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수요일]올바른 자선 (마태 6,1-6.16-18)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들어 올리시고,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영의 두 몫을 청해 받는다. (열왕하 2,1.6-14)
1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들어 올리실 때였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길갈을 떠나 걷다가 예리코에 도착하자, 6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너는 여기 남아 있어라. 주님께서 나를 요르단 강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스승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함께 떠났다. 7 예언자들의 무리 가운데 쉰 명이 그들을 따라갔다. 두 사람이 요르단 강 가에 멈추어 서자, 그들도 멀찍이 떨어져 멈추어 섰다.
8 엘리야가 겉옷을 들어 말아 가지고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은 마른땅을 밟고 강을 건넜다.
9 강을 건넌 다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너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을 청하여라.” 그러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 10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어려운 청을 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11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
12 엘리사는 그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자기 옷을 움켜쥐고 두 조각으로 찢었다.
13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집어 들고 되돌아와 요르단 강 가에 섰다. 14 그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잡고 강물을 치면서, “주 엘리야의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고 말하였다. 엘리사가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이렇게 엘리사가 강을 건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자선이나 기도나 단식을 하지 말라고 하시며,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6,1-6.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제1독서 (2열왕2,1.6-14)
엘리야가 겉옷을 들어 말아 가지고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은 마른땅을 밟고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넌 다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너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을 청하여라." 그러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어려운 청을 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 두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8~11)
'엘리야가 겉옷을 들어 말아 가지고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엘리야가 겉옷을 말아서 요르단강을 내리치자 요르단강이 갈라지는 이적이 일어났다. 여기서 '겉옷'으로 번역된 '앗다르토'(adartho)의 원형 '앗데레트'(adereth)는 길고 헐렁한 소매없는 외투 또는 어깨를 감싸는 망토(mantle,cloak)를 가리킨다.
이 명사는 '장엄하다' 혹은 '영광스럽다'라는 뜻의 동사 '아다르'(adar)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화려함' 내지는 '영광'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러한 자구적 의미는 모세의 지팡이가 그의 권위와 위엄의 상징물이었던 것처럼, 엘리야의 '겉옷' 또한 예언자 직분의 위엄과 영광을 상징함을 보여준다(1,7.8).
따라서 예언자가 겉옷을 던진다는 것은 예언자직을 위임한다는 의미가 되며(1열왕19,19), 이후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생도들 앞에서 보인 것은 자신이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었음을 명백히 하는 상징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12~14절).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은 마른땅을 밟고 강을 건넜다'
일정한 장소나 유사한 사건과 관련된 이적이 성경속에서 다른 위대한 인물이나 사건들과 연관되어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요르단강 도하(건넘)의 이적 역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강을 건넌 사건(여호3,13)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탈출14,16.21)등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취한 것과 함께 본문의 이적 사건을 함께 동일하게 수행한 것(12~14절)은 이것을 지켜보는 생도들에게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엘리사의 정통성을 완전히 입증해 주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마른땅'으로 번역된 '하라바'(haraba)는 '건조하다','황량하다'라는 뜻의 동사 '하레브'(hareb)에서 유래된 명사로서 '육지'(마른땅; dry ground)를 의미하며 성경에 9번 정도 등장한다. 이 단어는 단순히 '육지'를 가리킬 때도 있지만, 사막 혹은 광야처럼 건조한 땅을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 여기서도 요르단강을 갈라 물기가 없는 땅을 건넌 사실을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해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
무엇이든지 청하라는 엘리야의 말에 엘리사가 제시한 요청이다. 이 문장은 '제발' 혹은 '원컨대'를 뜻하는 부사 '나'(na)가 '이다' 또는 '있다'를 뜻하는 동사 '하야'(haya)와 함께 사용되어 간절한 기원문의 형태로 되어있다.
한편, '영'으로 번역된 '루아흐'(ruah)는 '바람' 내지 '영'(靈)을 뜻하는 단어인데, 본문에서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영적 능력'이란 의미로 쓰였다. 또한 '두'(갑절)로 번역된 '쉐나임'(shenaim)은 '반복하다'라는 뜻의 동사 '샤나'(shana)에서 유래된 명사로서 '둘'로 해석되며, 원래 '입'을 뜻하지만 추상적 의미로 '부분'(portion)을 뜻하는 명사 '페'(phe)의 연계형 '피'(phi)와 결합되어 '두 몫'(a double portion)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 두 몫의 비교 대상에 대해 종전까지는 엘리사의 받을 능력이 엘리야가 받았던 영적 능력의 두 배를 의미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지만, 최근에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예언자 지망생(생도)들 중에서 맏아들이 가지게 되는 분깃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즉 이것은 한 집안에서 맏아들이 다른 형제들의 받는 몫의 두 배의 유산을 차지하며 그 가문을 잇는 권리를 가지는(신명21,17) 히브리 전통과 관련된 표현으로서, 자신을 엘리야의 영적 장자와 같이 취급하여 그의 예언자직을 계승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열왕기 하권 2장 12절에서 엘리사가 사라진 엘리야를 '아버지'로 호칭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엘리사의 요구는 엘리야보다 더 많은 능력을 행하고 싶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스승이 가진 능력을 자신도 가지며, 스승이 걸어간 예언자의 길을 자신도 그대로 걸어가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엘리사에게 임한 능력은 갑절이 아니라 단순히 엘리야의 영감 그 자체였다(15절)는 예언자 지망생들의 증언도 이러한 해석이 타당함을 보여준다.
'네가 어려운 청을 하는구나'
본문에 사용된 동사 '히크쉿타'(hiqshsitha)는 '어렵다' 혹은 '곤란하다' 라는 뜻의 동사 '카샤'(qasha)의 사역형으로서, '네가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구나' 라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엘리사는 엘리야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예언'(prophecy)을 하고 이적을 일으키는 영적 능력을 가지며,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였으므로, 어떠한 인간도 그것을 부여할 권한을 가질 수 없다는 의미가 이러한 엘리야의 고백 배후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즉 영적 능력을 주고 예언직을 계승케 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 재산을 떼어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어서 오직 하느님만이 그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따라서 엘리야는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대로 되겠지만'
엘리야는 엘리사가 자신의 예언자직을 계승받을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 여기서 '데려가시는'에 해당하는 '룩카흐'(luqqah)는 '라카흐'(laqqah)의 강조 수동형이며, 문맥상 이 동작의 주체는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본문에서 엘리야의 말은 엘리사가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자 한다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목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의 일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여주셔야만 가능한 특별한 은혜에 해당한다.
이같은 내용들을 고려할 때, 본문의 엘리야의 말은 그가 영적 능력 부여를 통한 예언자직의 위임을 하느님께 완전히 맡기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자신의 승천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것이며, 그것은 하느님께서 엘리사에 대한 영적 능력 부여와 예언자직 계승을 인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일차적으로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여행 상황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두 인물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행하고 있으며, 행동과 말에 있어서 일치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후에 엘리사가 행동과 말에 있어서 엘리야의 능력을 그대로 전수받아 그와 같은 능력있는 종으로 사명을 감당할 것을 예시하는 효과를 지닌다.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 두사람을 갈라놓았다.'
'갑자기'에 해당하는 '웨힌네'(wehinneh)는 접속사 '와우'(wau)와 '보라!'를 뜻하는 '힌네'(hinneh)가 결합되어 '그런데 보라'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뒤이어 나올 충격적인 사건에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편, 본문에 나타난 '불'의 이미지는 엘리야가 예언자직을 감당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형태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나타난 바 있다. 그리고 각각의 현장에서 나타난 '불'은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먼저, 카르멜산에서의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 엘리야가 쌓은 제단 위에 내린 불은 엘리야가 전하는 말과 행하는 사명에 신적 인증을 확인시켜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1열왕18,24~38).
아울러 그를 잡으러 온 아하즈야의 군사들에게 내려진 불은 불의한 자들에게 엘리야가 하느님의 예언자임을 확인시켜주면서 동시에 그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보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2열왕1,9~16).
본문에 나오는 불병거와 불말의 경우는, 그동안 엘리야의 사명 가운데 '불'이 하느님의 임재와 보호, 신적 인증을 상징하고, 병거(수레)와 말이 당시 군대의 전쟁 수행 능력을 가늠하는 척도인 것 (탈출14,7; 판관4,3)을 감안할 때, 이것은 지금까지의 엘리야의 사명에 대한 최종적인 신적 인증임과 동시에 그를 도우시는 하느님의 도움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갈라놓았다' 에 해당하는 '와이야프리두'(waiyaphridu)의 원형 '파라드'(pharad)는 '나누다' 혹은 '분리하다' 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불병거와 불말이 엘리야와 엘리사를 분리시켰음을 나타낸다.
진작에 엘리야는 엘리사와 헤어질 것을 고집하여 이 시점까지 이른 것을 생각해보면, 인간의 만남과 이별도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명을 마친 엘리야를 하늘로 인도하시고 앞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할 엘리사를 지상에 남기시기 위해서 초자연적 능력으로 개입하셔서 부자지간처럼 가까웠던 이들을 완전히 격리시키신 것이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
'회오리 바람에 실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빠세아라'(basearah)이다. 그런데 나선형으로 공기가 선회하며 일어나는 바람인 '회오리 바람'을 묘사할 때는 일반적으로 '쑤파'(supha)라는 단어가 쓰인다.
본문에 등장하는 '싸아르'(saar)는 성경에 16번이나 나오는데, 기상학에서 쓰이는 용어로서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인 '돌풍'이나 몹시 센 바람인 '폭풍'을 나타낼 때 사용되며 대개 날씨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동반된다(이사29,6). 아마도 본문의 '싸아르'는 급작스럽게 불어닥친 강력한 돌풍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빠세아라'는 '~안에서'(in)란 뜻의 전치사 '뻬'(be)와 정관사 '하'(ha) 및 명사 '싸아르'가 결합된 형태이다. 따라서 이것은 '싸아르를 타고' 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싸아르 안에서'나 '싸아르 가운데' 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또한 원문에는 엘리야가 불병거와 불말을 타고 승천했는지 혹은 바람 그 자체를 타고 승천하였는지의 여부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싸아르'라는 단어가 하느님의 임재(theophany)에 뒤따르는 폭풍우를 가리킬 때 쓰인(욥기38,1) 사실을 통해 미루어보건대, 엘리야는 불병거나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바람을 타고 승천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말해서 본문을 통한 엘리야의 승천 방법 그 자체는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하느님의 임재 가운데서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났고, 그 가운데서 하느님께서 엘리야의 모습을 감추신 것으로 풀이된다.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6,1-6.16-18)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1)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2)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3)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5)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16)
너희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7)
마태오 복음 6장 1~18절까지는 당시 유대인들의 고질적인 병폐 중의 하나였던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경계의 말씀이 들어 있다.
B.C.586년 남부 유다 멸망 이후 포로 시대의 상황에서 유대인의 전통과 예식을 고수하려는 강한 민족주의적 배경 아래 생성 발전한 유다교는 구약 성경의 내용을 왜곡하여서 지나친 형식주의가 퍼져 나갔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적 행위 가운데는 위선적 요소가 많았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구약 율법을 빌미로 해서 저지르는 대표적인 위선을 거론하신다. 즉 종교적 위선에 대한 경고(마태6,1)에 이어, 특히 자선(마태6,2~4), 기도(마태6,5~15). 단식(마태6,16~18)에 있어서 근본 의미를 밝혀 주시며, 위선을 버릴 것을 촉구하신다.
'위선'이란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의(義)임이 지적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에 해당하는 '프로스 토 테아테나이 아우토이스'(pros to theathenai autois; to be seen by them)에서 '프로스'(pros; to)는 '~하기 위하여','~을 목적으로'라는 의미를 가지며, '보이다'에 해당하는 '테아테나이'(theathenai; be seen)도 목적을 나타내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수동태이다.
여기서 다른 목적이 아니라 순전히 사람에게 보이려는 목적만으로 의로운 일을 행하는 위선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 아주 잘 드러난다. 그리고 '조심하여라'에 해당하는 '프로세케테'(prosechete; take heed; be careful)는 '주의하다', '삼가다'의 뜻을 가진 '프로세코'(prosecho)의 현재 명령형이다.
이것은 마치 걸음걸이가 서툰 어린 아이의 뒤를 따라가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자상한 표현이다. 또한 '하지 않도록'에 해당하는 '메 포이에인'(me poiein; not to do)은 마태오 복음 6장 1절 이하의 내용이 실생활 가운데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는 행위에 관한 교훈이다.
마태오 복음 6장 2절부터 4절까지는 유다교에서 종교 규정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던 '자선'에 해당하는 '엘레에모쉬넨'(eleemosynen; thine alms)에 있어서의 위선에 대한 교훈이 나온다.
여기서 주어가 '너희'가 아니고 '너'라는 단수인데, 이것은 모든 사람 각자가 자선을 행할 때 이 규정이 엄격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또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에서 '때'로 번역된 '호탄'(hotan; when)은 '~할 때는 언제든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만약 자선을 한다면' 정도의 가정법적인 뜻이 아니라, 각 사람은 반드시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데, 자선을 베풀 때에는'이라는 필연적 의미를 지닌다.
마태오 복음 6장 2절의 '위선자'에 해당하는 '호이 휘포크리타이'(hoi hypokritai; the hypocrites)의 기본형 '휘포크리테스'(hypoktites)는 '가장하다', '꾸미다'는 뜻이 있는 '휘포크리노마이'(hypokrinomai)에서 유래하며, 원래는 '연극 배우'를 뜻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밖으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여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마태15,7; 마르7,6).
이런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목격할 수 있는 회당과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자선하고,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나팔을 불듯이 자랑까지 하여 그들의 행위가 실제로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과시에 목적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한편,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에 해당하는 '아페쿠신'(apechousin; they have)의 원형 '아페코'(apecho)는 희랍 고전 문헌에서 '어떤 것을 받고 영수증을 주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확실히 받았음을 나타내는 단어인데, 그러니까 여기서 등장하는 위선자는 자신에게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확실한 반대 급부가 없으면, 자선을 베풀지 않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자선을 베풀므로, 자선을 베풀 때 이것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됨으로써, 그들이 목적했던 것을 이룰 수 있기에 그들은 충분한 상을 이미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 6장 3절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에서 원문에는 '손'이라는 단어가 없고, '너의 왼쪽~너의 오른쪽'만 나온다.
새 성경 번역문과 달리 원문에 '손'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은 구체적인 형체보다 추상적인 개념을 보다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다. 말하자면, 행위로 이루어지는 자선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동정이나 또는 자선을 계획하는 것조차도 은밀히 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성경에서는 오른쪽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반면에 왼쪽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선한 의지로 자선을 베풀려고 할 때, 이것을 저해하는 악한 충동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악한 충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은밀하고 신속하게 자선을 베풀라는 심오한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기도할 때에'에 해당하는 표준 원문에는 '프로슈케스테'(proseuchesthe)라는 2인칭 복수형이 아니고, '프로슈케'(proseuche)라는 2인칭 단수형으로 나오므로 '또 네가 기도할 때에'로 번역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 개개인에 대해 교훈을 주시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기도하다'에 해당하는 '프로슈코마이'(proseuchomai)는 '~을 향하여'라는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프로스'(pros)와 '원하다', '고대하다'는 뜻이 있는 '유코마이'(euchomai)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전치사 '프로스'(pros)는 단 하나의 방향을 나타내는 단어이기에, 기도는 오로지 하느님께 응답받는,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져야 하며, 타인에게 과시하거나 칭찬을 받기 위한 다른 목적이 포함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시 유다인들은 유다인 시간으로 3시(오전9시), 6시(정오), 9시(오후3시)가 공식적인 기도 시간이었고, 위선자들은 이 시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기도를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거나 앉아서도 할 수 있지만, 굳이 서서 기도하는 것은 자신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신앙심을 과시했던 것이다.
마태오 복음 6장 6절의 '골방'에 해당하는 '타메이온'(tameion; closet)는 '창고', '내실', '침실'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가장 일차적인 뜻은 식료품 등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루카12,24)이다.
당시 피지배 국민으로서 가난과 빈곤에 시달리던 유다인들은 가족들을 위해 아무도 모르는 '창고'에 식량을 숨겨 두었고, 식량을 가지러 들어갈 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이렇게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식량 창고'는 생명과도 같은 가장 중요한 비밀 장소로 여겨졌다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
6,1).”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이 말씀들을 간단하게
줄이면, “너희는 위선자가 되지 마라.”입니다.
‘위선’은 하느님과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선을 행하는 척’을 하는 일입니다.
겉과
속이 달라서, 선처럼 보이지만 선이 아닌 것, 사이비 선이고, 가짜 선입니다.
그래서 ‘위선’ 자체가 죄가 됩니다.
그런데 선과 위선을
구별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는 것도 어렵고,
심지어 자기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선을 베풀 때, 베풀고
나서 칭찬을 받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자선을 베푸는 위선은 어떻게 구분해야 하나?
처음부터 칭찬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었는데,
칭찬을 받으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그 다음부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의식하게 된다면,
그것은 위선인가,
아닌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 일이 아니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위선인가,
아닌가?
또 위선자들도 실제로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고,
그 성금으로 누군가가 실질적인 도움을 받게 된다는 점이
선과 위선을 구분하기 어렵게 만드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성금을 내지 않았으면서도 낸 척을 한다면, 그것은 위선이 아니라 사기죄입니다.)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함부로 위선자라고 판단하면 안 되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나는 위선자가 아니다.” 라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판단하는 일 자체를 금지하셨습니다(마태 7,1).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는 위선자가 아니다.” 라고
판단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교만이 되고, 그 자체가 위선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진짜 위선자는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거나 부인합니다.
그래서 “나는 위선자가 아니다.” 라는 말은 위선자들이 주로 하는 말입니다.
반대로, 위선자가
아닌 사람은, 즉 진실한 사람은
자기의 행동이 위선일 수도 있음을 늘 경계하면서,
교만과 위선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계속
노력합니다.
자선을 베풀고 나서 칭찬을
받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고,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칭찬을 못 받더라도
서운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받아도 그만, 못 받아도 그만이라는 ‘초연한’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자기를
감추고 익명으로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마태 6,3).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고,
사람들의 칭찬은 못
받아도 하느님께서는 크게 칭찬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약속입니다(마태 6,4).
‘기도’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기도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기도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위선자들의 기도는 ‘기도하는
척’을 하는 연기이고,
그것은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가 연기인지 진짜인지는 모릅니다.)
신앙생활
전체로 확대해서 생각하면,
겉으로만 열심하고,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위선적인 신앙생활이 됩니다.
흐트러짐 없이 미사 참례를
열심히 했지만 미사 시간 내내 딴 생각만 하고 있었다면,
속이려는 의도가 없었더라도 위선이 되어버립니다.
위선적인 신앙생활은 사실상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위선자들의 ‘단식’과
‘극기고행’의 경우에는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한다는 점에서는 ‘기도’의 경우와 같고,
밥을 실제로 굶고, 고행을 실제로
한다는 점에서는 ‘자선’의 경우와 같습니다.
어떻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또 거룩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으려고
단식을 하고 극기고행을
하는 것은 거짓일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엄격한
극기고행을 하는 생활을 했는데,
그를 보고 “마귀가 들렸다.” 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마태 11,18).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의 눈에는 요한의 극기고행이 위선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위선자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요한은 극기고행을 중단했어야
할까?
반대로, 단식도 하지 않고 극기고행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던 예수님에 대해서는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라고 비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마태 11,19).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의 눈에는, 복음을 선포하시고, 믿고 회개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모든 면이 다 위선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위선자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처럼
엄격하게 극기고행을 하셨어야 했을까?
여기서 ‘위선자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라는 말은 하나의 함정입니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고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하는 것도 위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위선자라고 비웃든지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든지 간에
그런 것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그런 말을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인정’입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초연한 것과 평가를 무시하는 것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나만 떳떳하면 되지.” 라는 태도가 교만과 자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위선자가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면서도,
말과 행실로 복음을 증언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베풀면 반드시 오는 은총...
† "그리하여 네가 (기도, 자선,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6.16-18 참조)
그대에게
“적선(積善)하는 사람은
귀신도 두려워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적선에는
하늘의 힘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안하면
점을 보고 부적을 붙이고
액을 쫓는 데에만 열중했지
적선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말은 쉬워도
행동은 예로부터 어려웠던 것입니다.
남을 돕는다고
모두가 적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적선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적선을 금전과 연관 짓습니다.
돈으로 도와야 적선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남을 돕는 일이 어찌 금전뿐이겠습니까?
불교의 보시(布施)에는
세 등급이 있습니다.
첫째가 무외시(無畏施)입니다.
삶의 두려움을 없애 주는 것을
최고의 적선으로 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가르침을 베푸는 법시(法施)입니다.
제일 낮은 것이 재시(財施)입니다.
재물로 도우는 것을
적선의 기본으로 본 것이지요.
그러니 진정 요구되는 것은
돈과 재물이 아니라 애정입니다.
때로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강렬한 적선이 됩니다.
‘다정한 눈빛 하나’가
어떤 행위보다 힘 있는 자선이 됩니다.
베풀면 반드시 은총이 옵니다.
하늘의 힘이 그와 그의 주변을 지켜 줍니다.
- 까따꿈바 묵상팀 -
오늘 우리의 종교인들 관심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가?
내 교회, 내 성당, 내 사찰의
몸집(성전) 키우기에 급급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비와 사랑은 입으로만 외치지 말고
가슴으로 애정을 담아 적선을 한다면
세상은 공동선으로 살맛이 나지 않을까?
주님을 모시고 사는 신자로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으니
고개 숙여집니다.
종교는 '나'에서 '너'를 보고 살아
'우리'라는 공동체로 함께 살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