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금요일]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마태 6,19-23)

2016. 6. 17. 오전 5: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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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금요일]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마태 6,19-23)

 

여호야다 사제는 아하즈야 임금의 아들 요아스 왕자를 임금으로 세우고, 아탈야를 죽인 뒤 바알 신전을 허물고 주님의 집에 감독을 세운다. (열하 11,1-4.9-18.20)
그 무렵 아하즈야 임금의 1 어머니 아탈야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서는,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다. 2 그러자 요람 임금의 딸이며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살해될 왕자들 가운데에서, 아하즈야의 아들 요아스를 아탈야 몰래 빼내어 유모와 함께 침실에 숨겨 두었으므로, 요아스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3 아탈야가 나라를 다스리는 여섯 해 동안, 요아스는 유모와 함께 주님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
4 칠 년째 되던 해에 여호야다가 사람을 보내어 카리 사람 백인대장들과 호위병 백인대장들을 데려다가, 자기가 있는 주님의 집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는 그들과 계약을 맺고 주님의 집에서 맹세하게 한 다음, 왕자를 보여 주었다.
9 백인대장들은 여호야다 사제가 명령한 대로 다 하였다. 그들은 저마다 안식일 당번인 부하들뿐만 아니라 안식일 비번인 부하들까지 데리고 여호야다 사제에게 갔다. 10 사제는 주님의 집에 보관된 다윗 임금의 창과 방패들을 백인대장들에게 내주었다. 11 호위병들은 모두 무기를 손에 들고 주님의 집 남쪽에서 북쪽까지 제단과 주님의 집에 서서 임금을 에워쌌다. 12 그때에 여호야다가 왕자를 데리고 나와, 왕관을 씌우고 증언서를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은 다음, 손뼉을 치며 “임금님 만세!” 하고 외쳤다.
13 아탈야가 호위병들과 백성의 소리를 듣고 백성이 모인 주님의 집으로 가서 14 보니, 임금이 관례에 따라 기둥 곁에 서 있고, 대신들과 나팔수들이 임금을 모시고 서 있었다.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는 가운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서 아탈야는 옷을 찢으며, “반역이다, 반역!” 하고 외쳤다. 15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가 군대를 거느린 백인대장들에게 명령하였다. “저 여자를 대열 밖으로 끌어내시오. 그를 따르는 자가 있거든 칼로 쳐 죽이시오.” 여호야다 사제는 이미 “주님의 집에서 그 여자를 죽이지 마라.” 하고 말해 두었던 것이다. 16 그들은 그 여자를 체포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탈야가 왕궁의 ‘말 문’으로 난 길에 들어서자, 거기에서 그 여자를 죽였다.
17 여호야다는 주님과 임금과 백성 사이에, 그들이 주님의 백성이 되는 계약을 맺게 하였다. 또한 임금과 백성 사이에도 계약을 맺게 하였다. 18 그 땅의 모든 백성이 바알 신전에 몰려가 그것을 허물고, 바알의 제단들과 그 상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었다. 그들은 또 바알의 사제 마탄을 제단 앞에서 죽였다. 여호야다 사제는 주님의 집에 감독을 세웠다. 20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였다. 아탈야가 왕궁에서 칼에 맞아 죽은 뒤로 도성은 평온해졌다.


수님께서는 땅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시고, 눈은 몸의 등불이라 눈이 맑으면 온몸이 환할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6,19-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20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제1독서 (2열왕11,1-4.9-18.20)


"그 무렵 아하즈야 어머니 아탈야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서는, 왕족을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요람 임금의 딸이며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살해될 왕자들 가운데에서,

 아하즈야의 아들 요아스를 아탈야 몰래 빼내어 유모와 함께 침실에 숨겨 두었으므로,

 요아스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아탈야가 다스리는 여섯 해 동안, 요아스는 유모와 함께 주님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

 칠 년째 되던 해에, 여호야다가 사람을 보내어 카리 사람 백인 대장들과

 호위병 백인대장들을 데려다가, 자기가 있는 주님의 집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는 그들과 계약을 맺고 주님의 집에서 맹세하게 한 다음,

 왕자를 보여 주었다." (1~4)

 

열왕기 하권 1~13장은 엘리사 예언자를 중심으로한 분열 왕국 중반기 역사를 다룬다.

 

그 가운데 열왕기 하권 1~10장은 열왕기 상권 19장 15~18절에 기록된 엘리야의 예언대로

아합 왕가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임하기까지의 북부 이스라엘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으며,

남부 유다에 대해서는 단지 결혼으로 맺어진 아합 왕가와 관련된 사건들만을 다루었다.

 

특히 열왕기 하권 9장과 10장은 북부 이스라엘 제10대 왕 예후가 반란을 일으켜

북부 이스라엘의 왕 요람(9,24)뿐 아니라 남부 유다의 왕 아하즈야(9,29)와

아합의 처 이제벨(9,11)과 아합의 칠십 왕자(10,9)와 아하즈야의 형제 마흔두 명(10,14) 및

모든 잔당들을 숙정한 내용(10,17; 10,25)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에 이어지는 열왕기 하권 11장은 예후의 혁명을 통한

아합 왕가에 대한 심판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남부 유다의 역사로서

남부 유다의 제7대 왕 아하즈야의 모친이자 아합의 딸인 아탈야

다윗 왕가에 대한 반역을 일으켜 남부 유다를 차지한 사건

(B.C.841~845년)을 기록하고 있다.

 

아탈야의 반역과 왕자 학살 사건은 지금까지 다윗 가문이 아합 왕가와

결혼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2역대18,1) 우상 숭배라는 범죄에

빠져든 데에 따른 하느님의 징계의 결과였다.

 

반면에 자신의 모친 이제벨과 비슷하게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아탈야의 죽음은

다윗 왕가에 우상숭배를 도입한 것에 대한 하느님의 형벌이었다(11,16).

 

그러나 아탈야를 통해 끔찍한 비극을 겪게 하시는 심판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여호야다 사제를 통하여 아하즈야의 숨겨둔 아들 요아스를 구원하여

다시금 다윗 가문을 잇게하는 은총을 베푸셨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다윗과 맺은 계약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자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7,16)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또한 이 은혜는 "한 지파는 그의 아들에게 주겠다. 그리하여 나의 종 다윗에게 준

등불이 내 앞에서, 내 이름을 두려고 뽑은 도성 예루살렘에서 언제나 타오르게 하겠다."

(1열왕11,36)라는 말씀과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 종 다윗을 생각하시어,

유다를 멸망시키려고 하지는 않으셨다. 일찍이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영원히 등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2열왕8,19)라는

말씀의 약속을 주 하느님께서 지키신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예후 혁명 이후 남부 유다의 비극적 역사와 극적 회복을 묘사하고 있는

열왕기 하권 11장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열왕기 하권 11장 1~11절 남부 유다의 아탈야가 아들 아하즈야의 죽음을 계기로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왕자들을 모두 숙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학정을 저지르는 내용

다루고 있고, 열왕기 하권 11장 12~21절 여호야다 사제의 주도로 요아스가 왕으로

즉위한 것과 온 국민의 참여를 통하여 종교개혁이 단행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본문에서 아하즈야의 어머니로 소개된 '아탈야'는 북부 이스라엘 제7대 왕 아합과

이제벨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서 남부 유다 제5대 왕 여호람의 아내 된 여자였다.

 

이처럼 아탈야가 남부 유다왕 여호람과 결혼하게 된 것

북부 이스라엘의 아합과 남부 유다의 여호람이 군사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하여 행한 정략적인 혼인 정책 때문이었다

(1열왕22,2~4; 2역대18,1).

 

아탈야는 모친 이제벨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아 매우 포악하였고,

남편 여호람과 아들 아하즈야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남부 유다에 바알 우상 숭배를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아탈야'라는 이름은 '위대하다' 내지는 '존귀하다'라는 뜻의

앗수르어 '아탈'과 하느님을 지칭하는 '야'(ya)가 결합된 것으로

'하느님은 존귀하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북부 이스라엘 우상 숭배의 원흉인 아합과 이제벨의 딸이 이러한

신앙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가 부모의 성향을 물려받아 하느님 대신에 바알을 숭배하는데

앞장 선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 무렵 아하즈야 임금의 어머니 아탈야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서는,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다.'

 

아탈야가 머물고 있는 남부 유다의 예루살렘과 아하즈야가 죽은

북부 이스라엘의 이즈르엘(2열왕9,15.25)은 상당히 먼 거리였으므로

아탈야가 아하즈야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을리가 만무하다.

 

따라서 아탈야는 단지 아하즈야와 함께 있던 병사들을 통해

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듣다' 라는 청각적 동사 대신에 '보다'라는 시각적 동사를

사용하여 사건의 묘사에 역동성을 부여하였다.

 

새 성경에서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서는'으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자기 아들을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로 되어 있다.

 

즉 이어지는 '일어나'('와타쿰'; wathaqum; arose)동사를 번역하지 않았다.

 

이것은 실제로 아탈야가 일어나는 행동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개시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아탈야가 남부 유다의 왕이며 아들이었던 아하즈야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그것을 계기로 반란을 일으켰음을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쓴 것이다.

 

이런 표현들을 통해 아탈야는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매우 적극적이며 치밀하게 행동했음을 알 수 있다.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다.'

 

아탈야가 왕권을 쟁취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행한 일이다.

'왕족'으로 번역된 '제라으 함마믈라카'(zerah hammamlakah)

'왕의 씨' 말한다.

'씨'(seed)의 뜻을 가지고 있는 '제라으'(zerah)는 '뿌리다','퍼뜨리다'라는

뜻의 동사 '자라으'(zarah)에서 유래된 명사로서 본문처럼 사람과 관련해서

사용될 경우에는 '자손','인척' 가리킨다.

 

또한 '왕의'에 해당하는 '함마믈라카'(hammamlakah)

문자적으로 '그 왕족'을 뜻하는 단어로서 다윗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남부 유다의 왕권을 지칭한다.

 

병행 구절인 역대기 하권 22장 10절에서는 '유다 집안의 왕족'이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왕족'(왕의 씨)이라는 표현은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는 다윗 가문의 모든 자손'을 가리킨다.

 

아하즈야의 형제들은 과거 아라비아 사람들에 의해 모두 살해되었고(2역대22,1),

아하즈야의 조카들도 예후에 의해 모두 살해되었기 때문에(2열왕10,13~14),

여기서 말하는 '왕족'은 아하즈야의 직계 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본문은 아탈야가 자신의 친손자들까지도 제거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그녀가 친손자들까지도 비정하게 죽인 이유는 당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유지하며, 더 나아가서는 북 왕국에서 몰락한 아합 왕가를

남 왕국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아들 아하즈야가 즉위하면서부터 그의 배후에서 권력을 휘둘렀는데

(2열왕8,26~27; 2역대22,3) 그런 그녀에게 아들의 죽음은

자신의 권력의 기반이 흔들리는 큰 위기로 여겨졌을 것이다.

 

따라서 왕권이 교체되어 자신의 권력마저 붕괴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기회에 몰락한 아합 왕가의 중흥을 도모하기 위하여

왕위에 오를 만한 인물들을 미리 철저히 제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손자들까지도 무참하게 죽이는

반인륜적인 아탈야의 모습은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사악하고 추해질 수 있는지를 잘 반영해준다.

 

하지만 '죽이기 시작하였다'(진멸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왓태압베드'

(watheabed)의 원형 '아바드'(abad)는 열왕기에서 하느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따르는 범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계가 내려질 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동사이므로(2열왕 9,8; 10,19; 13,7 등), 아탈야의 잔악한 행위 뒤에

하느님께서 보고 계심을 암시한다.

 

따라서 다윗 왕가의 왕권이 끊어질 위기에 이른 이러한 암울한 상황은

계약 아래 있었지만 하느님을 진심으로 섬기지 않는 행동으로 일관했던

남부 유다 왕들의 누적된 범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자 요람 임금의 딸이며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살해될 왕자들 가운데에서, 아하즈야의 아들 요아스를

 아탈야 몰래 빼내어'(2)

 

본문에서 '요람 임금'은 북부 이스라엘의 왕 '요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남부 유다의 제5대 왕인 '여호람'을 가리킨다.

 

또한 새로운 인물로 소개된 요람 왕의 딸 아하즈야의 누이 '여호세바'

아탈야의 친딸은 아니며 요람 왕의 다른 부인의 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남부 유다의 제6대 왕 아하즈야의 누이였으며,

여호야다 사제의 아내였다(2역대22,11).

 

한편, 여호세바가 아탈야를 대적하여 요아스를 숨기고 보호했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후에 요아스와 더불어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여호야다 사제의

아내가 된 점들을 감안하여 볼 때, 다윗의 왕위를 견고케 하시겠다는

다윗 계약(2사무7,16)을 알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

이 위험한 일을 감행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배후에는 다윗 왕조를 보호하기 위한 하느님의 주도적인 섭리가 있었다.

 

열왕기 하권 11장 2절은 요람 왕의 딸이며 아하즈야 앙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왕자 요아스를 극적으로 구출함으로써, 아하즈야의 아들들 즉 다윗의 후손들을

멸절하려는 아탈야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나타낸다.

 

한편 여기서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유일하게 다윗 가문에 남겨진 한 사람

요아스는 지금까지 있어왔던 북부 이스라엘 왕가의 운명과 관련해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를 전해준다.

 

즉 다윗 집에 속한 모든 왕자들이 몰살 당하는 가운데서라도 요아스가 남겨져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은, 이전에 북부 이스라엘에 우상 숭배를 도입하여

하느님을 진노케 한 여로보함의 집과, 그 뒤를 따라갔던 바아사의 집, 그리고 전례가 없는

열렬한 바알 숭배자였던 아합의 집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때, 그 집에 속한 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멸당했던 사실과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얼마나 신실하게 당신의 계약(언약)을 지키시는지에 대한

신학적 메시지를 함축한다.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6,19-23)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19)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밝으면 온 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22~23)

 

'좀'에 해당하는 '세스'(ses; moth)는 의복을 갉아 먹는 해충이다.

'녹'에 해당하는 '브로시스'(brosis; rust)는 구리를 부식시키는 푸른 녹을 말한다.

 

'보물'에 해당하는 '테사우로스'(thesauros)는 '저축하다', '보관하다'라는 뜻의

'티테미'(tithemi)에서 유래했는데, '어떤 물건이 보관되어 있는 곳', '창고',

'보배함', '보화'등을 통칭한다.

 

우리 인간은 육신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기 때문에 '보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자신을 위하여', '너희를 위하여'만

보물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신다.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영적인 일이 아닌, 이 땅의 일에만

현세의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일에만 집착하여 보물을 사용하는 것을

경계하시는 말씀이다.

 

그것은 마치 '좀'과 '녹'이 의복을 갉아먹고 구리를 부식시켜 못쓰게 만들듯이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또한 보물 혹은 재화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말씀에 나오는데로 '도둑들'에

해당하는 '클렙타이'(klleptai)가 가리켜 주듯이, 단수가 아닌 복수의 '도둑들'이

땅에 쌓아둔 재물을 끊임없이 넘보게 되는 불안감과 위기가 있게 된다.

 

우리 인간의 수명은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대다수 100년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죽을 때는 태어날 때처럼 '빈손'으로 가고, 그래서 시신을 두르는 수의는

주머니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6장 20절에 나오는데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도 말씀하신다.

 

이 마태오 복음의 병행 구절인 루카 복음 12장 33절에서는 구체적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행위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타인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성경은 형제들의 부족함과 결핍을 헤아리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선행은

하느님의 응분의 갚음과 상급을 받음을 이야기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잠언19,17)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마태19,21) 

 

우리는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기 위해 가진 것을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와

이웃의 선익을 위해 올바로 쓰고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물질적인 재화이든, 재능(탈렌트)이든, 신앙이든, 은사이든 무엇이든지간에

우리의 도움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밝으면 온 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마태오 복음 6장 22절과 23절은 사람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야 할

이유 가운데 하나를 밝히고 있다.

 

즉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머물 수 밖에 없으므로, 재물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마음의 눈을 밝혀 온몸을 밝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밝으면'(성하면)에 해당하는 '하플루스'(haplous; good; single)는

건강하다는 뜻이며, 윤리적으로는 '관대하다','너그럽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재물에 대하여 관대하며 인색하지 않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재물의

노예가 되어 저지르는 잘못을 범하지 않고, 비로소 '온몸이 환할 것'이 뜻하는

내용, 즉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선항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는 말이다.

 

또한 '성하지 못하면'에 해당하는'(나쁘면)에 해당하는 '포네로스'(poneros;

bad; evil)는 육체적으로 '허약한'이라는 뜻과 더불어 '악한'이라는 뜻도 있다.

 

여기서도 형제의 필요를 생각하기보다는 재물에 대하여 집착하고 인색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는 것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인색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마치 어둠속에서 사물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악한 일을 일삼으며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임을 뜻한다.


 2015. 06. 19<연중 제 11주간 금요일>"보고자 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빛과 어두움..."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송영진 모세 신부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2-23)”


이 말씀에서 ‘등불’은 ‘예수님의 복음’으로,
‘몸’은 사람의 전인격으로(또는 인생으로),
‘눈’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눈’(영혼의 눈)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라는 말씀은,
건강한 영혼의 눈으로 복음을 믿고 잘 받아들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또는 그 사람 자신이 복음의 빛 속에 머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인생이,
또는 그 사람 자신이 죄의 어둠 속에 빠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빛이 아니라 어둠인데도 빛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면”입니다.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는,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입니다.


어둠을 빛이라고 착각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들은 바리사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이렇게 꾸짖으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회개해서 자기의 죄를 씻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또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우기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더 죄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물질주의나 황금만능주의도 일종의 ‘착각’입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그 생각은
사실상 무신론자들의 생각인데, 어둠을 빛이라고 착각하는 것이고,
죄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이 말씀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 나오는 하느님 말씀입니다.)
여기서 ‘되찾아 갈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인간의 목숨은 하느님의 것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인간은 자기 수명을 조금도 늘리지 못합니다(마태 6,27).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말씀의 뜻은,
“지상에 있는 것들은(하느님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닌 것들은)
어느 누구도 차지하지 못한다.”입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들’을 얻으려고 애를 쓰고 있고,
그것을 모으고 쌓고 지키는 일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허무한 것인데도 허무하지 않다고 착각하고 고집을 부리면,
더욱더 큰 허무함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이 말씀에서 ‘자신을 위하여’는 ‘자신만을 위하여’이고, 이 말은 이기심을 뜻하는데,
“지상에서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하여”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일은,
‘영혼 구원’은 생각하지도 않고, 지상에서의 부귀영화만 추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라는 말씀은,
“허망하게 사라질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은,
믿음, 사랑, 선행을 실천하면서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일입니다.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늘에 쌓은 보물은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는 허무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은 그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라는 말씀은,
‘가치관’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지금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 내가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얻으려고(또는 지키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믿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안 믿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다릅니다.
달라도 너무 많이 다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미워할 정도로...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가치관이 같아서, 같은 것을 희망하고, 같은 것을 추구한다면,
자기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최소한 미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안 믿는 사람들이 희망하지 않는 것을 희망하고,
그들이 추구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그들이 가지 않으려고 하는 나라에 가려고 노력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안 믿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묵상


사유 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내가 지닌 재산이 삶의 가치를 높여 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제한된 재화가 능력과 기회에 따라 제대로 분배되고, 노력과 열정이 정당하게 평가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오랜 역사적 교훈과 시민 의식의 성숙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선진국은 재산이 많은 일부의 사람들이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모두에게 기회의 균등과 분배의 정의가 잘 이루어져 더불어 잘사는 복지 국가를 뜻합니다.
어떤 경제학자가 자본주의야말로 인류가 계발해 낸 가장 훌륭한 경제 체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더 나은 자본주의가 가능하려면 재화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보편적 윤리 의식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없어질 세상에 마음을 두기보다 영원히 썩지 않을 영적인 가치들을 인생의 보물로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썩지 않을 영적인 보물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눈이 맑아지는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란 말씀은,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 몸이 빛을 따라 걸을 수도 있고, 어둠 속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본다고 하지만, 보는 만큼 살아가기도 합니다. 육의 눈으로 보는 것은 탐욕으로 흐르지만, 영의 눈으로 보는 것은 영적인 인간을 만듭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영의 눈으로 느낄 수 있는 하늘의 보물들입니다.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땅의 재산입니까? 하늘의 보물입니까?


『음성강론』?2012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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