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9주간 화요일] 5. 31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루카1,39-56)

2016. 5. 31. 오후 6:2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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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9주간 화요일] 5. 31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루카1,39-56)


해마다 5월 31일에 지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루카 1,39-56 참조)을 기념하는 날이다. 5월 31일을 축일로 정한 것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기념하기 위해서다. 성모 마리아께서 천사의 메시지를 따라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이러한 이웃 사랑은 위대한 두 인물이 만나는 자리가 된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니 다시는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고 선포한다. (스바니야 3,14-18)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 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 인사하자, 엘리사벳은 여인 중에 복되시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시다고 외친다. 하느님의 구원을 찬미하는 ‘마리아의 노래’가 이어진다.(루카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연중 제9주간 화요일 제1독서 (스바니야3,14-18)

주님께서 보호하셨다' 이름 뜻을 지닌 '스바니야'서의 작중 연대를 1장의 머리글을 보면,

요시야 임금 통치 시절(B.C.640-609년)로 제시한다.

 

한 세기 이상 고대 근동 전체를 호령하던 아시리아 대제국이 서서히 몰락해 가는 것을 보면서

유다 임금 요시야는 가나안의 바알 숭배와 아시리아의 천체 숭배를 근절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한다(2열왕23,4-14). 이런 상황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의 권능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주님의 날을 선포한다.

 

스바니야서는 니네베의 파괴를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임금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계시한다.

스바니야서의 대부분은 요시야 임금의 통치 시절과 부합하지만, 일부 대목은 유배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예를들어, 오늘 독서의 예루살렘의 재건을 노래하는 마지막 대목 3장 14-20절은

이 책의 다른 대목보다 적어도 한 세기 이상 늦게 곧 6세기 말에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스바니야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부분(1,2-2,3)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신탁이다.

그들은 야훼 종교와 주변의 다른 다신교를 혼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 하느님의 주권과 권능을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고 거기에 존경을 표하지도 않았다.

 

둘째부분(2,4-15)은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민족을 거슬러 선포한 신탁이다.

주님의 주권은 사방의 민족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모든 신들에게까지도 미친다.

 

마지막 세째부분(3장)은 다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먼저 예루살렘 주민을 대표하는 지도자, 통치자, 예언자, 사제들의 잘못을 고발함으로써 그 곳을 단죄한다(3,1-4).

대신과 판관들은 백성들을 착취하고,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으로 사람들을 속이며,

사제들은 종교 혼합주의로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짓밟는다.

 

이런 예루살렘의 불의와는 달리, 하느님께서는 날마다 올바른 판결을 내리시는 공정한 분이시다(3,5).

그분은 당신의 도읍인 예루살렘만은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받들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들은 그분의 기대를 저버리고 빗나갔다(3,7).

그래서 그분은 뭇 민족과 더불어 당신의 백성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셨다(3,8-9).

 

그러나 주님의 뜻을 받드는 적은 수의 겸손한 이들을 살아남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서 당신의 백성을 새롭게 일으키리라고 하신다.

이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다.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3,12-13)

 

주님께서 친히 보살피시고 다스리시는 이 남은 자들을 통하여 주님의 도성 시온은 회복되고,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은 온 세상 민족들의 칭송을 받으며,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다(3,16-20).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4)

 

 여기서 제시되는 '시온의 딸' '이스라엘' '예루살렘 딸' 모두 동격이다.

 

'환성을 올려라' '크게 소리쳐라'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점층적 표현을 사용하여 그 기쁨을 매우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환성을 올려라' 해당하는 '란니'(ranni)의 기본형 '라난'(rannan)

'소리내어 노래하다'는 의미를 가지며, 기쁨에 겨워 크게 소리내어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크게 소리쳐라' 해당하는 '하리우'(hariu)의 기본형 '루아으'(ruah)

'부르짖다', '외치다','즐거이 부르다'등으로 번역되는데,

여기서는 부르짖듯 큰소리로 즐거이 노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란 표현에서 사용된 '즐거워하여라'에 해당하는

 '웨알레지'(wealezi)의 원형 '알라즈'(allaz) '기뻐 날뛰다','몹시 기뻐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전쟁의 승리와 같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인하여

잔치를 열거나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기뻐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sing', 'shout out', 'Be glad and rejoice' 라는

점층적 표현을 쓸 수 있겠다.

본절에 사용된 이러한 점층적 표현은 하느님께서 가져다주실

선민의 복락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선민의 이러한 기쁨에 대한 세 단문처럼,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세 단문이

3장 17절 하반부에 점층적 표현으로 교차 대구를 이루며 나온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 하시리라." (17)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려 기뻐하시리라' 사실상 같은 개념으로

삼중적으로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전에 하느님의 분노가 진노의 대상이었던 선민들이 완전히 용서받고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원문은 '그가 베푸는 그 사랑 안에서 스스로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며,

조용히 그 사랑을 향유하실 것이다.' 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드러낸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애틋함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시면, 그 사랑에 스스로 빠져서,

만족과 기쁨으로 잠잠히 안식하실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이보다 더욱 절실하게 나타내는 표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전능하신 용사의 강한 이미지(17절 전반부)가, 그가 구원을 베푸신 그 자녀를 향한

어버이의 사랑으로 놀랍게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17절 후반부).

 

이러한 선민에 대한 하느님의 그쁨을 묘사하는 표현은,

결국 하느님의 선민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장차 선민들이 하느님께로부터 흠없이 거룩하게 성화될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로 하면 이런 의미일 것이다.

"He will take great delight in you, he will rest(quiet) you with his love,

 he will rejoice over you with singing."

 

그리고 3장 16절 상반부에 선민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의 날,

결정적인 '그 날' 반드시 도래할 것임을 강조하면서,

그 날을 바라보고, 주어진 현실 가운데에서 좌절하지 말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굳게 설 것을 권면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선민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란 표현은 주님의 사죄의 은총 나타낸다.

여기서 '거두시고'로 번역된 '헤씨르'(hesir)'제하다','제거하다'란 뜻의

동사 '쑤르'(sur)의 사역형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어서 행하신 하느님의 주권적 역사를

'쑤르'란 동사를 사용하여 다시 한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11절) 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두렵게 하는 형벌을 제거하기까지 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제거하신다.

이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만이 진정하고도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수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외부적 위협마저 철저히 제거하신다.

즉 이스라엘의 원수를 쫓아내시는 것이다.

 

여기서 '판결'(형벌)은 주님께서 판결하여 내리시기로 결정하신 심판을 의미하며,

'원수'란 심판의 형벌을 수행하기 위해 주님께서 모으셨던,

이방의 여러나라와 민족들(8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심판을 끝마치시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은 이 남은 자들에게 위해를 가할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쫓아내신 것이다.

 

 

'힘 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6)

 

'두려워하지 마라' 직설적인 표현에 이어,'네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간접적인 표현이 사용된다.

'손을 늘어뜨린다' 하는 것은 절망이나 낙심의 상태를 묘사하는

히브리적 관용구이다(2사무4,1; 이사13,7; 예레6,24).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그들의 왕으로 계시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할 것도

그리고 낙심하거나 좌절할 일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즉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그들의 왕으로 그들 앞에서 싸우실 것이기 때문에,

결코 어떤 대적과 어떤 전쟁에서도 그들은 패하지 않으며, 어떤 원수도 그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못하니,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17)

 

 '승리의 용사' 해당하는 '낍보르'(gibor)는 전투의 문맥에서는

'용사','전사' 언급하고 있다(여호1,14; 6,2; 판관5,13; 2사무1,19 등).

그러나 이 단어가 하느님께 적용될 경우에는 단순히 '용사'를 언급하는데 그치지 않고,

모든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시는 '전능하신 용사'라는 개념을 내포하게 된다.

 

즉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전능하신 용사이심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이사10,21).

그는 이러한 능력으로 그의 백성들을 모든 전투에서 구원하시며 승리로 이끄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궁극적으로 안전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축제의 날인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18)

 

새 성경의 번역이 좀 잘못된 것 같다.

여기서 선민은 '축제(절기)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들' 묘사된다.

이것은, 이방인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신분의 제약으로 '축제'(절기)때마다

'축제'(절기)를 지켜야하는 장소였던 예루살렘에, 사실상 참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것임 전제한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그들은 '축제'(절기)로 인하여 항상 근심하는 처지에 놓일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불행'이요,'모욕'으로 표현), 본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의 구원이 선포되고 성취되는 그 날에,

그들은 그들의 거룩한 산 시온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마음껏 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쁨으로 축제(절기)를 지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느님의 회복의 역사로 인해,

 그들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모욕(치욕)의 짐은 벗어지게 될 것이다.


  5월 31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1,39-56)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1~53)

 

루카 복음 1장 51절에서 53절까지는 하느님의 공평하신 속성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

 

루카 복음 1장 51절'팔'로 번역된 '브라키오니'(brachioni; arm)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드'(yad)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구약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신명26,8; 시편29,14).

 

이 단어가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 strength; mighty deeds)

함께 사용되어 하느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만한 자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누스'(hyperephanus; the proud)

'~위에', '~을 넘어서', '~이상의'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hyper)

'나타나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다'등의 의미를 가진 '파이노'(phaino)

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들',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루카 복음 1장 50절의 '경외하는 이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미치지만,

반면에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흩어지는'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루카 복음 1장 51절'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2,10)는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키는데, 여기서 마리아는 교만한 자들을 치시는 하느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비천한 종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높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1장 52절'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2,8)

라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떠올리게 하는 부분으로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통치자들' '비천한 이들','끌어내리시고''들어 높이셨으며'라는 단어들이다.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느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다루고 있는 루카 복음 1장 52절

단어들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먼저 '통치자들'로 번역된 '뒤나스타스'(dynastas; the mighty; rulers)

'주권자','통치자' 등을 의미하는 '뒤나스테스'(dynastes)의 복수이므로,

'권세있는 자들', '통치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왕좌'로 번역된 '트로논'(thronon; thier thrones)

그 통치자들이 앉는 '권좌들', '보좌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끌어내리신다'는 것은 비록 세상 가운데서

권세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을

얼마든지 그 권좌에서 내리칠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비천한 이들'로 번역된 '타페이누스'(tapeinus; the humble)

'낮은 지위의', '천한', '겸손한'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타페이노스'(tapeinos)의

복수형이므로, '비천한 이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 단어는 앞의 '통치자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직접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겸손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높이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

그 모든 것들이 느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대전에 우리가 먼저 겸손한 모습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카 복음 1장 53절에서도 52절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이들''부유한 자들',

'좋은 것''빈손', '배불리시고''내치셨습니다'라는 단어들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굶주린 이들' '부유한 자들'은 복수형으로 일차적으로 경제적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보면 부자들은

그들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가난하게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

등과 같은 산상설교의 표현처럼, 자신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자들 교만하여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아가톤'(agathon)'선한', '적합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형용사로서,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

바로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로 번역된 '에네플레센'(eneplesen; He has filled)

'채우다', '만족하다'는 의미를 가진 '엠피플레미'(empiplemi)가 원형인데,

이 단어는 단순한 만족이 아니라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 가득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주리는 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로서 부족함이 없이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빈손으로'라고 번역된 '케누스'(kenus; empty away)'빈', '헛된',

 '내용이 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로서, '좋은 것으로'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는 '케누스'(kenus)부족할 것이 없는 부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엄중함을 부각시켜 주며, 두 단어의 대구를 통해 심판을 행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교만한 자라면 얼마든지 '텅 빈' 가난뱅이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와 대조를 이루는 '내치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엑사페르테일렌'(eksapesteilen;

he has sent)'밖으로'란 뜻의 '에크'(ek)'내보내다'란 의미를 가진 '아포스텔로'(apostello)

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밖으로 멀리 내보내어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부자라고 하는 자들을 빈 손으로 멀리 내보내시어 가까이하지 않는,

공의로우신 하느님을 드러낸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송영진 모세 신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난 일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축일입니다.
“두 어머니가 만난 일이 뭐가 중요해서 축일로 정해서 경축하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만남’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엘리사벳의 증언’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이 말은, 마리아가 잉태한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는 말이고,
메시아의 구원이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주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엘리사벳은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첫 번째 인물입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신앙고백이고, 증언입니다.
또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행복을 찬양한 것은,
사실은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메시아를 보내 주셔서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한 것.)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은,
즉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마리아 외에는 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루카 1,41)
그것을 온 세상에 증언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날 때, 곁에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즈카르야는 있었을 것입니다.
두 어머니가 사람들 모르게 은밀하게 만난 것이 아니라면,
주변에 가족들과 친척들과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숨어 지낸 기간은 다섯 달입니다(루카 1,24).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임신을 알게 된 것은 그 한 달 뒤입니다(루카 1,36).
그러니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났을 때에는
이미 이웃과 친척들이 모두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축하하기 위해서 몰려들었을 것입니다(루카 1,58).
또 마리아가 엘리사벳과 함께 지낸 기간은 석 달입니다(루카 1,56).
그 석 달 동안 엘리사벳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요한 1,29-36).
엘리사벳의 증언은 나중에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을 미리 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어머니의 증언을 물려받아서
다시 증언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직접 요한에게 계시를 내려 주셨지만...(요한 1,33)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말했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말했다는 뜻인데,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로봇처럼 말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마리아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달았고,
그것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증언하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또, “엘리사벳의 증언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증언은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신앙고백이고,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엘리사벳의 증언 다음에 ‘마리아의 노래’가 나오는데,
‘마리아의 노래’는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과 엘리사벳의 증언을 합해서
마리아 자신의 입장에서 표현한 신앙고백이고, 찬미가입니다.
내용을 보면, 하느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찬양과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과거형으로 표현되었지만, 그래도 예언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이 부분만 보면, 마치 사회 혁명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혁명이 아니라 메시아 나라의 행복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만의 행복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복입니다.
(메시아 나라는 모두가 똑같이 행복해지는 나라입니다.)


메시아 나라는 통치자들과 부유한 자들이 불행하게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도 스스로 회개하고, 자기가 가진 것들을 내려놓으면,
메시아께서 주시는 참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권력가도 없고 부유한 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움켜쥐고 있겠다고 고집부리면,
즉 메시아께서 주시는 참 행복을 거부한다면,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주시는 것을 받지 않아서 못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부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에 세속적인 출세와 성공을 행복이라고 착각하고서
그런 것만 예수님께 청한다면, 그것은 청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천함’과 ‘굶주림’이 좋은 것도 아니고, 선(善)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악(惡)입니다.
우리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비천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이 바로 ‘이웃 사랑’이고,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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