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간 토요일] 권한 (마르 11,27-33)
유다서 저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며 자비를 베풀라고 권고한다. (유다서 17.20ㄴ-25)
17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20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21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22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23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
24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당신의 영광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기쁘게 나서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 25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 하느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위엄과 권능과 권세가 창조 이전부터, 그리고 이제와 앞으로 영원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
시편 63(62),2.3-4.5-6(◎ 2ㄷ 참조)
◎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
○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고, 성소에서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당신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
○ 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높이 올리오리다. 제 영혼이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러, 제 입술이 환호하며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되물으신다. (마르코 11,27-33)
그 무렵 예수님과 제자들은 27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28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31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32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33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제1독서 (유다17,20ㄴ-25)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20)
이미 17-19절에서 이단자들의 출현에 대한 사도들의 예언을 상기시키고 그들의 정체를 밝힌 유다는, 이어지는 20-21절에서 신도들에게 이단들의 미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거룩한 순결과 정통 신앙을 가질 것을 권면한다.
베드로 후서나 유다서에서 공통적으로 경계하는 이단은 전(前) 영지주의자들(pro-Gnostics)이었다.
복음이 어느 정도 널리 확산된 1세기 후반에 등장하기 시작한 전영지주의자들은 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신도들의 신앙을 훼손했다.
먼저 교리적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극단적 금욕주의를 주장하든지, 아니면 그와 정반대로 극단적 방종과 쾌락주의를 조장하였다. 유다서를 비롯해서 베드로 후서와 요한의 서신들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이단자들은 윤리적인 면에서는 후자 쪽이었다.
유다서 1장 4절에서도 나오지만, 이들은 도덕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방탕한 생활의 방편으로 악용하고, 교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 맞서서, 20절에서 자신을 성장시키는데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갈 것을 권면한다.
여기서 '지극히 거룩한 믿음' 이란, 하느님께 속한 거룩한 것으로(1베드1,15.16) 하느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다.(에페2,8)
이 믿음은 특히 교회의 전통에 의해 주어진 신앙 내용인 진리나 가르침(교리)이라고 할 수 있는데(사도2,32;20,32), 전승된 신앙의 토대 위에 각자 자신의 신앙적 삶을 형성시킬 뿐만 아니라, 신앙적 공동체를 구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믿음은 이단자들과 신도를 명확히 구분시켜주는 표지이다.
한편, '성장해 나가십시오' 로 번역된 '에포이코도문테스'(epoikodomuntes)의 원형 '에포이코도메오'(epoikodomeo)는 '~위에' 란 뜻의 전치사 '에피'(epi)와 '건축하다'(로마15,20), '세우다'(마태16,18)라는 뜻이 있는 동사 '오이코도메오'(oikodomeo)의 합성어로서, '~위에 세우다', '쌓아 올리다'(사도20,32; 1코린3,10; 에페2,20; 콜로2,7)라는 뜻이 있다. 본문에서는 명령 현재 분사 능동태로 쓰였다.
따라서, 본문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기초로 하여서 거기에 의지하고 신앙의 진보를 이룩하며,지어져가는 건축물처럼, 계속하여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라는 말이다. 이단자들을 대적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토대는 바로 거룩한 믿음위에 굳게 서는 것이다.
'성령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유다는 둘째로 기도하되, 성령안에서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유다가 이단자들을 향해 단정지은 '성령을 지니지 못한 자들'(19절)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루는 표현으로, 유다는 신도들에게 기도하되, 그들과 친교(통교)하고 있는 성령 안에서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진정한 기도는 타종교에서 행하는 것 같은 깊은 명상에 잠기거나 경문을 외우거나 통성으로 크게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성령안에서 하느님과 통교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즉 진정한 기도란, 자신의 의지의 발로라기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요한4,23-24 ; 로마8,15.26.27 ; 갈라4,6 ; 에페6,18)
이 시대는 바야흐로 '종교적 관용의 시대'(The Age of Religious Tolerance)로 특정지어지고, 다양한 종교적 주장과 교리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다. 그러나 관용의 정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유다서는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이단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관용과 포용이 아니라 '영적 싸움'으로써 대응해야 함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연중 제8주간 토요일 복음 (마르11,27-33)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30)
여기서 '아니면', '혹은'이라는 뜻을 가진 접속사 '에'(e; or)는 상호간에 서로 배타적인 사물이나 사상을 구별할 때 사용되는 접속사이므로, 마르코 복음 11장 30절의 '하늘에서'와 '사람에게서'는 단순히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배타적인 관계로서 세례자 요한의 진정성을 몯는 말씀이다.
따라서 '하늘에서'라면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참예언자로 취급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요, '사람에게서'라면 그를 거짓 예언자로 취급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원문의 구조를 보면, '하늘에서'에 해당하는 '엑스 우라누'(eks ouranou;from heaven)라는 부사구가 본동사인 '온 것이냐'의 의미로 번역된 '엔'(en; was it)보다 먼저 나오고 있으며, 맨 나중에 '사람에게서'에 해당하는 '엑스 안트로폰'(eks anthropon; from men)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문장 구조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음을 간접적으로 증거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이 증거한 당신의 권세 역시 '하늘에서' 왔음을 시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7-28)”
여기서 ‘이런 일’이라는
말은,
좁은 뜻으로는 바로 앞에 있는 ‘성전 정화’를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
즉 복음 선포와
설교와 기적 등을 가리킵니다.
지금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한이 있는지’,
또 ‘권한이 있다면 그 권한을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묻는 것은, 알고 싶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권한도 없으면서 왜 당신 마음대로 이런 일을 하는가?”
라고 비난하는 것이고, 꾸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반문으로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답변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방식을 사용하신 것이기도
하고,
반문을 통해서 당신의 권한을 암시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마르 11,29-30).”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즉 당신의 권한이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했기 때문입니다(마르 1,7-8; 요한 1,26-36).
따라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예수님의 권한이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인정한다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대답을 못합니다.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11,31-33).”
그들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사람에게서 왔다.”입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자들이고,
그래서 요한의 세례를 안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왔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이 돌을 던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군중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의 말을 보면,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왔다고 확신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왔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약간의 가능성도
무시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도 그들의 큰 죄입니다.
그들은 왜 세례자 요한을 안
믿었을까?
회개하기가 싫었기 때문이거나 자기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하늘나라보다는 지상의
부귀영화를 더 추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포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였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 사람들,
그래서 회개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이유도 같다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지상에서의 부귀영화에 대해서만 관심 갖고
그것만 추구한 사람들과
회개하기를 싫어했거나 자기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고,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비슷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느님 나라를 원하고 추구하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갈릴래아 지역의 나자렛 출신이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었다는 내용들이 있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출신지와 직업을 문제 삼은 것은 핑계로 생각됩니다.
회개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감추려는 핑계.)
그런 점을 생각하면,
‘모르겠다.’는 말은 ‘관심 없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참예언자든지 아니든지 간에 관심이 없고,
예수님의 권한이
하늘에서 왔든지 사람에게서 왔든지 간에 관심이 없고...
진짜 관심사는 당장 잘 먹고 잘 사는 것뿐.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속물’이라고 부릅니다.
세례자 요한 같은 예언자가 와서 회개를 선포하는 것도,
또 메시아께서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도 다
귀찮다고 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 11,33).”
모르겠다는 그들의 대답은 사실상
대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대답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라는 말씀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너희는 복음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요한 1,1) “말하지 않겠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선언’이
되기도 합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하였습니다. 유다교 신앙의 진정성을 유지해야 할 그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위를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고 시비와 꼬투리를 잡으려는 데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권위가 어디서 오는지 되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가르침이 당대에 가장 중대한 현안으로 부각되었기에 그들은 어떤 입장을 표명하여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회개하라.’는 말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여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회주의자인 유다 지도자들이 그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지 모른다고 회피하자,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2,16)라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시편 69,10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에 대한 열정’으로 성전 정화를 하시면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권위를 보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말이나 행실 등 모든 면에서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함을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1티모 4,12 참조). 공동체의 책임자는 구성원들을 이해하며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독서의 권고 말씀처럼,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며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