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루카 15,3-7)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부터 시작하여 점차 퍼지면서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양 떼를 구해 내시어 이스라엘로 데려와 몸소 먹이실 것이라고 전한다.(에제키엘 34,11-16)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12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13 그들을 민족들에게서 데려 내오고 여러 나라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의 산과 시냇가에서, 그리고 그 땅의 모든 거주지에서 그들을 먹이겠다.
14 좋은 풀밭에서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은 그곳 좋은 목장에서 누워 쉬고, 이스라엘 산악 지방의 기름진 풀밭에서 뜯어 먹을 것이다.
15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6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로마 5,5ㄴ-11)
형제 여러분, 5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사람처럼,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한다고 가르치신다.(루카 15,3-7)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3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예수 성심 대축일 제1독서 (에제34,11-16)
"좋은 풀밭에서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은 그곳 좋은 목장에서 누워 쉬고, 이스라엘 산악 지방의 기름진 풀밭에서 뜯어 먹을 것이다. (14)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였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5)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붇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16)
에제키엘서 34장 14절은 하느님께서 유다 백성을 회복시키는 일의 결과로, 유다 백성이 이전의 고통과 아픔을 잊고 풍요로움과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교차 대구 구조를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14절에서 '좋은' 풀밭과 '기름진' 풀밭이 동격으로 사용되었다. '좋은'에 해당하는 '토브'(tob)는 몇 가지 예를 들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있던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나무 열매(창세2,9)를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었고, 이집트에 있던 칠 년 풍년 기간에 거둔 풍성한 수확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었다(창세41,9). 그리고 '기름진'에 해당하는 '샤멘'(shamen) 역시 14절처럼 식물을 수식하는 경우 풍성한 소출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 선민 유다 백성을 회복시키길 것이라는 말씀에서 이같이 먹을 것의 풍성함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에제키엘서 34장의 유다 백성을 양에 비유하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그들을 먹이시는 목자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는 유다 백성이 하느님의 징계로 인한 바빌론과의 전쟁을 겪고 선민 국가가 되는 과정에서, 칼에 죽은 사람이 굶주려 죽는 사람보다 복되다고 할 정도로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서 자녀를 잡아 먹는 참혹한 상황을 겪었던 뼈 속 깊이 박힌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예레4,8-10; 5,9.10)
한편, 14절에서 양이 유다 백성이 회복되어 거처할 장소가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있는 목장으로 묘사되었다. '높은 산'이라는 표현은 적들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장소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높은 산'은 13절에 설명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장소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유다 백성에게 주어진 '높은 산'이 '좋은 목장'이 되는 것은 지형적인 안정성 때문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전능하신 힘과 능력으로 다스리시는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그곳에서 이스라엘 족속이 우상을 섬겼지만(에제20,28), 하느님께서 그들을 바빌론을 도구로 사용해서 심판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신 이후에는 하느님을 예배하는 자들로 변화되어 그곳에서 하느님을 섬겼다(에제20,40).
본절에 기록된 '높은 산' 역시 지형적으로 안전한 산일 뿐 아니라 15절에 기록된 것처럼 우상이 사라지고 하느님께서 목자로 계시는 영적으로 안전한 산이므로 유다 백성은 더 이상 이방 민족으로 인해 수치와 멸망을 당하지 않으며, 영원히 안전하게 거처하게 될 것이다.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16)
앞에서 에제키엘서 34장 13절과 14절에서는 착한 목자이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양 떼인 선민 유다 백성을 바빌론에서 구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어 기르시고 돌보실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34장 16절에서는 유다 백성의 개별성을 강조하면서 하느님께서 잃어버린 양, 흩어진 양, 부러진 양, 아픈 양을 먹이시고 돌보실 것이지만, 기름진 양과 힘센 양은 없앨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상 본절의 내용은 악한 목자들이 자행한 탐욕과 방임을 지적한 에제키엘서 34장 4절의 내용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에제키엘서 34장 16절에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돌보심의 대상이 될 유다 백성을 비유하는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양에 대한 묘사는 본문에 기록되지 않은 '약한 양'에 해당하는 '한나홀로트'(hannaholloth)를 제외하고는 에제키엘서 34장 4절에 묘사된 순서와 역순으로 기록되었을 뿐, 에제키엘서 34장 16절 상반절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처럼 이미 앞에서 언급된 아프고 부러진 양들에 대한 치유와 회복에 대한 약속을 본문에서 다시 반복하는 이유는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백성들로부터 착취한 부로 자신의 배를 불린 자들에 대한 심판과 대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들은 거짓 목자인 유다 임금들의 권력에 의지하여 백성들을 착취하는 일에 앞장서서 사리사욕을 챙겼던 대지주나 거상들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시는 방법을 기술한 '내가 없애 버리겠다'에 해당하는 '아쉬미드'(ashimid; I will destroy)의 원형 '샤마드'(shamad)는 거의 모든 용례에서 자연적 멸망이 아닌 하느님의 심판에 의한 멸망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신명4,26; 28,26; 예레48,40).
결론적으로 거짓 목자들을 파멸시키시고, 자신의 양을 직접 돌보실 착한 목자로서 소개되는 하느님을 묘사하는 에제키엘서 34장 11-16절 단락에서, 15절까지는 자신의 양을 돌보시는 착한 목자로서의 이미지만 강조하다가 16절에서 처음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던 자들에 대한 심판자로 드러난다.
특히 16절 마지막에 나오는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는 표현은 심판자로서의 하느님을 더욱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에제키엘서를 읽는 바빌론에 머무는 유다 포로 공동체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괴롭히는 자들에게 심판을 단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고,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자각을 갖게 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송영진 모세 신부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이 말씀에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라는 말은,
“이미 회개해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자기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칭 의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회개한 의인’으로
해석한다면, 이 말씀의 뜻은, “하늘에서는 의인들 때문에 기뻐하지만, 회개하는 죄인 때문에 더 기뻐한다.”입니다.
‘자칭
의인’으로 해석한다면, 이 말씀의 뜻은, “하늘에서는 자칭 의인들(회개하지 않는 죄인들) 때문에 슬퍼하지만, 회개하는 죄인 때문에
기뻐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들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도 ‘사랑’이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 때문에 슬퍼하시는 것도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기뻐하시기도
하고, 슬퍼하시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무슨 이익이 생겨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8-9).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라는 말씀 그대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분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바로 그 사랑을 경축하는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그 덕분에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음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셨고(요한 11,35),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루카 19,41).
라자로가 죽었을 때 흘리신 눈물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해석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흘리신 눈물은, 회개하지 않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해석됩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눈물은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잘 나타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잘 깨닫고 체험한 사람은 바오로 사도일 것입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1코린
15,9-10).”
이 말에서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말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바꿔도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 박해자인
사울을 사도 바오로로 만드신 일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라는 당신의 계명을 직접 실천하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
자신도 그것을 잘 깨닫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찬가’에서, “사랑은...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1코린
13,5).”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박해하는 사울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계셨다면,그래서 결국 ‘앙갚음’하셨다면, 우리 교회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에
그 당시에 박해자 사울이 천벌을 받고 죽었다면, 즉 예수님께서 보복을 하셨다면,
박해를 받고 있었던 사도들과 신자들 입장에서는 속이
후련했겠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복음 선포 활동을 못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교회가 망하는 지름길이 되었을 것입니다.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오로로
변화된 일은, 양들을 잡아먹던 이리가 양으로 변화된 일이기도 하고, ‘잃은 양’이 ‘되찾은 양’으로 변화된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표현하면, 그 일은 예수님께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신 일이기도 하고,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사랑을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박해자는 원수이기도 하고, ‘잃은 양’이기도 합니다. 원수라고만 생각하면 사랑하기가
어렵겠지만, ‘잃은 양’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사랑해야 하는 형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생각하면, 모든 사랑은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원수에 대한 사랑은 사실은 같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다는 중요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랑해야 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특히 명심해야 할 계명입니다.)
이 말씀에서 “서로
사랑하여라.”는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가 결코 아니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입니다.
(신앙인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모든 사람이 신앙인들의 사랑 실천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신앙을 증명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교회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는가 반영억라파엘 신부
저는 사제수품을 앞두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 라는 성경구절을 사제생활의 모토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많은 경우 그분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느끼고 행동하지 못하였습니다. 말씀만 거창하게 선택하고는 실천 없는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사제성화의 날을 맞이하여 기도하며 갈망했던 순수하고 귀한 열정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기를 다시금 청해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한결같이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찾아나서는 사랑입니다. 스스로 등지고 떠나서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그 사랑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도 소중하지만 한 마리 잃은 양이 결코 그 비중이 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둔 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야 하는 주님이십니다.
물론 아흔 아홉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가셨겠지요. 세상은 계산이 밝아서 아흔 아홉에 마음이 가있겠지만 예수님은 잃은 한 마리의 양의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사람은 질보다 양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양보다 질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잃은 양을 찾고야 맙니다. 그리고 기뻐하십니다.
다시 돌아올 희망이 없이 절망에 빠져 기진맥진 한 양을 찾아나서는 큰 사랑이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15,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잃은 양을 찾은 기쁨과 같습니다. 죄인이었다가 회개하는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선한 많은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 편히 계시지 않으시고 한 사람의 죄인을 찾아 나서는 분이십니다. 어떤 죄인도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비록 나쁜 길에 들어섰을지라도 그를 두고 슬퍼하시며 안쓰러워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주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잃은 양은 바로 사랑을 잊고 사는 나, 주님을 잊고 사는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나를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과의 만남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아직도 그분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분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나를 찾고 계십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