 필리피나 테살로니카 및
베로이아에서처럼 코린토를 떠나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주께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 가운데 처한 바오로에게 환시 속에서 나타나셔서,
사람들의 훼방이나 협박을 두려워해서 침묵하지 말고, 계속해서 담대히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바오로가 위기에 처할 때나 위축되어 있을 때마다 나타나셔서
용기를 주셨다(사도23,11; 27,23).
주님께서는 당신의 봉사자들이 당신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항상 새 힘을 공급하여 주시는 분이시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ego eimi mota su; I am with thee)
바오로가 유대인들의 협박과 생명에 대한 위협 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바오로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는 생략하여도 의미 전달에는 지장이 없는 '에고'(ego; I)란
1인칭 대명사가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있다'라고 번역된 현재형 동사
'에이미'(eimi; am)가 사용되어 지금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주님 당신께서
항상 그와 함께 계실 것이란 내용이 잘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주님의 임재 및 동행에 대한 약속은 오랜 선교여행, 지속적인 말씀 전파,
그리고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박해로 말미암아 심령이 위축되고, 지칠대로
지쳐 있는 바오로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로를 주셨을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동행에 대한 약속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의 '임마누엘'(마태1,23; 이사7,14)이라는 용어를 떠올리게 된다.
하느님과의 오랜 단절 속에서 어두움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이 임마누엘의 소식이 구원의 지표가 되었듯이, 바오로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바오로는 이미 깊고 어두운 감옥 속을 뚫고 비쳤던 하느님의 빛을 경험한 터였으므로
(사도16,25.26),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의 빛이 깨뜨리지 못할 어두움과 두려움의
질곡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만을 지워 놓고서 무관심속에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사랑의 빛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시고, 우리가 당신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끊임없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시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바오로를
대적하는 자나 핍박하는 자가 전혀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비록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써
그의 생명이 보호되며 어려움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내 백성'으로 번역된 '라오스~모이'(laos moi)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유익을 줄 사람들로서 아직까지 복음을 듣지는 못했지만, 듣기만 하면 믿어
구원받을 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라오스'(laos; people)는 원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용어이지만,
이제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방인에게도 구별없이 사용되어 지고 있다
(사도15,14; 디도2,14; 1 베드2,9).
이것은 이방인이 주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역력히 보여 준다.
이들은 바오로가 1년 6개월 동안 코린토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 돌아온
사람들이며, 또한 그 이후에도 복음을 영접하게 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자신의 결단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도적인 선택에 의하여 되어진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바오로는 서원할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18)
바오로는 시리아를 향하여 떠난 이후, 경유지인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혹자는 이 때 바오로가 제3차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여행 준비의 과정으로서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 머리를 깎았다고 하지만, 이는 별로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선교 여행의 준비 차원에서 머리를 깎는 것이었다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코린토에서 깎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며, 본절에도 '바오로는 서원할 일이
있었으므로' 머리를 깎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은 '나지르의 서원'(Nazirite vow)일 것이다(민수6,1~21).
그는 코린토에서 장기간 체류하면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특별히 지켜주심을 알았고,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일정 기간 자신을 하느님께 구별하는 서원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켕크레애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그 기간이 다 차서 나지르인
서원 종료 후의 절차에 따라 머리를 깎은 것으로 보인다(민수6,1~21).
이러한 사실은 '서원할 일이 있었으므로'에 해당하는 '에이켄 가르 유켄'
(eichen gar euchen; for he had a vow)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이것을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는 서원을 가졌다'인데, 여기서 '가졌다'에
해당하는 '에이켄'(eichen)이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서 바오로가
켕크레애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계속 서원 상태에 있었음을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바오로가 옛 유대인들의 관습을 좇아 서원한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오로가 자기 자신을 '유대계 그리스도인'(2코린11,22)으로 생각한 것이나,
제3차 선교 여행을 마치면서 '나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사도23,6)
이라고 언급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그는 유대의 관습을 남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 가운데에서, 문화적이고
의식적인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기(1코린7,17~24; 9,19~23)때문에,
그가 나지르인의 서원을 했다고 해서 다시 유다이즘으로 회귀한 것은 아니다.
부활 제6주간 금요일(한국 103위 순교 성인 시성일) 복음 (요한16,20-23ㄱ)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0)
요한 복음 16장 20절에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세상과 제자들이 보이는
상반된 반응이 나온다.
제자들은 울며 애통하고 근심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한다.
여기서 '세상'에 해당하는 '호 코스모스'(ho kosmos)는 어두움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세력들을 대표하는 표현이며, 특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한 유대인들을 말한다.
이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이들이 죽이고자 한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곧 반전될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근심하겠지만'에 해당하는 '뤼페테세스테'(lypethesesthe; will be sorrowful;
will grieve)는 '뤼페오'(lypeo)의 미래 수동태로서 '슬퍼할 것이다',
'괴로워 할것이다', '마음이 상할 것이다'는 뜻을 전한다.
이것은 내면적인 비탄과 슬픔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70인역(LXX)에서는 서로 다른 13개의 히브리어 동사들의 역어로 나타나는데,
신체적인 고통, 역경, 비애, 슬픔, 괴로움, 공포, 분노 등과 같은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용례로 쓰였다.
따라서 이 단어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제자들이 겪게 될
내면적인 고통을 잘 나타낸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제자들의 근심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제자들이 일시적으로는 극심한 슬픔과 두려움에 싸여 있었지만(요한20,19),
이것이 곧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게 된다(요한20,20; 사도2,46).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표현은 그들의 슬픔과 근심이 깊었던 만큼
기쁨과 즐거움도 클 것임을 나타낸다.
'기쁨'으로 번역된 '카란'(charan; joy)은 '즐거운 잔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주체할 수 없는 극심한 슬픔과 불안으로 깊이 가라앉았던 제자들의 내면에
기쁨과 즐거움으로의 일대 국면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잠시 동안 겪은 고통을 보상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며, 요한 복음 16장 20절에 나오는 '울며 애통하겠지만'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것처럼, 초상집 같은 우울한 분위기를 즐거운 잔칫집으로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사건들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어지는 부활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역사상 모든 인간을 억눌러 왔던
죄와 죽음이 정복되고, 예수님의 대속적 십자가상 죽음의 구속성혈의 공로를
의지하게 될 때, 죄사함의 은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건들로 말미암아 그들이 현세적, 정치적 메시아로 알았다가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예수님께서, 사실은 온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만왕의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진정한 메시야이시고,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영신적 메시야이기에 그분의 통치 아래
그들이 살아가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말년에 파킨슨병으로 고통을 당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병자와 고통받는 이들에게 “여러분의 고통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는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진정 가치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산의 고통과 기쁨을 말씀하시면서, 수난의 고통 다음에 오는 부활의 기쁨은 클 것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어떤 중국인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왜 서양 신은 저리도 고통스러운 모습일까?”라고 중얼거렸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께서는 왜 저렇게 고통스럽게 돌아가셔야 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제자들의 마음도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들었을 때, 낙담과 걱정,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전쟁과 사회의 모순을 바라볼 때, 우리도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난의 고통과 부활의 기쁨을 기억하게 하시며, 우리 마음 안에서 아무도 뺏을 수 없는 기쁨을 발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삶의 고통에서 도망치지 않을 용기를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고통의 순간에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기쁨과 희망, ‘아무도 뺏을 수 없는’ 부활의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길고 어두운 고통의 동굴을 지나야 하기에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 송영진 모세 신부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1-22)."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생기는 제자들의 슬픔과
예수님의 부활 덕분에 제자들이 얻게 되는 기쁨을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수난 전의 예수님 자신의
근심과
부활 후의 예수님 자신의 기쁨을 설명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에서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
예수님께서 피땀을 흘리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뇌가 극에
달했음을 나타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고뇌하셨을까?
그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고
멸망의 길로 가는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1-42)"
또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한 인간으로서 겪으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뇌에는 '고난의
잔'에 대한 인간적인 근심과 고통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습니다(루카 22,45).
그들의 슬픔과 두려움도 대단히 컸을
것입니다.
당시의 제자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수난이 단순히 '진통의 시간'이 아니라
'절망과 공포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예고하셨지만, 그 부활 예고 말씀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제자들은 절망했고, 슬퍼했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예고 말씀을 기억해낸 것은
무덤에 나타난 천사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려 주었을
때입니다(루카 24,8).
그것은 그 전까지는 부활 예고 말씀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어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라는 말씀은, "부활은 출산과 같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로
얻게 되는 기쁨이 너무 커서
수난의 슬픔과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그만큼 부활의 기쁨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수난 과정은 대단히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부활 장면은 상대적으로 짧고 간단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왜
복음서를 기록할 때 부활보다는 수난에 더 집중했을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현재의 기쁨'이고, '수난은 잊으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다고 해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특히 잊으면 안 되는 것은 수난과 죽음의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려고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회개와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걸핏하면 죄를 짓고 있고,
죄를 짓고 나서 회개했다가 또 다시 죄를 짓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은 아직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교회의 상징으로 사용하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즉 십자고상을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의 회개와 구원이 아직도 진행 중인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부활에 관한
일을 수난보다는 상대적으로 짧고 간단하게 기록한 것은,
덜 중요해서도 아니고, 기록할 내용이 없어서도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자세하게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기쁨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너희의 지금의
근심과 슬픔은 잠깐 동안의 일일 뿐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고통과 슬픔은 순간이고, 기쁨과 행복은 영원하다는
것.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신앙생활과 인생살이에서 겪는 고통과 슬픔의 시간은
너무 길기만 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사실 '영원'이라는 시간을 경험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고,
그것을 실감할 수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영원한
기쁨'은 죽은 다음에나 얻게 되는 기쁨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 시작되는 기쁨입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기쁨을 얻었고,
그 기쁨 속에서 살았고,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또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도록 하여라."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한눈을 팔면서
세속의 쾌락과 즐거움만 바라보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기쁨을 지키는 일은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곧바로 그 기쁨을 빼앗기는
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셨는데도
우리가 잘못해서 허무하게 잃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