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간 수요일]출세와 섬김 (마르 10,32-45)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해방되고 하느님 말씀으로 새로 태어났으니,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이른다.(베드로 1서 1,18-25)
사랑하는 여러분,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20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21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22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었으니,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23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24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25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시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청하는 제자들에게 높은 사람이 되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마르코 10,32-45)
그때에 제자들이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서서 가고 계셨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또 뒤따르는 이들은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가시며, 당신께 닥칠 일들을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33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34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나서 죽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35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37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39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40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41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42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4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제1독서 (1베드1,10-16)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했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4~15)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14절에서 수신자들의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와 이후의 현재 신분을 대조하면서 과거를 단절하고 현재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한다.
그들은 복음을 받기 전에 무지하여 각종 더러운 욕망들을 추구하면서 살았었으나 이제는 하느님의 은총 아래에 있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순종하는 자녀로서 ~~해서는 안된다'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새 성경이 '~로서'로 번역한 접속사 '호스'(hos)는 자격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영어의 'as'의 의미이다.
그리고 '무지했던 때'에 해당하는 '엔 테 아그노이아'(en te agnoia)에서 '아그노이아'(agnoia)의 원형 '아그노이아'(agnoia)는 '무지'(ignorance)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희랍어 구약 성경 70인역(LXX)과 신약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이방인의 특성인 하느님께 대한 무지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시편79,6; 예레17,30; 갈라4,8; 에페4,18).이러한 용례는 본 서신의 수신자들이 사욕들을 따라 산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었을 때에 행한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욕망'에 해당하는 '에피튀미아이스'(epithymiais)는 복수 명사로서 '사욕들'(lusts; evil desires)이란 의미이다. 원형 '에피튀미아'(epithymia)는 어떤 대상을 향한 욕구라는 의미로서 본래는 가치 중립적 단어이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대부분 도덕적, 영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여 버려야 할 욕망을 나타내는 용례로 쓰였고(요한8,44; 로마13,14; 에페4,22; 2티모2,22 등), 베드로 전서에서도 동일한 용례로 쓰였다(1베드2,11; 4,2).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는 욕망은 경계하여 엄격히 통제하지 않으면 사람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죄를 짓게 하며, 자연적인 본능의 충동대로 살게 하는 것들로서 주로 이방인들의 특성인 도덕적 죄악을 가리킨다(마르4,19; 갈라5,16; 1베드2,11; 4,2; 1요한2,16).
사도 베드로는 지금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 갖추어야 할 실천적인 요구로서 그런 욕망들을 따르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베드로 전서 1장 13,14절을 통해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권고한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15~21절을 통해 이렇게 성도들을 향하여 거룩한 삶을 권고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특히 베드로 전서 1장 15~17절에서는 성도는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거룩'이라는 것은 어떤 예식이나 의식상(ritual)의 정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도 베드로는 지금 유다인들이 지키던 전통, 즉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부지런히 씻거나 장터에서 돌아와 반드시 몸을 씻고 음식을 먹거나 그외에도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관례(마르7,3.4) 등에 관하여 '거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느님과 통교함에 있어 필요 불가결한 영적, 도덕적 거룩한 정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 전서 1장 15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금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결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을 닮은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내면적이거나 '예수님의 구속사업의 공로의 은혜을 입어서 정결(거룩)하게 된' 존재론적인 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는 이 '거룩'을 일상의 구체적인 삶의 행동과 연관된 '행실'('anastrophe'; '아나스트로페'; manner of conversation)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세상 속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면을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연중 제8주간 수요일 복음(마르10,32~45)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8)
마태오 복음 20장 22절에는 '잔'에 대한 언급만 나오지만, 마르코 복음 10장 38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례'까지 언급하고 있다. '잔'이나 '세례'는 여기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한다.
'잔'에 해당하는 '토 포테리온'(to poterion; the cup)은 일차적인 뜻으로는 마시는 그릇(마르7,4; 마태23,25; 루카11,39)를 가리키며, 구약에서 때로는 번영과 재산, 부(富)의 의미로 사용되었지만(시편16,5; 23,5), 주로 괴로움과 수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시편75,9; 이사51,17; 예레49,12; 에제23,31~34).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 죽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마르14,36; 루카22,42; 요한18,11).
그리고 '세례'에 해당하는 '토 밥티스마'(to baptisma; the baptism)도 구약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어떤 사람이 극심하게 당하는 재난이나 고난을 뜻한다(시편69,1~2). 이런 의미에서 '잔'과 '세례'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아주 분명히 보여 주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마시는'에 해당하는 '피노'(pino; drink)는 현재 능동태로서 예수님께서 자원으로 기꺼이 수난을 받으시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은 당신의 목숨을 많은 이들의 대속의 제물로 주는 것으로서 이사야서 53장 5절의 예언과 같다.
따라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을 같이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과 수난을 같이 하겠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의 의미를 여전히 깨닫지 못한 채, 개인적인 영광에 대한 집착만으로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과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제자들의 마음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마태20,22)하시며 안타까워 하셨다.
<출세와
섬김>송영진 모세 신부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10,35-37).”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마르 10,41).”
야고보와 요한이 청한 것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높은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두 자리를 청한 것입니다.
다른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긴 것은,
그들도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권력욕과 명예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고,
예수님을 따르면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아직은 잘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아직 다 버리지 않은 상태라고 말할 수도 있고,
또는 예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의 청을 수락하신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거절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영예를 얻기를 바라는 소망
자체를
예수님께서 문제 삼지는 않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마태
6,2)
버려야 할 세속적인 욕망이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께서 높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좋은 일, 즉 ‘거룩한
소망’이기 때문에
두 사도의 소망 자체를 문제 삼지 않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높여
주시기를 바라는 거룩한 소망은
세속적인 방식으로는 이룰 수 없고,
하느님(예수님)의 방식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소망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6-9).”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드높이
올리신 것처럼 우리도 높여 주시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해야 합니다.
지금 낮추면 나중에
높아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르 10,40).”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의 높은
자리는
너희와 나의 이 세상에서의 사적인 친분 관계로 정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 뜻에 합당한 사람이 얻게 되는 자리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뜻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정해진 이들’은, ‘하느님 뜻에 의해 정해진 이들’인데,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로 해석됩니다.
즉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마르 8,34).
높은 자리를 얻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에게 ‘섬김’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44).”
이
말씀은, “너희는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너희는 첫째가 되려고 하지 말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춘 사람들이고,
그들은 모두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는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가 없고,
모든 자리가 다 ‘가장 높은 자리’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모두가 다 서로 자기를 낮추고, 서로 섬기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낮은 사람이고, 동시에 모든 사람이 다 높은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높은
자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영원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군림하고 세도나 부리게 되는 ‘세속에서의 높은 자리’는,
언젠가는 하느님에 의해서
끌어내려지게 될(루카 1,52) 허무한 자리입니다.
이것은 세속 권력뿐만 아니라 교회 직책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공동체 질서를
위해서 높은 자리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 자리는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종의 자리입니다.
그것을 잊으면 높은
자리에 앉는 일은 세속에서 허무하게 끝날 것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높은 자리’는 얻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당신이 받을 수난과 부활에 대해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수난에는 귀를 막고 그분의 영광만을 귀담아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착각하고, 새로운 세상에서 우의정과 좌의정의 벼슬자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을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으며, 그분이 마시는 잔과 세례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주 예수님의 영광과 부활은 쉽게 받아들이지만 그분의 수난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회피하고 그에 대해 눈감고자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 이야기는 바로 우리 신앙인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매 맞고 조롱당한 뒤 처형당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사건 앞에 당황한 채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인의 진면모는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는 예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